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항상 기뻐하라


본문의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은 여러 신자들이 원하는 삶인 동시에 사실상 원하는 것으로 그쳐버리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항상 기쁨이 있는 삶을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에 사실 본문과 같은 성경을 대하면 ‘그래 그렇게 살아야지’라고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의 답답함은 여전한 것이 현대 교인들의 실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본문에 대해서 불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누구는 기뻐할 줄 몰라서 기뻐하지 않는가? 도대체 기뻐할 조건을 줘야 기뻐하며 살아가지 않겠는가?’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은 항상 기뻐하며 살고 싶은데 기뻐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조건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대로 살아보기 위해서 슬픈일   이 있고 고통이 있을 때 스스로의 의지로 슬픔과 고통을 이겨보려고 애를 쓰기도 합니다. 기뻤던 일을 생각하면서 기뻐하기 위해 애를 쓰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사람이 스스로의 의지로 슬픔과 고통을 이기고 항상 기뻐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의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권면은 우리 스스로의 의지와 마음가짐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분명 항상 기뻐하는 삶을 원하기는 하지만 우리들이 노력한다고 해서 마음먹은 대로 기뻐하며 살아갈 수 없는 것이라면 사도 바울은 무슨 의미로 이 말을 하는 것입니까? 우선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말하는 기쁨은 대개의 사람들이 원하는 기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적인 조건이 채워짐으로써 그것으로 기뻐하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기쁨은 세상적인 조건에 있습니다. 그래서 원하는 조건이 채워지지 않을 때 분명 불만이 있게 되고 그 불만은 그에게서 모든 기쁨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대하면서 분명히 할 것은 성경은 세상적인 조건으로 인한 기쁨을 결코 말하지도 않고 약속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많은 교회가 전도를 하면서 ‘예수 믿으면 행복이 온다’ ‘예수 믿으면 평안이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한 전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세상과 연관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막무가내로 ‘기뻐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주 안에서’라는 말을 합니다. 즉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신자에게 기쁨이 되는 모든 조건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생각한다면 신자가 주님 안에 있는 것을 소망하지 않고 다른 세상의 것을 마음을 둔다면 그것은 이미 기쁨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삶의 특징을 말한다면 아마 ‘기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핍박과 고난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라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찬미하고 기뻐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초대교회 신자들의 오기나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당하는 핍박이나 고난보다 더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을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도의 기쁨은 무엇에 삶의 가치를 두고 살아가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 하는 것은 당시 빌립보 교회에 기쁨을 잃어버린 무엇인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어떤 원인으로 인해서 기쁨을 잃은 그들에게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를 보면 신자가 기쁨을 잃어버릴 수 있는 여러 가지 요소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가령 바울은 2장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것을 말합니다(2:5). 그리고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합니다(2:14). 그리고 21절에서는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원망과 시비는 타인과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발생합니다.


현재의 자신의 처지가 타인보다 못하다고 여겨질 때 원망과 시비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기쁨을 잃은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지 않은 것이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기보다는 자신의 일을 구한 결과인 것입니다.



또 3장에서는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음을 말함으로써 신자의 기쁨이 무엇에 의해 잃어버릴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다툼을 말하고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함으로써 무엇이 신자로 하여금 기쁨을 잃게 하는지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볼 때 교회에 염려함이 있고 근심이 있고 원망과 시비가 있고 다툼이 있게 되는 것은 신자로서 붙들어야 할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생각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되어진 일을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서 증거되어야 할 모습보다는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악한 것이 드러나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 안에서를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은 말 그대로 신자의 기쁨의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신자의 기쁨은 어떤 종교적인 체험에서 오는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기쁨이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기쁨을 우리가 살아가면서 흔히 가지는 기쁨과 같은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가령 여러분의 삶에 좋은 일이 있을 때 감정적으로 심리적으로 마음에 기쁨이 있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기분이 좋아진 상태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그 기쁨을 이처럼 기분이 좋아지는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상태에서의 기쁨으로 경험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상태에서 기분이 좋아지는 것에서 행복감을 느낍니다. 사람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할 때는 매우 기분이 좋은 상태일 때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하고 주 안에서의 기쁨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사람으로 하여금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으로서의 기쁨을 말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기쁨의 의미를 모를 때 결국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기분이 좋은 상태로서의 기쁨을 주 안에서 기대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아무리 그리스도를 믿어봐도 그러한 기쁨을 느끼지 못할 때 스스로 좌절할 수도 있고 자신의 믿음에 대해 의심할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기쁨을 체험하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볼 때 복음을 말하면서 복음이 마치 우리에게 행복감을 느끼게 해준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기분이 좋아져야 한다는 생각 역시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인간의 감정과 심리는 주변 여건과 상황에 의해서 수시로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감정과 심리로서는 일시적인 기쁨의 느낌은 가능할지 몰라도 ‘항상’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기분이 좋은 기쁨의 상태가 얼마나 지속될 것 같습니까? 사람의 기분의 상태는 수시로 뒤바뀌게 됩니다. 아무리 자신을 기분 좋게 하는 기쁨의 일이 있다 할지라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는 말을 합니다. ‘항상’이라는 것은 어떠한 일에서도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분 좋은 상태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지속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떤 형편과 상황속에서도 잃어버리지 않는 기쁨이라는 의미에서 ‘항상’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 자신에게서 기쁨의 상태를 찾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주 안에서 기뻐하고 있는가 기뻐하지 않고 있는가?’를 자신에게서 찾고 확인하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결국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기쁨의 상태에 매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어디에서도 기쁨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적인 일로 인해서 기분이 좋아진 상태를 두고 ‘하나님의 은혜’ 운운하면서 그것을 신앙적인 기쁨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그것은 결코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세상적인 것 안에서 기분이 좋아진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바울이 말하는 기쁨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주 안에서의 기쁨은 신자가 그리스도와의 바른 관계에 있음으로 인해서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즉 우리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고 좋은 일을 생각함으로써 느끼는 그러한 기쁨이 전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만 맺어지는 열매인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기뻐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에 있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바른 관계는 먼저 자신이 그리스도의 도움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죄인임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인간은 죄인이며 스스로 행하는 그 어떤 일도 그리스도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는 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착한 행위가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이고 의가 되는 것인 줄 착각합니다. 그래서 착한 행위로서 그리스도와의 바른 관계에 머물려고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벗어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행위로써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머물려고 한다면 결국 자신의 행위를 가지고 기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기쁨의 요소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가 신자의 기쁨의 요소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에 대해서 절망적으로 슬퍼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불쌍한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 주님의 기쁨을 알게 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달리 말하자면 그리스도로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에 대해서 전적으로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기뻐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은 죄인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신 희생이 있고 하나님이 피조물을 섬기신 섬김이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고 죽으신 겸손이 있으며 죄인을 도우신 도우심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신자에게는 분명 기쁨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기뻐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모든 것이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따라서 주 안에서의 기쁨 역시 없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기뻐하지 않는 것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안간의 비참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절망적인 존재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원의 가치에 대해서 무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신자는 자신의 절망과 비참함 속에서 그리스도의 은총이 얼마나 큰가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곧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죄인임을 알고 그리스도의 은총이 크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여러분의 삶에서 지속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성령이 오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은총이 크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전부이겠습니까? 분명히 신자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그리스도의 은총을 깨닫게 되는 것은 성령이 함께 하신 결과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게 하시고 떠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우리 안에 머무시면서 활동하십니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은총을 아는 자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성령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성령이 알게 하신 대로 그리스도의 은총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은 죄인되고 절망적인 인간에게 쏟아 부어진 선물입니다. 이러한 은총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분명 형제와의 관계에서도 증거 되어질 것입니다. 즉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으로 보여질 것이고, 남을 배려하면서 형제의 유익을 구하는 것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그것으로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 맺어지는 기쁨의 열매인 것입니다. 결국 주 안에서의 기쁨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을 뜻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0-12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기쁨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진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예수님의 기쁨을 주신다는 것이지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다른 요소와 조건을 채어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요한복음 15장의 말씀대로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기쁨이었고 그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기쁨으로 충만케 하신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기뻐하겠습니까? 역시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 계명은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즉 성도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주 안에서의 기쁨이 풍만한 자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서로 다퉜던 것을 말하면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다툼으로써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에서 벗어난 것이고 그것이 곧 주 안에서의 기쁨을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어떤 존재이며 그리스도의 은총이 얼마나 큰 선물인가를 다시 새롭게 하고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함께 하는 성도가 어떤 존재이며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 관계 안에 있는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를 사랑으로 대하게 될 때 그것이 곧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되는 것이고 본문의 말씀대로 주 안에서의 기쁨을 얻게 되는 것이 됩니다.



세상에서의 기쁨은 결국 여러분에게 실망을 줄뿐입니다. 사람은 결국 늙고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무엇으로 기뻐하겠습니까? 병들고 늙은 상태에서 과연 어떤 세상의 것이 그를 기뻐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기쁨은 일시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의 기쁨은 영원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함으로써 기뻐하셨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함으로써 기뻐할 수 있는 기쁨은 영원토록 계속 될 것입니다. 세상 것으로 기뻐하려고 하지말고 예수님이 주신 기쁨으로 항상 기뻐하는 삶이 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