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12  지족


바울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빌립보 교회는 에바브로디도 편에 선물을 보냅니다. 바울은 그러한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면서 보내준 선물에 대해 감사의 말을 잊지 않습니다. 그것이 지난주에 말씀드린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단순히 ‘감사하다’는 말로 끝맺지를 않고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과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그리고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며 궁핍에도 풍부에도 처할 줄 아는 비결을 배웠다는 말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말에서 빌립보 교회에 대한 바울의 마음을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혹 빌립보 교회가 선물에 대해 감사하는 자신의 말을 오해함으로써 사도 바울이 마치 선물을 기다렸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그동안 바울에게 자주 선물을 보내지 못한 것으로 인해서 미안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에,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선물로 인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으로 인해서 감사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인 것으로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신자의 관계에서 교통되어져야 할 것은 물질이 아니라 주안에서의 같은 마음이어야 할 것입니다. 상대방의 손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서로의 마음이 교통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물질을 주고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물질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오늘은 11-12절에서 말하고 있는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는 바울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어떤 형편에서든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단지 가난한 형편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만족하며 살았다는 것으로만 이해한다면 이러한 심적 상태를 특별히 기독교 신앙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곤란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타종교에서도 물질에 초연한 채 모든 형편에서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없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도 세상 것에 마음두지 않고 도를 닦는 승려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성철이란 승려도 그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또 일명 ‘걸레스님’이라고 불려지는 ‘중광’이란 승려도 세상 것을 초연한 채 살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산골에 사는 할머니도 우리가 볼 때는 얼마든지 궁핍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삶을 족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단지 궁핍한 형편에서도 만족했다는 것만으로 특별히 기독교적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자족은 그러한 차원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종교 계통의 사람들이 궁핍한 삶에서 만족하며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사람들은 그러한 모습을 칭송을 하기도 하지만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그들은 풍부한 것을 거의 적대시한다는 것입니다.



즉 풍부하게 사는 것을 죄악시하는 것이 금욕적인 삶을 살아가는 자들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궁핍한 삶 자체를 의로 여기는 수준이기에 궁핍함은 즐기며 궁핍함에도 만족할 수가 있지만 풍부함은 거의 본능적으로 피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궁핍한 삶에 만족하는 그들에게 풍부함이 주어질 때도 삶의 기준이 흔들리지 않을 수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본다면 한가지 답을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궁핍함에서는 자신을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을 지킬 수 있을지 몰라도 풍부함에서는 자신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과 다른 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자족은 타종교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환경에 대한 무관심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환경에 대한 무관심이나, 좋은 환경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단지 금욕주의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단지 궁핍함에서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다고 말합니다.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이해할 때 단지 ‘궁핍할 때 만족하는 삶을 삽시다’라는 결론으로 끝난다면 이것은 앞서 말한 종교계의 수준과 다를 바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궁핍한 환경에서도 만족하며 살아가라는 교훈을 하기 위해서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궁핍한 형편에서 자족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지만 풍부함에도 처할 줄 아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하고 있는 것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풍부에 거하는 것을 배척하고 궁핍에 거하는 것만이 의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신자란 어떤 형편에서든 그 형편에 매이지 않고 사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지 풍부함을 거부하고 궁핍함을 즐기는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이 신자가 아닌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자족’의 의미는 어떤 형편이든, 그것이 궁핍함이든 풍부함이든 그 형편에 매이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형편도 바울에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금욕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궁핍에는 거할 수 있어도 풍부함에는 거할 수 없다면 결국 그것은 환경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본문에서의 자족은 모든 것이 부족한 궁핍의 형편에서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풍부한 형편에서도 해당되는 말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삶의 근거와 이유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보 교회에서 보내준 선물에 감사하면서도 혹 그것이 주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을 주거나 빌립보 교인들을 의지하고 있다는 인생을 줄 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삶의 근거와 이유를 그리스도에게 두고 있는 것이 사도 바울의 자족의 비결이었습니다. 바울이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말을 하고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말을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리스도를 알았다는 것이지 무슨 이론적인 비결을 누군가로부터 전수 받았다는 뜻은 아닌 것입니다.



바울은 사실상 그리스도가 계심으로써 모든 것을 가진 자였습니다. 세상 것으로 가졌다 못가졌다라는 평가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그와 함께 하신 것으로 이미 그는 모든 것을 소유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궁핍한 가운데서도 ‘못가졌다’는 낙심이 없었으며 풍부하다 할지라도 ‘가졌다’라는 교만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사도 바울의 일체의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자족하라’는 것은 무조건 있는 것으로 만족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족을 현재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는 것으로 이해를 해버리면 자칫 잘못하면 현재의 형편에서 더 나아지기 위해서 일하는 것을 마치 불신앙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족에 대한 큰 오해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족이란 현재의 것에 만족하고 더 나아지려고 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주어진 형편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 형편에 만족하고 그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의 형편은 오늘의 형편에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즉 오늘의 형편이 내일의 형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의미는 오늘과 내일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늘이 이랬으니까 내일도 이럴 것이다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내일에 희망을 가지라는 의도가 아닙니다. 오늘은 힘들지만 내일은 잘 될 수가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힘을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저는 자족이라는 것이 오늘의 형편에 만족해 버리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족의 근거는 궁핍이든 풍부함이든 환경이나 형편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를 근거할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근거한 자족이라는 것은 어떠한 형편에도 매이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궁핍이든 풍부함이든 형편에 매이지 않는 것,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자족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도 바울이 자족을 말하고 있는 것은 자신은 어떤 형편에도 매이지 않고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지 ‘힘들게 산다고 해도 낙심하지 않고 힘내서 살아가니까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릴 것은 여러분이 열심히 일해서 더 나은 형편이 되어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뜻대로 되어지지 않고 실패가 오게 되고 형편이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못하게 되어진다고 해도 결코 환경에 매이지 마시고 되어진 일로 인해서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말씀입니다.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다윗이 밧세바와 범죄하여 낳은 아이를 여호와가 치시매 심한 병이 든 내용이 나옵니다. 그때 다윗은 아이의 병이 낫기를 위해서 금식하고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윗의 기도를 외면하시고 아이가 죽었을 때 다윗은 당장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음식을 먹습니다.



그것을 본 신하들이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어찜이니이까”(삼하 12:21)라고 묻자 다윗은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삼하 12:22-23)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병이 든 아이가 낫기를 원해서 기도했지만 원하는 대로 되어지지 않았을 때 낙심하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로 받아들인 이것이 곧 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환경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주어진 환경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고 실망하게 한다면 그것은 이미 환경에 지배를 받고 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다스림에서 멀어져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절대로 자족하는 삶일 수가 없습니다.



신자에게 주어진 모든 형편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우리를 적절한 형편과 환경으로 인도해 가실 것이고 신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환경에 자유로운 자로 사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보면 바울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비천함보다는 풍부함에 있을 때 자족하기가 더 쉬울거라는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사실 비천함과 궁핍함에서 만족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쩌면 풍부할 때 만족하는 것이 더 쉽다고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던 대로 단순히 소유한 것으로 만족함을 누리는 것이라면 궁핍함보다는 풍부함이 더 유리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의 자족은 소유의 여부를 떠나서 예수 그리스도로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것, 즉 현재의 형편을 초월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천이든 풍부든 바울의 자족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아니고서는 되어질 수 없는 어려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천함이 바울을 실망으로 나아가도록 하지 못했으며, 풍부함이 바울의 마음을 하나님에게로부터 멀어지게 하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어떤 형편에서든 자유했으며 자족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먹고사는 일에서만 자족을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모든 일에 배불렀다고 말합니다.



즉 먹을 것 입을 것의 문제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일에서 그 일이 어떤 일이든 모든 것에서 배부름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현실의 모든 일이 사도 바울에게는 실망과 불평으로 남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의 삶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 일에 지배받지 않았으며 따라서 모든 일에 있어서 배부르며 자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든 내가 원한대로 나의 기대대로 되어지지 않을 때 실망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우리들이기에 오늘 사도 바울의 자족은 우리의 삶에 큰 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분명 삶은 우리의 생각과 의도대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은 삶에 의해서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배부름보다는 실망과 불평만 남게 되고 결국 삶의 기쁨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리스도를 의존하여 살아가기보다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과 상황들에 의존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영향을 받고 다스려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영향을 받으며 세상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다스리고 누리는 차원에 아니라 아예 의존하여 살아가는 것으로 전락되어버리기 때문에 이제는 세상 것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까지 되어버린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의 대부분은 컴퓨터 게임이 없이는 사는 재미가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컴퓨터든 게임이든 사람의 취미를 위해서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개발된 것이지만 결국 그것들을 의존하는 상태로 전락돼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컴퓨터 게임이 없다면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까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신앙적인 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가 의지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눈에 보이는 형태로서의 예배나 기도 등 자신의 신앙적 행동도 의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은 자신이 예배를 드리지 않거나 기도하지 않고 있으면 마치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져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부지런히 해야 신앙에 안심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곧 그리스도보다는 의식을 의존하는 것이고 자신의 행동을 의존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만약 병이 들어 누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배부름을 누리는 것은 매우 힘들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자족은 어느 한순간에 되어진 것이 아니라 배운 것입니다. 즉 바울이 우리보다 더 나은 사람이기에 자족을 누린 것이 아니라 배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그리스도에게서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운 것을 우리도 배울 수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처럼 우리 역시도 그리스도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어주는 것으로 여러분의 할 일을 다한 것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스승으로 존재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날마다 배워가는 것이 여러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살아가시면서 배우십시오..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끌어 가시는 날마다의 삶에서 하나님을 배우시고 그리스도를 배우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할 일입니다. 되어지는 모든 일에 실망하지 마시고 원망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배우는 것이 있을 것이고, 모든 일에 배부를 수 있는 자족을 배워가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세 번이나 하나님에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바울의 육체의 가시를 그냥 두셨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일을 통해서 자신을 다루시는 하나님을 배워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삶에서 하나님을 배워가는 일에 매우 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할 줄 아는 것은 실망이고 원망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비천에 처하게도 하시고 풍부에 처하게도 하시고 때로는 넘어지게도 하시고 실패하게도 하시면서 삶의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시며 무엇을 위해서 일하시며 신자의 삶에 중요한 것,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워가게 하십니다. 이것을 배워갈 때 여러분은 자연히 사도 바울의 자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여러분 역시 모든 일에 배부름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일이 여러분의 뜻대로 되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변함없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갑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날마다 그리스도를 배워 가시며 비천이든 풍부든 모든 일에 자족하고 배부른 은혜의 삶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