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삶의 원칙


많은 신자들이 어려워하는 것 중에 하나는 성경에 분명히 명시되지 않은 삶의 행동에 대해서 ‘무엇이 옳으며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내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신자가 담배를 피워도 되는 것인가?’라는 문제를 두고 생각해 본다면, 성경에는 분명 담배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담배라는 말 자체가 언급되지 않기 때문에 담배를 피워도 된다라든가 피우면 안된다는 것을 성경을 기준으로 답을 내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피우면 안된다’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당시 이스라엘에는 담배가 없었기 때문에 담배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 것이지 만약 담배가 있었다면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하면서 신자가 담배를 피우면 안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분명 성경에서는 담배를 피우면 안된다는 규정을 내린 적이 없기 때문에 ‘담배를 피우면 안된다’는 말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즉 담배를 피운다고 해서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율법의 조항을 두고 본다면 담배를 피우는 것이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굳이 담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경우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 술 문제일 것입니다. ‘성경에는 술 취하지 말라고 했지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다. 때문에 술은 취하지 않도록만 마시면 된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또 다른 문제를 거론해 본다면 ‘신자가 노름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나는 것인가?’ ‘신자가 노래방을 가도 되는가?’ ‘주일에 짜장면을 사먹어도 되는가?’라는 등의 많은 문제들을 두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과 혼란을 가지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이것이 옳은 것이다’라는 답을 내리기를 곤란해하는 것도 많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상황에 따라서 적절하게 행동하면 된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분명한 기준을 가진 삶이 아니라 단지 주어진 상황에서 그때그때 자신에게 유리하게 적용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역시 옳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실 현대 교회의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상당히 민감한 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에서도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규정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이것은 하면 안된다’라는 금지사항을 많이 가르치고 있는 것이 현대 교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에 얼마나 순종하고 잘 지키는가가 그 사람이 얼마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말씀에 복종하고 살아가는가를 보여주는 기준과 상징으로 이해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분명 신자된 자로서 심각하게 생각하고 고려해봐야 할 문제들이라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없이 자기 하고싶은 대로 행동하며 사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것이지만 어떤 규정에 매어서 하지 말라는 것을 안하는 것을 신앙의 기준과 척도로 이해하는 것도 분명 문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 말라는 규정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은 하지 말라는 규정을 어기는  신자들을 목격했을 때 그들의 신앙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중심에서 벗어난 것인데도 불구하고 정작 하지 말라는 규정대로 잘 실천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중심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이 술을 마셔도 되는가? 담배를 피워도 되는가? 노름은 해도 되는가? 주일에 짜장면을 사먹어도 되는가? 라는 문제들이었습니까?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사람으로써,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로써 이 문제에 대해 주의깊게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 자체를 두고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벗어난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여부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도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술을 마시지 않고 담배를 피우지 않기 때문에 옳은 사람이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중심으로 산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의 말씀은 ‘술을 마시면 안된다’ ‘담배를 피우면 안된다’ 등의 어떤 규정을 가지고 이해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면 안된다’는 규정을 가지고 말씀을 대하게 되면 결국 그러한 규정을 옹호하는 말씀이 아닐 때 그 말씀조차도 거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8절을 보면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이 말은 신자의 행동이 무엇으로 다스려지고 조절되어지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즉 ‘신자가 담배를 피워도 되는가?’에 대한 답은 ‘피워도 된다’ ‘피우면 안된다’라는 규정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참되고, 경건하고, 옳고, 정결하고, 사랑과 칭찬과 덕으로서 규제되고 다스려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성경은 담배를 피우는 것을 경건하지 못한 행동이나 정결하지 못한 행동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적 문화가 신자가 담배 피우는 것을 경건하지 못하고 정결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러한 문화에 의해서 정결한 것 경건한 것을 따라가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담배를 피우고 안피우는 행동은 성경이 말하는 경건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을 정결한 것으로 말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술먹고 담배를 피워도 나의 정결함과 경건함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라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그 사람이 술먹고 담배를 피우는 행동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웃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 것에서 그의 경건함과 정결함의 문제가 도출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성경은 그가 술먹고 담배 피우는 행동을 문제삼는 것은 아니지만 이웃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 그 마음 상태는 분명 문제를 삼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 신자가 이웃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유익보다는 이웃의 유익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곧 정결함이며 경건입니다. 이것이 참된 것이고 사랑입니다. 이것으로 신자가 칭찬을 받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의 유익보다는 이웃의 유익을 생각하는 신자가 과연 대한민국이라는 문화에서 많은 사람들이 옳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것을 성경이 말하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고집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야고보서 1:26-27절을 보면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경건은 모두 이웃과의 관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혀를 재갈 먹이는 것, 마음을 속이지 말라는 것,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 이 모두가 이웃과 연결되어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은 개인의 종교적인 의식이나 행동에 의해서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에서 증거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세워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도 자신의 경건과 정결함 신앙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바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웃을 생각하지 않는 신자가 어찌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웃을 위한 섬김과 희생을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런 사고방식에서 보여지는 것은 극히 이기적인 자기 생각과 고집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술을 먹으면 안된다’라는 규정을 가지고 있는 신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술을 안마시는 것이 정결한 것이고 경건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신자들을 판단하고 심판해 버리는 것 역시 이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술을 마실 때 ‘그가 왜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가?’ ‘그에게 무슨 고민과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닌가?’ 적어도 이웃에 대한 이러한 배려가 있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술을 마시기 때문에 믿음이 없다라든가, 담배를 피우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모른다는 것은 우리의 문화에서 내려지는 판단일 뿐,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말을 모든 것을 허용하는 의미의 말로 받아들이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모든 것을 해도 된다는 의미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문제에서도 그 중심과 본질은 그리스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화요일에 ‘한국교회 주일 개념 문제없는가?’라는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 토론회는 모 목사님이 주일에 대한 문제로 해당노회에서 제명을 당한 사건으로 인해서 열린 것이었습니다. 제명을 당한 그 목사님의 주일에 대한 개념은 어느 한 날이 거룩한 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날이 그리스도의 날이고 때문에 모든 날이 거룩한 주일이라는 신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어느 한 날만을 거룩한 날로 정해서 그 날을 지키고 성수주일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주장을 했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서 그 목사님이 소속한 노회에서 제명을 당한 것입니다.



현대교회가 가지고 있는 주일관의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저 역시 여러분에게 많이 지적했던 부분입니다. 주일을 지켜서 복받는다는 생각을 버릴 것을 한두 번 얘기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만약 주일에 대한 이런 저의 신학을 버릴 것을 제가 소속한 노회가 요구한다면 저 역시 그것을 단호하게 거부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지금의 제 생각이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옳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안식일 문제로 바리새인들에게 많은 시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들의 안식일 개념이 잘못된 것임을 선포하셨습니다. 하지만 과연 예수님께서는 단지 안식일 규례에 대한 싸움을 하신 것일까요? 다시 말해서 어떤 안식일이 맞는가에 대한 싸움을 하신 것입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안식일에 대한 개념과 싸우신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적 안식일 개념이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거부하게 하는 걸림돌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안식일을 잘 지킴으로써 자신들은 의에 대해서는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결국 그것으로 우리의 의가 되시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를 거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의 안식일과 싸우신 것입니다. 결론은 바른 안식일을 세우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세우시기 위해서 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것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신자는 오직 그리스도를 세우기 위한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어떤 주일이 옳으냐?’에 대한 싸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그 토론회에서 제가 느낀 것은 단지 현재 한국교회의 주일관에 대해 심판하는 분위기였고, 마치 주일성수를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잘못된 사람들이라고 성토하는 분위기처럼 여겨졌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일에 대한 하나의 신학을 옳고 정당한 것으로 세우기 위한 토론회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을 두고 싸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일에 짜장면 사먹으면 안된다고 말하는 신자에게 ‘당신의 그런 생각은 율법적 주일이고 잘못된 것이며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생각이다’라는 판단을 앞세워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주일 성수를 주장하는 신자 앞에서 과연 무엇이 정결하며, 무엇이 경건한 것이며, 무엇이 참되고, 사랑할만하며 칭찬할만하고 덕이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주일 성수를 주장하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그가 보는 앞에서 자장면을 사먹는 것이 옳습니까? ‘나는 주일에도 얼마든지 짜장면을 사먹어도 내 양심에는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마음대로 사먹어도 되는 것입니까?



다시 말하지만 주일에 음식을 사먹고 안사먹는 것에서 옳고 그름을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음식을 사먹어도 된다라든가 사먹으면 안된다는 문제로 싸우는 것은 사실 쓸데없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은 기독교 신앙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웃을 생각해 주는 것입니다. 이웃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참된 것이고 경건한 것이고 정결하며 사랑할만하고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의 행동은 어떤 규정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조절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관계에서 다스려지고 조절되어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6:14절에 보면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6:12절에서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말하고 역시 10:23절에서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들은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사람인즉 은혜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며, 은혜를 받은 신자는 항상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며 살아가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 신자의 삶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에 대해서 ‘왜 이렇게 하지 않는가?’라는 말을 하는 것을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결국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왜 성경보지 않는가?’라는 판단보다는 ‘그가 성경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힘들게 살고 바쁘게 사는 것은 아닌가?’ 이웃의 삶과 그 형편을 돌아보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오히려 참된 것이며 경건이며 사랑이며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성경을 보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나는 성경을 보는데 저 사람은 성경보지 않는다는 것으로 누군가를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경을 많이 보는 내가 성경을 전혀 보지 않는 사람까지도 용납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는 것이 옳으니까 성경을 봐라, 기도를 해라’ 이러한 것은 성경보는 것을 세우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을 세우는 것일 뿐 그리스도를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은 신자로서 그리스도를 세우기 위해서 있는 사람들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세우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8:13절의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는 바울의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이웃이었지 제사나 우상에 대한 자기 신학이 아니었습니다. 우상 제물을 먹을 수도 있는 것이 바울의 신학이고 믿음이었지만 바울은 ‘우상 제물은 먹어도 된다’가 믿음의 본질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고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이웃을 위해서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것이고 졍결한 것이고 경건하며 사랑할만하고 덕을 세우는 삶의 원칙입니다. 우리 모두 이 원칙을 따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