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9  행하라


세상은 인격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을 아름다운 생각으로, 또는 아름다운 시나 음악으로 가득 채우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마음을 아름다운 생각이나 문학, 예술로 가득 채우면 자연히 그 인격 또한 아름다워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이러한 말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책에서 그러한 내용의 글들을 많이 대하기도 할 것입니다. 좋은 책을 많이 읽고 좋은 내용들의 글을 마음에 채우게 되면 그 사람의 인격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매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된 우리가 힘써야 하는 것은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경 역시 그러한 가르침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인간의 감상적 사고에 불과할 뿐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 사건은 실제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의 감상적인 사고에 머물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을 생각할 것을 요구하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로 살아갈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 사건은  단지 묵상의 도구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에 참예해야 할 실제적인 삶을 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에게 십자가는 부지런히 생각하고 묵상해야 할 과거의 사건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좇는 현재의 사건이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십자가로 내 마음을 채운다는 것은 복음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복음을 생각할 필요가 없고 예수님도 생각할 필요가 없고 예수님을 마음에 두는 것도 헛된 일임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것은 신앙이 단지 감상으로 멈춰 버리게 되는 것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만으로 예수님을 좇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있기에 이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생각만 하고 마음에만 두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은 자기 백성을 위한 희생이라는 행함으로 실천되었습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생각하고 마음에 두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에만 머무신다면 그것이 과연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우리 자신에게는 무슨 유익이 있으면 이웃에게는 어떠한 유익으로 드러날까요?



히브리서 3:1절에 보면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는 것은 단지 예수님을 머리에 깊이 새기라는 의미가 아니라 신자의 생각과 삶 전체가 예수님의 의해서 다스려져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8절에서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에서 볼 수 있는 ‘생각하라’는 말 역시 참되고 경건하고 옳고 정결하고 사랑과 칭찬과 덕을 생각하고 마음에 두고 살아가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지극히 복음적인 것을 생각하고 마음에 두는 것만으로도 복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안됩니다. 8절에서 사도 바울이 ‘생각하라’고 말하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신자의 생각과 삶 전체가 복음에 의해서 다스려져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뒷받침해주는 말이 바로 9절의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는 말씀입니다.



8절에서 ‘생각하라’는 말을 하는 사도 바울이 이어서 ‘행하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결국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감상이나 사고가 아니라 다스림을 의미하는 것이고 다스림 아래 있기 때문에 ‘행하라’는 말을 할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에게나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것 이것을 행하라’는 권면을 받았다고 해서 누구나 행하게 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행하라’는 말에 대해서 ‘그래 그렇게 살아야지’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도 예수님이 그의 생각을 다스리기 때문이고, 그러한 마음에서 행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하라’는 말을 단순히 행함을 요구하는 의미로 이해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생각과 삶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종 아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가 신앙으로 사는 것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의 전부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에는 예수님의 다스림이 필요 없는 부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생각되어져야 하고 그 생각에 의해서 행동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의 신자들에게 가르친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빌립보의 신자들이 사도 바울을 통해서 배우고 듣고 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분명 그들은 바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듣고 보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것을 행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가르친 것은 ‘성경을 몇 번 읽으라’거나 ‘십일조를 철저히 하라’는 것이나 ‘기도를 많이 하라’식의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바울에게서 본 것 역시 교회에 충성하고 교회 일에 부지런한 바울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좇아가는 바울을 보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행할 것을 배웠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는 말은 삶의 일부를 고치고 수정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새로운 삶의 길을 갈 것을 의미하는 말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삶의 중심이 그리스도로 변한 새로운 사람들이며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러한 신자들에게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는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신자가 아니거나 신자의 수준에서 모자라는 사람들에게 생각하고 행하라고 함으로써 신앙의 수준을 높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된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며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이 되어 있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과 다른 삶을 나타내도록 하기 위해서 ‘행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신자가 아닌 사람들과 같은방식으로 생각하고 행하지 않습니다. 신자에게는 다른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 기준과 중심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자가 생각해야 할 것, 마음에 두고 살아가야 할 것, 그리고 생각과 마음에 의해서 행해져야 할 것,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배우는 것입니다.



‘행하라’는 바울의 말은 결코 율법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행하라고 하면서도 무엇을 행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나열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할 것을 말할 뿐입니다. 그런데 빌립보의 신자들이 바울에게 배우고 들은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신자로서 행해야 할 규칙과 어떤 규정들의 목록을 하나하나 가르치고 제시한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비록 행하라는 말은 하지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행할 것과 하지 않아야 할 것을 구분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율법일 것입니다. 율법의 본질은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행하라는 말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무슨 일에서든 ‘이것을 해야 하는가 하지 않아야 하는가?’로 구분하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이 일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가 보여지는 것인가?’를 마음에 두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는가를 생각한다면 그 행할 바는 자연히 알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신자들에게 성경은 하지 않으면 안되는 강압적인 규례로 적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구원을 못받는다거나, 복을 받지 못한다는 등의 위협을 하는 성경이 아닌 것입니다.



구원의 본질이 은혜라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은혜 아래 있으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성취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등의 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헛된 것으로 돌리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단 구원해 놓고 그 후에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은 행동을 하므로 구원을 취소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라면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 성립될 수 있지만 분명 구원은 전적으로 우리의 행위나 죄를 보지 않은 사랑과 자비이기 때문에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신약성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도 바울이 ‘행하라’는 말을 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율법적인 규례나 조항이 아니고, 어떤 규칙을 지키고 행해야 한다는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라면 과연 어떤 의미로 하는 말일까요?



이것은 ‘행하라’는 말 뒤에 이어서 하고 있는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는 말을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도가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 말하는 것은 ‘행하면 하나님이 평강을 주신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도는 ‘하나님이 평강을 주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계시리라’고 말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 역시 ‘바울이 말한 대로 행하면 떠나 있던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계셔주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항상 함께 하는 분이시지 평소에서 멀리 있다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행하면 함께 계셔주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6-7절에 보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는 말씀을 합니다.



사람이 염려하지 않으려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생각없이 사는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죽은 자만이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자가 어떤 문제를 두고 염려하지 않으려면 생각 자체가 달라져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문제로 인해서 자신에게 손해가 있게 되고 고통이 있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생각으로 가득 찬다면 염려가 그를 붙들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서 감사함으로 아뢴다면, 즉 하나님이 주신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안다면, 그리고 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찬다면 어떤 문제에서도 염려가 아닌 평강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심리적으로 안정된 상태가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어떤 일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평강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평강을 주시더라’가 아니라 신자의 기도 자체가 하나님의 평강이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기도가 되어진다는 뜻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평강이 신자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하게 하심으로써 역사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고 말한 후에 8절의 ‘생각하라’는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그 생각이란 하나님의 평강이 그 생각과 마음을 지켜주심으로써 보여지는 생각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모든 일에서 참된 것, 정결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을 생각하도록 역사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생각하는 것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행하라’는 말을 함으로써 그것이 곧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는 신자의 모습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그 신자는 모든 것을 생각하고 마음에 두는 것으로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복음은 생각하고 묵상하는 용도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실제 증거 되어져야 할 것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서 듣고 받고 배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생각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 모든 것을 실천하고 행하라고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바울에게서 배우고 듣고 받고 본 거기에 하나님의 평강이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행함으로 평강의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복음을 안다 하는 많은 신자들이 정작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진리에 대한 지식을 배우고 이론적으로 아는 것에 멈춰 버리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성경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아는 것과는 반대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은 즐겨하면서도 배우고 듣고 받은 대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흥미를 두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평강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 것인가를 알기는 하지만 실제 삶에서 얻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이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는 신자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고 있고 생각하고 마음에 두고 있고 믿고 있다고 해서 그가 복음으로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신자안에서 그를 다스리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복음에 복종하는 것은 복음을 생각하고 복음을 마음에 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진심으로 복음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복종하는 삶을 산다면 그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복음을 중심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행함을 거부한다고 해서 행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믿음이 거부하는 행함은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지 아예 행하려고 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의 생각과 마음에 복음이 머물러 있고 다스려지고 있다면 복음은 그로 하여금 복음이 원하는 대로 행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진심으로 복음을 알고 복음에 순종하고자 한다면 복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모든 일에서 복음이 말씀하고 가르치는 대로 행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신다면 진심으로 은혜를 실천하도록 하십시오. 누구에게서든지 은혜가 보여지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은혜를 받고 은혜를 알았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복음을 생각한다고 해서 복음을 아는 자가 아닙니다. 복음이 말하는 대로 행하는 자가 진심으로 복음을 아는 자입니다. 복음 때문에 자신을 포기하는 경험이 있는 자가 복음을 아는 자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은 이러한 신자에게 함께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