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관용


‘관용’이란 말은 참으로 듣기에 좋은 말입니다. 모든 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용서한다는 의미가 관용이고, 종교적으로는 자신의 종교와 신앙내용을 절대시하여 타종교를 배제하지 않는 것을 관용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관용을 인간이 추구해야 할 수준 있는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5절)는 권면을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관용을 우리가 알고 있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모든 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용서함으로써 신자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라’는 뜻이 될 수 있고, 또 한편으로 종교적으로 이해해본다면 ‘그리스도만을 절대시하여 다른 종교를 배제하지 말고 연합하고 조화를 이루라’는 뜻의 말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음을 주장한 사도 바울이 타종교와의 연합과 조화를 위한 관용을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용서하라’는 의미로서의 관용을 말했을까요? 사실 모든 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의미의 관용은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덕목이며 인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굳이 종교가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들은 관용을 하나의 아름다움으로 보는 것도 사실입니다.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분노하지 않고 참고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다스리는 의지의 열매로 여기기 때문에 신의 가르침을 따라 스스로를 다스리고 절제하는 것이야말로 종교 안에서는 높은 수양과 믿음을 드러내는 하나의 증표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과연 이런 의미의 관용을 말했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여느 종교와 마찬가지로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우리는 그대로 실천하는 관계에 있을 뿐입니다.



종교에는 대개 그 종교의 믿음의 대상이 말한 가르침을 적어 놓은 경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경전에 기록된 대로 하나하나 실천해 가는 것을 곧 가르침에 대한 순종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즉 신은 말하고 인간은 실천하는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유교가 그와 같고 불교 역시 그와 같습니다.



그런데 현대의 기독교를 보면 기독교 역시도 그와 같은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을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스스로 관용하는 삶을 살기 위해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 힘씀이 불교에서는 스스로를 절제하고 다스리기 위한 극도의 고행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고행함으로써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절제력을 키우고 그로 인해서 모든 것을 용서하고 너그럽게 받아들일 줄 아는 관용을 보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관용은 우리 스스로 절제력을 키우고 수양을 쌓아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분노를 억누르고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절제력의 한계 안에서만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즉 모든 것에 관용하고 용서하고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비록 바울이 ‘너희 관용’이라는 말을 함으로써 마치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스스로의 믿음으로 관용을 실천해서 그 관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라는 의미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분명 사도 바울의 의도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로마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다’(롬 3:12, 7:18)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말이 인간에게서는 선이 나올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령이 오시고 성령의 다스림을 받게 된 신자라면 그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성령의 열매로서의 선입니다. 즉 인간이 행하는 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선이 보여진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 역시 스스로 관용을 행하고 보여주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성령이 함께 하는 신자로서 성령에 의한 관용이 보여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기쁨에 대해 말씀을 드리면서 우리의 기쁨이 아니라 주님의 기쁨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즉 주님의 기쁨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주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이 주 안에서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에 대한 내 기쁨을 찾으려고 하지말고 주님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삼게 될 때 신자는 주님의 기쁨 안에서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우리의 관용이 아니라 주님의 관용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너희 관용’이란 말을 하고는 있지만 이것은 앞서 말한 대로 우리가 스스로 행하는 관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관용이 주어진 자에게 ‘너희 관용’이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바울이 그리스도를 모르는 불신자에게 ‘너희 관용’이란 말을 한다면 인간이 스스로 행하는 관용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빌립보 교회를 향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관용’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관용이 주어진 신자에게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관용을 보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관용을 알게 하라는 뜻이 됩니다. 즉 빌립보 교회가 받은 주님의 관용에 대해 다만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에게 보임으로서 다른 이들을 주님의 관용으로 인도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관용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레미야 13:14절을 보면 “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간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관용치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관용이란 말을 언급하는데 이 구절에서 관용치 아니한다는 말은 심판과 연관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관용치 아니한다, 아끼지 아니한다는 말들이 마지막의 ‘멸하리라’는 말과 연결된 것을 볼 때 관용은 심판할 자를 심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서 9:22절의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라는 구절에서도 그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도 ‘관용’은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라는 구절과 연결된 것을 보면 역시 하나님의 심판과 연관된 구절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관용하라’는 말은 단순히 인간적 성품의 차원에서 용서하고 참고 받아들이라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과 연관된 의미로 쓰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는 다같이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된 존재였으나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관용하심으로 죄가 용서된 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용 아래 있는 신자는 그 누구도 죄에 대해서 떳떳한 자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입장입니다.



하나님을 벗어나서 홀로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얼마든지 떳떳하고 큰소리 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이 자신에게는 없기 때문에 허물 있는 자에게 큰소리치며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면서 타인을 공격하게 되고 타인의 허물에 대해서 책망을 하게 되며 자신에게 실수한 자에 대해 용서하고 안하고의 권리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자가 하나님을 벗어나 있는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관용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용하심으로 죄인의 죄가 가려지고 용서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관용을 알고 마음에 두고 사는 자라면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나는 저 사람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갖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의 관용은 하나님의 관용 아래 있는 믿음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너희 관용을 보이라’는  구절의 의미는 하나님의 관용 아래 살아가고 있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어야 함을 가르치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1절에 보면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이란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온유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관용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관용은 진노의 대상에 대해 오래 참으심으로써 보여졌습니다. 진노의 대상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만의 고유 권리입니다. 그 누구도 이 권리에 대해 침범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피조물이 하나님의 의도한 자리를 벗어나 있을 때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처리할 수 있으십니다. 그런데 그 권리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보류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관용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해 반대한 무리들에 대해서 얼마든지 심판하실 권리가 있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온유하심으로써 피조물에 의해 십자가에 죽으시는 관용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예수님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신 것입니다. 신자인 저와 여러분은 바로 이러한 관용 아래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관용의 의미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상황에서 자신의 권리를 고집하는 주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곧 관용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며,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장하지 않고자 하는 자세가 관용인 것입니다.



신자가 관용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몫을 잃지 않고 챙기려는 습성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기억하면서 포기하지 않으려고 할 때 관용보다는 판단과 다툼이 나오게 됩니다. 자신의 권리와 몫을 주장함으로써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가 관용하지 못하는 것은 주님을 생각하기보다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관용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때 누군가가 자신에게 당하게 한 불이익과 손해에 대해서 용납할 수 없는 분노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분노를 따라 행동하게 됩니다. 자신에게 행한 대로 보복하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21-23절에 보면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않으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겼음을 말합니다. 즉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심판을 맡기시고 예수님 스스로 심판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않으신 것이고, 고난을 받으시되 그들을 위협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관용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관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김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그분이 공의로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실 때가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언제나 자신의 기준과 상식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려고 하는 우리의 판단을 포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관용을 보이라는 말을 하고 이어서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말을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의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관용을 보이라고 말하고 왜 갑자기 주께서 가까우신다는 말을 하겠습니까? 그것은 주님이 오셔서 옳고 그름이 판단되어질 때가 가깝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판단하려고 하지말고 주님의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기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관용을 보이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이렇게 당할 수 없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애매하게 당한다는 것 때문에 억울하다는 생각이 있게 되고,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싸우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욕하는 자에 대해서 함께 욕하게 되고 애매하게 고난을 받을 때 보복할 기회를 찾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2:19절에 보면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라는 말을 합니다. 애매하게 고난을 받을 때 자신의 억울함을 생각하기보다는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는 자세에서 신자의 관용이 보여지는 것이며 이는 아름다운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행위가 아름답다기보다는 그가 보이는 것이 그리스도의 관용이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물론 관용하라는 것이 어떤 부당한 일에 대해서도 그냥 넘어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 손해보지 않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세상 것을 위한 싸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판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남을 쉽게 판단하지만 그것은 심판자이신 주님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심판에는 우리도 예외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욕하고 애매하게 고난을 받게 한 그들만이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주님 앞에서 판단을 받게 됨을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삶과 행동에 대해 주님으로부터 판단을 받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에 극히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고 말씀하셨습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이유는 세상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비판하는 그 비판이 나에 대한 주님의 비판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를 험담하는 사람을 비판을 할 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나는 평생토록 남을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자신이 있을 때 비판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도 남을 험담하면서 다른 사람이 험담하는 것을 비판한다면 결국 그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같은 비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비판하고자 할 때,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욕하고 정죄하고 싶어질 때, 여러분 자신 또한 주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을 것임을 생각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19절에서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말합니다. 관용은 스스로 심판자가 되지 않고 모든 원수 갚음을 주님께 맡길 때 보여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결코 악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신자는 이것을 믿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결코 참되다고 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판단으로 살아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 대해 보복할 자격이 없음을 다시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선악에 대한 바른 분별을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우린 모두가 우리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고 항상 우리의 유일을 꾀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것에서 바른 판단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항상 판단은 나를 중심으로 내려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신자다움은 불의를 행한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불의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관용 아래 살아가고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으로 살아가는 신자라면 있어야 할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살아가시면서 억울함을 받을 수 있고 뜻하지 않은 오해로 괴로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어떤 일을 겪든 그에 대한 보복을 마음에 두시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가까우시고 그분이 오시면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이 누군가에 대한 행위를 보고 불의하다는 확신이 드신다면 그것을 비판하고 정죄하기 보다는 그 불의함으로 심판 받을 그를 생각하며 불쌍히 여기게 되는 것이 신자로서 마땅합니다. 그리스도의 불쌍히 여기시는 은혜 아래 사는 신자로서 당연한 모습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억울하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모든 것은 주님이 갚으실 것입니다.



관용을 보이라는 것은 주님이 행하신 바를 따라 행하라는 뜻입니다. 관용을 보이신 주님을 따라 행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여러분이 누구에게 속해있으며 누구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가가 보여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죄와 비판과 욕하는 것보다는 주님의 온유하심과 긍휼과 자비로써 주님께 속한 여러분의 관용이 보여지도록 하십시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생각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따라가는 사람임을 다시 상기하시고 그분을 따라가는 삶을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주님께 속한 자로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