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7  기도


신학의 중심에는 ‘인간의 어떤 행위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거룩하지 않다’는 전제가 살아있습니다. 만약 이 전제가 무너지고 변동된 채 신학을 시작하게 되면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을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와는 완전히 빗나간 신학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인간의 행위에 거룩성을 두게 된다면 ‘인간이 하나님께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만 깊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빗나간 관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남겨주신 일은 관심의 대상 밖으로 밀려나게 되고 결국 파묻혀 버리는 현상만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보다는 ‘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반응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만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관심에서 크게 오해되어 행동되어지는 대표적인 것이 곧 ‘기도’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기도는 매우 중요한 신앙행위로 자리하고 있음과 동시에 기독교의 가장 대표적인  오해가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도에 대한 공통적인 사상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에게 구하여 얻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도는 이방인들에게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신자나 이방인이나 전혀 다를 바 없는 같은 수준의 기도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각기 부르는 신의 명칭만 다를 뿐, 신을 부르며 자신의 정성을 보임으로서 신의 마음을 자신에게 돌리기 위한 노력이라는 것에는 전혀 다를 바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방인의 기도는 자신에게 닥친 문제로 인해서 스스로 신을 찾는 것이지만, 신자의 기도는 하나님이 신자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심으로 인해서 발생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상관없고, 신자이면서도 이방인의 기도만 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기도에 대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6-7절)는 이 말씀을 대할 때 대개의 사람들은 ‘무슨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만 하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해결해주시고 평강을 주실 것이다’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 아뢰면 평강의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키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지 ‘다 들어 주겠다’거나 ‘우리의 모든 문제와 걱정거리를 해결해 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기도는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것과 연관된 것이지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내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8절에 보면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이미 아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해서 얻었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대할 때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알고 계신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가 ‘주기도문’이었던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기도의 의미는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나 역시 하나님의 듯이 이루어지는 일에 쓰여지기를 소원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결국 자기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동참되어지기를 원하는 것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의미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신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아버지의 뜻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할 수만 있으면 그 뜻을 피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정신입니다. 기도는 내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내 뜻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기도의 의미인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물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영광으로 이어진다면 얼마든지 즐겁게 우리의 뜻을 포기하겠지만, 하나님의 뜻은 결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신 예수님을 향하신 아버지의 뜻이 십자가의 죽으심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부르셔서 예수님으로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고자 하십니다. 그렇다면 신자를 향하신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 뜻에 스스로 순종하겠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의 기도가 바로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가 참으로 힘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내 뜻말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기도는 하는 것이 아니라 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소원과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게 되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알게 됨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기도하라’고 말하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히 기도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기도해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이 연약한 존재임을 모른다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한 삶을 살아가지 않기 때문이라는 의미에서 ‘기도하라’는 권면을 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기도하라는 것은 우리 개인의 뜻을 이루어주시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되어지기를 구하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기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어떤 일에 대해서도 근심하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러한 말이 하나마나한 말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염려라는 것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환경과 형편에 의한 불안한 마음 상태가 우리를 염려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염려란 ‘염려하지 말아야지’라는 우리의 의지로 억누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않는 길은 오로지 근심되고 걱정되는 상황과 형편들이 해결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라는 말을  합니다. 과연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다 해결해 줄테니까 염려하지 말고 기도만 하라’는 뜻이겠습니까? 분명 본문에는 그러한 의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실 ‘염려’는 우리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형편과 상황들이 우리의 의지나 뜻과는 상관없이 말할 수 없는 근심과 걱정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심리적인 상태에서 스스로 벗어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염려와 걱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다른 일에 몰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해결책일 뿐이지 근본적인 방법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경험을 했겠지만 기도한다고 해서 염려가 사라지고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말한 대로 염려와 걱정은 형편과 어려운 상황으로 인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안은 형편과 상황이 해결됨으로써 주어지는 것이지 기도했다고 해서 평안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감에 염려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도 역시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염려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어떤 상황으로 인해서 되어질 일을 미리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즉 염려는 미래에 대한 인간의 상상이 개입됨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괜찮은데 내일 일이 더 잘못되면 어떻게 할까?’ 이러한 상상을 하면서 염려와 걱정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염려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 6:34)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내일에 있을 염려까지 미리 앞당겨서 하지말고 오늘 일에 대해서만 염려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내일 일은 우리의 생각과 상상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일 일은 우리의 생각에 달린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뜻에 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내일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항상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되어진 일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믿음이지 오늘의 일에서 내일에 되어질 일까지 미리 상상하고 그것 때문에 염려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이 있을 때 그 일로 인해서 되어질 내일의 일까지 미리 상상함으로써 염려와 근심에 빠진 경험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이 상상한 것과는 다르게 일이 해결될 때 ‘괜히 걱정했다’라는 자책감이 드는 경우는 없었습니까?


이처럼 내일의 일이 우리의 상상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날의 염려만 하라’는 의미라기보다는 내일의 일은 내일이 되었을 때 생각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라는 사도 바울의 권고는 무작정 염려하지 말라는 일방적인 권고가 아니라 내일의 일이 하나님에게 속한 이상 신자로서 염려할 이유는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내일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도 말고 어떤 대책을 가지지도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한마디로 내일은 되는 대로 살아가면 되니까 그냥 오늘만 생각하라는 뜻이 아니라 내일에 발생할 상황을 미리 생각해보고 그 상황에 대한 대비를 계획해 보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를 계산하면서 근심과 걱정에 빠지는 것은 그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께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7절에서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는 말씀이 기도가 무엇인가에 대해 가르쳐주는 중요한 의미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염려한다는 것은 그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에게서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떻게 일하시는가에 그 생각과 마음이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 되어질 일을 두고 염려하게 되고 근심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이방인의 세계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라’라는 말로서 위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듣는 자의 입장에서는 별 도움이 안되는 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제 어떤 곤란한 입장에 처한 사람이라면 ‘이 일로 인한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것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려는 시도를 할 수는 있으나 그 마음은 여전히 ‘일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라는 근심과 염려에서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는 것은 우리의 환경과 형편을 개선시켜주시겠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께 가졌던 그 마음과 생각으로 지켜주시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장차 되어질 일에 대해서는 오직 아버지의 뜻에 맡겼습니다. 어떠한 환경과 형편이 주어진다고 해도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도록 지키시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하나님 염려하지 않도록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해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염려를 물리치시고 대신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을 집어 넣어주시는 방식으로 되어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기도는 ‘나는 분명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왜 내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지 않고 계속 염려하게 하시는 것인가?’라는 의심으로 나아가게 될 뿐입니다. 결국 나는 기도했으니까 할 바는 다했다는 책임회피론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는 것이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구할 것을 아뢰라’고 말하지 않고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에게 구하는 자의 마음에는 감사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 되어진 일에 대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린 수시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우리의 형편과 환경을 기준으로 생각함으로써 감사할 이유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현재 처한 형편이 비록 어려움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 아들을 보내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으로 인해서 감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는 것은 단지 기도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과 사랑과 자비하심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찾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베푸신 것에 대한 감사가 있다면 그는 세상에서 되어질 일에 대해서 근심하고 염려한다는 것이 하나님을 벗어난 생각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기도할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형편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는 신자로서 자신의 마음과 생각이 그리스도부터 벗어나지 않기를 위해 기도하지 않겠습니다.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하심을 알고 감사하는 신자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에 의해서 굳게 지켜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구하려고 하지말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감사함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아들까지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를 위해 내어주기까지 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인도하고 계심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세상 그 무엇도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이 하신 일에 머물지 않고 형편과 환경에 머물기 때문에 불안해지게 되고 그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구하기 위한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도에는 결코 평강이 없습니다. 기도는 내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두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