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20  성도의 관계


여러분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필요한 종교 단체 정도로 이해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는 교회를 출석해야 하니까 출입하는 수준의 교회는 아닙니까? 교회에서 만나는 신자들 역시 나처럼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같은 교회를 출입하는 사람 정도로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까?



그들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그들을 위해서도 하나님을 위해서도 아닌 다만 내 믿음을 위해서, 같은 신자를 사랑하는 것이 믿음이니까 자신이 믿음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사랑해줘야 할 사람 정도로 여기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 이러한 생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신자라면 그에게 있어서 교회는 다만 자신이 선택한 기독교라는 종교를 유지하기 위한 것일 뿐 다른 의미는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보여지는 것이 곧 교회 무시입니다. 교회를 단지 사람들의 모임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사람들에 대한 자기 감정이나 기분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입니다. 내 감정에 따라서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마든지 미워할 수 있고 욕할 수 있고 비판할 수도 있다는 태도를 서슴치 않고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야말로 교회의 본질인 그리스도를 배제한 채 다만 사람들이 모인 것으로만 인식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지금 말하는 ‘교회’의 의미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지 사람들이 세운 조직과 단체로서의 교회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교회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종교 단체를 사랑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한다는 의미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점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오늘 제가 드리는 말씀을 마치 ‘교회’라는 종교 단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교회는 건물도 아니고 목사와 장로 그리고 제직들로 구성된 조직 단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가 구세주임을 믿고 그분이 흘리신 피의 공로로 구원받음을 고백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들이 곧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대하는 신자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형제라 불려지는 관계 안에 있게 된 것이고 한 몸이고 서로 지체라는 관계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것들이 정작 우리 자신들에게는 다만 기독교 교리, 또는 하나의 신학 이론으로만 여겨지는 것이 오늘날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형제 관계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이 다만 인간적 관계로만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본문의 내용은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본문은 빌립보 교회와 사도 바울의 관계가 어떠했던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처음 빌립보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전혀 없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빌립보에 복음을 가지고 온 첫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곳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이 있게 된 것입니다. 빌립보의 신자들은 하나님이 사도 바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심을 알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다른 도시로 떠난 후에도 바울에 대한 생각이 변하지 않고 안부를 묻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16절에서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라는 말을 보면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어려움에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쓸 것을 보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로마의 옥에 갇혔을 때 그 소식을 들은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돕기 위해서 에바브로디도 편에 선물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사랑에 기뻐하며 본문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써서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의 바울에 대한 사랑에 감사의 말을 하는 본문의 내용을 보면 단순히 ‘나의 쓸 것을 보내준 당신들의 사랑에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끝내 버리는 것이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바울은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17절에서는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라는 말을 합니다.



바울이 이러한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빌립보 교회로부터 비록 도움을 받았지만 ‘나는 그렇게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자존심을 세우는 것입니까? 아니면 ‘나는 너희들의 선물에 목메어 사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뜻의 말일까요? 물론 빌립보 교회의 사랑을 마음 깊이 감사하는 바울로서는 그러한 생각은 추호도 갖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그러한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선물에 감사하는 자신의 말이 혹 그들의 선물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비춰질 수 있을 것을 염려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과연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10절)는 말을 한 뒤에 이어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앞에서 한 말에 의해서 빌립보 교회가 혹 다른 오해를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오해란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생각한 것에 대해 크게 기뻐한다는 표현이 마치 바울이 빌립보 교회가 보내준 선물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바울이 그리스도보다는 사람들의 도움을 의지하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을 것이고, 빌립보 교회가 도와줄 것을 무척 기다렸던 것처럼 여겨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왜 이런 오해를 염려하겠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여질 것을 염려한 것 때문일까요? 바울은 자신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여질까를 염려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빌립보 교회의 마음을 생각한 것 때문입니다.



10절의 말을 보면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돕기는 했지만 자주 풍족하게 도운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라는 말이나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는 말이 그러한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만약 바울이 빌립보 교회가 보내준 선물을 의지하고 기다린 것이라면  자신이 힘들고 어려울 때 빌립보 교회가  자주 풍족하게 도와주지 않은 것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빌립보 교회가 조금이라도 의식을 하게 된다면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자주 선물을 보내지 못한 것 때문에 바울이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오해를 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걱정에 빠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얘기는 빌립보 교회와 사도 바울의 관계에서만 보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에서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 오해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때로 남을 도와주면서도 ‘그가 혹시 적게 도와준 것 때문에 섭섭해하지는 않을까?’라는 걱정을 할 수 있습니다. 결혼식 축의금을 할 때도 ‘얼마를 해야 할까?’ 고민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모두가 ‘그가 어떻게 생각할까?’에 골몰하기 때문에 그러한 걱정과 염려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하는 말이 ‘주고도 욕먹는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누군가를 도와줄 때, 그가 돈을 보지 않고 그 마음을 보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한다면 그러한 걱정은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얼마를 돕든 액수가 적다고, 그리고 자주 도와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확신이 있다면 돕는 사람은 돕는 것으로 기뻐할 것이고 도움을 받은 사람은 자신에 대한 그 마음으로 기뻐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교회에서 보여져야 할 모습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가 보낸 선물에 크게 기뻐한다는 말을 하면서도 굳이 자신이 궁핍하기 때문에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자신은 어떠한 형편에서도 스스로 자족하는 것을 배웠다고 말하는 것은 비록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 있다 할지라도 자신은 그리스도로 기뻐하는 삶을 살았음을 말함으로써 결코 빌립보 교회의 도움이나 선물을 기다리거나 의지한 것이 아니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사도 바울은 결코 물질로 인해서 빌립보 교회에 섭섭한 마음을 가지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상대적으로 빌립보 교회가 사도 바울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오해를 불식시키는 것입니다.



교회란 분명 도움을 주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이 말하는 서로 돕고 사는 사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말하는 서로 돕는 것은 없는 자에 대해 있는 자가 베푸는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서로 돕는 관계에 있다는 것은 없는 자에 대해서 베풀라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약자임이 돕고 도움을 받는 관계로 드러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없는 자에게 베푸는 것에는 돈이 개입되어야 하고 돈이 중요한 것이지만 교회가 서로 돕고 도움을 받는 것에는 비록 돈이 개입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표현일 뿐이지 결코 중심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을 사랑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친분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사랑이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 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해준 사도 바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복음을 전했다고 해도 만약 그들이 복음을 알지 못하고 그리스도로 인한 복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다면 그들에게 바울은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게 된 그들에게 사도 바울은 참으로 귀한 것을 전달해준 복된 사도였던 것입니다. 이런 마음에서 사도 바울을 사랑하고 그가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를 돕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신자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적 친분 관계가 아닙니다. 신자가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되어지는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로 살게 된다면 함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신자가 아무런 관계도 없는 남으로 여겨질 수는 없습니다.



같은 길을 가고 같은 인생 길을 걸어가는 한 형제로 여겨지는 것이 당연하고 그러한 관계에서 누군가가 어려움에 있을 때 그를 돌아보고 그의 쓸 것을 도와주는 행동이 나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것은 ‘혹 이 사람이 돈이 적다고 해서 섭섭해하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을 삼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있다면 그 관계에는 이미 돈이 개입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서로 돕는 것은 당연합니다. 있는 자가 없는 자와 필요한 것을 나누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마땅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을 나누는 것이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서로 교통하는 것이지 결코 돈을 나누는 관계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겉으로는 돈이 나누어지는 것이지만 사실은 그 마음을 나누는 것이고 마음으로 서로 교통하는 것입니다.



도움을 받는 자 역시 돈을 봐서는 안됩니다. 도움을 받았다는 것으로 기뻐할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형제의 그 마음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형제에게서 나누어지는 것이 돈이 아니라 그의 사랑임을 알고 그것으로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가 이러한 마음이 없이 서로 돕고 돕는다면 그것은 결국 돈이 개입되고 돈이 왕래하는 관계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때로는 돈으로 인해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오해하는 결과까지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되어진 형제의 관계가 인간적 생각에서 비롯된 오해로 인해서 허물어지고 깨어져 버리는 안타까운 결과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그가 11-12절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떤 형편에서도 만족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비천함 가운데서도 풍부함 가운데서도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며 살았던 사도였습니다. 때문에 어려움에 있을 때 비록 돈이 필요했을지 언정 돈을 의지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스스로 만족하며 살았기 때문에 그를 도와줄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바울이 돈을 의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돈을 보지 않고 형제의 사랑의 마음으로만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마음을 안다면 바울을 도우면서도 ‘바울이 혹 보내준 것이 적다거나 자주 보내지 않은 것 때문에 섭섭해하지는 않을까?’라는 쓸데없는 염려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향한 빌립보 교회의 마음은 그가 어려울 때 그의 쓸 것을 기꺼이 도와주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바울을 생각하기만 하고 그의 쓸 것을 돕는 일에는 인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바울에게 보낸 그들의 선물은 그들의 마음에 의해서 난 싹이요 열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싹이 났다는 것의 의미가 그들이 보낸 선물을 두고 한 것이라면 그 의미를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가 어려울 때 그의 쓸 것을 꼭 도와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즉 빚까지 내서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믿는다고 하면서 형제가 어려울 때 그의 쓸 것을 돕기를 망설인다면 결국 내가 의지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껏 말한 믿음과 사랑이라는 말들이 다만 생각에만 있고 입에만 있었던 것이며 정작 내 마음에는 있지 않았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형제를 돕기 위해서 그의 쓸 것을 주는 것이 나아가서는 내 자신의 믿음을 위한 것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들이 보내준 선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으로 기뻐하고 있음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할 때 보여질 수 있는 모습입니다. 만약 바울이 조금이라도 자족하기를 배우지 못했다면 어려운 상황에서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해결할 수 있는 물질이나 선물을 기대했을 것이고, 나아가서 자신은 그토록 어려운데 전혀 도와주지 않은 교회에 대해서 섭섭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에서라면 아무리 도움을 받은들 감사함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보내준 것이 적을 때 그것으로 실망할 뿐입니다.



신자는 서로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마음으로 교통하고 교제하는 관계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돈을 의지하는 관계로 만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돈 때문에 서로의 마음이 상할 수 없습니다. 아무쪼록 마음이 교통하는 교회로 굳게 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