4:2-3  주 안에서 같은 마음


성경은 예수님을 ‘주 예수 그리스도’로 부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부르기 위한 이름만은 아닙니다. 즉 인간에게 불려지기 위한 이름으로서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선포하는 이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예수님이 누구시며 어떤 일을 위해서 오셨으며 그분에 대해서 우리는 어떠한 태도로 섬겨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이름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21절의 말씀처럼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로 오셨음을 말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라는 것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세상에 보내신 거룩하신 메시아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라는 것은 우리의 주인이 되신다는 뜻으로서 신자는 예수님에 대해서 오직 순종해야 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세상에 보내신 거룩하신 메시아로서 우리의 주인 되시는 분이라는 의미로써 불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다’는 의미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가 빠진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복종할 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단지 불러 주는 예수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 되시는 분이기 때문에 신자의 삶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어야 함이 마땅합니다. 즉 나 개인의 유익을 위한 삶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내가 존재하고 나의 삶이 있다는 생각이 굳건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부분이 소홀해진다면 우리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일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가 신자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자기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상식, 또는 취미 등등 자기 것이 있고 자기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키기 위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처럼 사람이 자기 것을 지키려고 할 때 결국 발생하는 것은 싸움입니다.



싸움의 대부분은 사람이 저마다 다를 수 있는 자기 것을 포기하고 타인의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음으로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보면 자신과 일치되고 조화되는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하나의 파벌이나 구별로 나아가게 되는 것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교회는 싸우면 안된다’ ‘교회는 항상 서로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들이지만 사람과 사람이 모인 관계 속에서 싸움과 다툼이 없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로 모인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같고, 취미가 같고, 상식과 성향 등 모든 것이 같다면 같지 않는 것보다는 싸움과 다툼이 없이 지낼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각양 각색의 사람이 모인 교회에서 모든 것이 서로 일치된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고, 또 그런 기대는 단지 교회가 좋은 교회이기를 바라는 욕심에 의한 기대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싸우지 않고 다투지 않기 위해서 힘쓰기보다는 싸움이 있고 다툼이 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깨닫는 것이 더 지혜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들이 참고 노력함으로서 싸움이 없고 다툼이 없다면 그것은 싸움과 다툼을 숨기고 있을 뿐이지 진심으로 같은 마음, 같은 생각으로 모이기 때문에 자연히 싸우지 않게 되고 다투지 않게 되기 때문은 아닌 것입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위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에는 사도 바울이 보기에 조그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회 내에서 유오디아와 순두게라고 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두 여인 사이에 다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빌립보 교회의 화합과 일치를 방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많이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교회 내에서 두 사람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면 그것은 두 사람의 다툼으로만 끝나지 않는 것을 많이 봅니다. 두 사람이 다투게 되면 다른 사람들은  서로 자신이 동조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파벌이 형성되어지게 되고 그것이 결국 교회 전체의 불화로 번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비록 두 여인의 싸움이 있었지만 그것을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여인의 개인적인 문제로 보지 않고 교회의 문제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교회에 싸움이 있다는 것을 가지고 책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싸움이 있을 때 그것을 어떤 방향으로 해결해 가는 것이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로서 바른 모습인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세운 교회가 싸움과 다툼으로 인해서 무너질 것을 염려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개 교회에 싸움이 있을 때 목사가 염려하는 것은 내가 담임하는 교회가 싸움으로 인해서 흔들리고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 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목사 역시 교회를 담임할 때 교회에 아무런 문제가 없이 평온하기를 원하는 것은 교회의 평안이 결국 목사 개인의 평안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가 싸움이 있다는 것보다는 아무런 문제없이 서로 사랑하며 잘 지내는 목사로서 자기 명성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자신이 세운 자신의 교회라는 의식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두 여인이 싸워서 내 교회를 망친다는 생각으로 본문과 같은 말을 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점을 염두에 두고 과연 사도 바울이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교회로 모일 때 사도 바울이 생각하는 바를 따라서 생각하는 것이 참된 교회로 나아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2절에서 바울은 서로 다툰 두 여인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주님에게 복종하라는 의미입니다.



지난 주에 주 안에서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주 안에서는 주님이 하신 일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즉 주님이 하신 일 앞에 복종하는 것이 주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 안에 거한다는 것은 막연한 것도 아니고 이론적인 것만도 아니고 실제적이며 구체적임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주님이 하신 일 앞에 복종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한 예를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이 하신 일이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스스로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피조물을 섬기신 것이고 피조물을 위해서 희생하신 것입니다.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섬기는 것이 세상의 질서이며 규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예수님은 영광의 자리에 계신 높으신 분으로서 하찮은 자리에 있는 낮은 우리를 섬기시고 희생하심으로서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질서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 있다는 것은 바로 새로운 하늘의 질서 안에 있다는 것이고, 신자가 주님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주님이 세우신 새로운 질서에 순종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새로운 하늘의 질서에 순종하며 산다면 그에게서 자신의 것은 보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즉 힘이 있다고 해서 약한 자를 무시하지 않을 것이고, 자기 것이 옳음을 고집하면서 양보하지 않고 부딪히고야 하는 결과로 나아가게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세워지는 것이 중요하지 내가 세워지는 것은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머무는 것이 곧 주님에게 복종하는 것이고 그것이 주 안에서 볼 수 있는 복종의 모습인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우리의 친목을 위해서 모이는 단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여지는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우리의 영광이나 이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나 자신의 만족을 찾으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교회가 나를 즐겁게 하고 만족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모든 것은 종교에 대한 인간의 욕망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하나님의 교회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관자이시기 때문에 교회는 예수님에 의해서 다스려져야 하고 예수님이 머리로 주인으로 존재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부르는 것이 곧 이런 의미임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주께 복종하지 않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는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주께 속해 있음으로 교회의 모든 것은 항상 주라는 관계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모든 것을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면 싸움이나 다툼은 충분히 해결될 것입니다.



교회에 싸움이 있게 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교회는 주께 속해있음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머리되신 주님을 보지 않고 인간만을 보기 때문에 항상 나 자신의 것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주가 나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를 않고 또 주님이 주신 것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피입니다. 그 피는 곧 섬김과 희생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죽어야 하고 멸망에 처해야 할 우리가 살았습니다. 따라서 하늘의 생명이 없는 자에게 생명이 주어지고 그것이 얼마나 귀한가를 아는 신자라면 자연히 생명이 주어지게 된 주님의 희생과 섬김을 높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희생과 섬김 아래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희생과 섬김이 요구하는 것에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그 순종함으로 인해서 형제를 사랑하게 되고 형제를 배려하면서 양보하게 되고 나에게 유익되는 것보다는 주님에게 유익되는 길을 먼저 찾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다스리는 교회이며 주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교회인 것입니다. 인간의 것이 아닌 주님의 것이 증거되는 주님의 교회인 것입니다. 은석교회가 과연 이러한 교회로 모여지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보면서 ‘교회가 내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 맘에 드는 교회를 찾아서 헤매고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내 마음에 들기를 바라는 것은 주님을 생각하지 않는 극히 이기적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란 날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있는 것임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에 싸움이 있다는 것도 교회에서 주님을 생각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이란 신자가 서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마음으로 살고자 한다면 그것으로 이미 같은 마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서로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할 때 주님과의 관계를 배제한 채 말한다면 그것은 어느 한 개인의 마음에 내가 맞춰야 하는 것이 요구되어집니다. 즉 사람에게 맞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은, 어느 한 개인의 마음에 내 마음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일치된 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주님이 중심 되어야 합니다. 주께 다스려지고 나 자신보다 주님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신자라면 자연히 무엇이 주님을 위한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그 마음이 같은 마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주님께 대한 같은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에서 서로 자신보다는 주님의 희생과 섬김을 생각하게 되고 자연히 성도의 싸움이 주님의 이름을 훼손하게 되는 것임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4:1절에서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바울이 말하는 것은 단순한 교회의 일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끼리 일치되는 단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즉 주 안에 서는 것이 있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서 행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을 위한 교회는 이미 교회의 존재 의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인간을 붙들기 위해서 진리를 포기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교회로 서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교회로 서기 위해서는 모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기 것을 주장함으로써 싸움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중심으로 하지 않은 것이고 주님을 생각하지 않는 것임을 말하면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싸움을 한 당사자들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즉 교회의 싸움을 싸움을 한 당사자들의 문제만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위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멍에를 같이 한 자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르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가보다는 멍에를 같이 한 자라는 말을 한 의미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바울과 멍에를 같이 한 자라는 것은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바울은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같은 길을 가는 동역자에게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부녀’라는 표현을 합니다. 즉 그들은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복음에 힘쓰던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가 지금은 비록 복음을 위해 힘쓰는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의 믿음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져서는 안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서로 돕는 관계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가기 위한 일에 서로 돕는 관계로 만나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신자로서의 삶이 되어지기 위해서 우리 서로는 돕는 관계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주님을 머리로 한 교회가 어떤 것인가를 증거 해야 할 일이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주님을 생각하는 것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더 중요한 주님이 계시고 그분이 나를 다스리고 그분이 나의 주가 되심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생각할 때 주 안에서 우리는 같은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