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3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어느 한구절만 따로 떼어놓고 해석을 하게 되면 크게 잘못 이해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오늘 본문은 아마 그에 대한 대표적인 예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본문의 말씀은 많은 교회에서 ‘믿음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는 말로써 강조되고 있는 성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 안에서는 못할 것이 없다. 때문에 하고자 하는 믿음만 있으면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성경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나 그 배경 상황 등등의 모든 것을 무시해 버린 채 단 한구절의 문단의 문자만으로 해석을 해버리는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사람 저 사람의 유명한 말, 즉 명언을 모아놓은 명언집이 아닙니다. 만약 성경이 명언집이라면 한 구절 한 구절 각기 해석을 하는 것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사람 저 사람의 유명한 말을 모아 놓은 명언집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성경은 한 사람이 전체를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또 쓰여진 시대나 상황들이 각기 다른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가기 다른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한다고 말씀한 것처럼 성경은 기록된 그 시대나 상황, 그리고 기록한 사람들이 다르다 할지라도 오직 목적은 하나였습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 그 목적인 것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자기들 생각대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과 그 마음을 깨닫게 되었고, 모두가 한 성령 아래서 동일한 마음으로 기록한 것이 성경이기 때문에 결국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 한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을 대할 때, 한구절만 두고서 ‘이것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할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쓴 빌립보서 전체 안에서 본문 한구절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본문의 말을 하게 된 그 배경과 그때의 상황까지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어떤 상황에서 무슨 뜻으로 이러한 말을 하는지 그 이유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써서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낸 것이 빌립보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쓸 때 사도 바울의 상황은 로마의 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바울이 옥에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들은 빌립보 교회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빌립보에 복음이 전파된 것이 사도 바울로 인해서였고 또 그들은 바울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에바브로디도 편에 사도 바울이 옥에서 쓸 수 있는 선물을 보내었습니다. 이러한 빌립보 교회의 선물에 감사하는 편지를 쓰게 된 것이고, 선물에 대한 감사의 말이 언급된 것이 4:10-20절까지의 구절인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보내준 선물에 대한 감사의 편지치고는 너무 길다는 생각이 들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단지 선물에 대해서 고맙다는 말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선물을 가져온 에바브로디도 편에 빌립보 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 일을 전해 들은 바울은 그에 대한 많은 권면을 하고 편지를 마칠 때쯤 해서 감사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보내준 선물 자체에 마음을 둔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선물이 마음에 들어서 감사의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힘든 것이 선물을 주고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물을 하면서도 오랫동안 고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뭘 선물해야 상대방이 기뻐할지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선물을 하면서도 고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선물을 한 후에도 선물을 받은 사람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선물의 내용에 관심을 기울 일 뿐 선물을 하는 그 마음은 무시해 버리기 때문에 발생하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선물의 내용을 본 것이 아니라 선물을 보낸 빌립보 교회의 그 마음을 생각했습니다. 자신에 대한 사랑에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선물 자체를 하찮게 여겼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선물의 내용보다는 선물에서 옥에 갇힌 자신을 향한 사랑을 본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단순히 ‘선물을 보내줘서 고맙다’는 말로 끝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선물에 대해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도 혹 자신의 감사의 말이 마치 자신이 선물을 보내줄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오해될 수 있음을 생각한 것 같습니다. 만약 빌립보 교회가 이러한 오해를 하게 되면 선물을 자주 보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고, 또 사도가 그리스도보다 교회가 보내는 선물을 의지한다는 오해를 하게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물에 감사한다는 말을 하면서도 지난 주일에 말씀 드린 것처럼 자신은 모든 일에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비천에도 풍부에도 처할 줄 아는 사람이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바울은 자신은 날마다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일에 감사하고 자족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기에 비록 옥에 갇힌 상황이라고 해도 얼마든지 기뻐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을 대개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에게 능력만 주시면 나는 못할 일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만약 여러분도 본문에 대해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본문 한절만 생각하기 때문임을 아셔야 합니다. 물론 본문 한 구절만 두고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그러한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능력만 주시면 내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고, 예수님이 능력만 주시면 하는 일마다 성공할 수 있고, 예수님이 능력만 주시면 하루에 천명도 전도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런 이해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일에 도움이 되어지도록 이런 저런 예수님의 능력을 구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과연 사도 바울이 예수님에게 ‘내가 예수님의 일을 하려고 하니까 이러한 능력을 주십시오’라는 요구를 한 적이 있는가를 생각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의 능력만 받으면 무엇이든 하고자 하는 대로 다 할 수있다는 믿음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본문 앞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던 것은 자족이었습니다. 비천에도 궁핍에도 풍부에도 처할 줄 아는 자족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바울이 말하는 ‘모든 것’이란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두고 한 말이 아님이 분명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예수님에게서 능력만 받으면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자체가 무한한 능력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은 그리스도안에서 어떤 일에서든 강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의 의도와는 다른 이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까? 문제는 바로 ‘모든 것’에 대한 잘못된 오해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모든 일이 바울이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말하는 것일까요? 다시 말해서 이 말을 대하고 있는 우리 자신이 원하고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의미하는 것이 본문의 ‘모든 일’의 의미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는 그 배경고 함께 앞뒤의 내용까지 함께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4:11-12절을 보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합니다. 즉 13절에서의 모든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12절에 등장하는 ‘모든 일에’라는 말과 같은 의미에서의 모든 일로 이해를 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12절에서 말하는 모든 일에라는 것은 바울이 원하는 모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울에게 있게 하는 모든 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비천이든 궁핍이든 풍부든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든 일에서 자신은 배부른 자로 살아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능력이라는 말도 ‘뭐든지 할 수 있다’는 힘으로서의 능력을 의미하기보다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것을 두고 한 말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비천함에 있다고 해도 바울 자신은 강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공급하시는 능력 때문에 강할 수가 있었습니다. 풍부에 처할 줄 알았다는 것 역시 바울의 강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강한 바울이었기 때문에 풍부함에 있었다고 해도 풍부에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바울이 말하는 모든 일이란 바울이 하고자 하는 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울을 비천에 있게 하든 풍부에 있게 하든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강한 자로 존재할 수 있었음을 두고 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앞서 말씀드린 대로 모든 일은 하나님이 바울에게 허락하신 비천이든 풍부든 그 모든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인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능력을 받고 살아갑니다. 만약 자신의 힘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신자에게서는 보여져서는 태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자입니다. 그리스도를 의지한다는 것은 힘이 있는 강한 자가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척해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무능력한 자가 강한 자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능력을 받고 산다고 해서, 그 능력이 우리의 일을 이루게 해주는 힘으로써의 능력으로 이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붙드시고 힘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이지 우리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능력을 자신의 일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족하기를 배웠고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배웠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배웠다는 것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믿게 된 후로부터 항상 자족하는 자로 살았다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바울에게 허락하시는 모든 형편과 상황에서 자족하는 법, 즉 환경과 상황에 매이지 않는 법을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날마다 살아가면서 환경과 형편에 매이지 않고 그리스도로 배부르며 살아가는 일체의 비결을 그리스도로부터 가르침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신자는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로부터 가르침 받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신자에게 주어진 삶은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신자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은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 백성을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사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우리를 이런 저런 형편으로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정작 신자된 우리는 우리의 형편에서 하나님을 보기보다는 자신의 형편만 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형편에 의한 탄식과 실망만 나올 뿐 바울과 같은 배움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의미한 인생이고 헛된 세월입니다. 이러한 인생에서는 결코 맺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먹고 입고 살다가 죽는 것밖에 없습니다. 비록 교회를 다녔다고 해도 ‘교회를 다니다가 죽었다’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신자에게 말씀이 주어진 것은 그리스를 믿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리스도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임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으로 인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이미 믿는 자라면 성경을 볼 필요가 있는가라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신자는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로서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리스도안에서의 삶의 모습을 증거하기 위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에서 불평과 실망과 낙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일에서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고 신앙이 무엇이며 신자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에서 사도 바울처럼 ‘배웠다’는 말을 할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배웠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배운 것이 아닙니다. 지식으로 알고 있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여러분이 살아가시면서 배우시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어진 여러분의 상황과 형편에서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배운 바를 서로 모여서 얘기하고 나누는 이것이 곧 ‘성도의 교통’인 것입니다.



신자는 그냥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삶은 그리스도가 주시는 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의 삶은 하나의 생명이며 능력이고 그리스도가 일하시는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예수는 잊어버리고 나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이러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귀한 배움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나의 편함이 우선이기 때문에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사시고, 그리스도가 활동하시고, 생명이 증거되어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가 성령으로 살아가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은 단지 ‘니는 신자다’는 것을 보여주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을 보여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서 배운 바대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사신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인격을 보여주고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활동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부터 능력을 받고 살아갑니까? 어쩌면 여러분은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능력을 받았는지 받지 못했는지 조차도 분간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능력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능력을 어떤 물리적인 힘으로 이해한다거나 아니면 뽀빠이가 시금치를 먹을 때 힘이 솟아나는 것처럼 기도하거나 찬송 부를 때 내 안에서 힘이 솟아나는 것 같은 체험을 능력을 받은 것으로 여긴다면 분명 여러분은 능력을 받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감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만 여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만 살아가는 사람 역시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결국 자기 일이 잘 될 때 그것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이 예수님에게 관심을 두는 자로 살아가신다면 그분의 능력이 어떻게 드러나고 증거되는지 알 것이고 또 자신이 그분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바울의 말대로 신자는 그리스도가 주시는 능력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그리스도가 증거되어지기 위한 능력이지 우리의 일을 위한 능력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긴다면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능력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삽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로 살고자 힘을 쓸 때 여러분 스스로 그리스도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일에 파묻혀 있을 때 그리스도의 능력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능력을 달라고 애쓰지 말고 능력 때문에 고민하지도 말고 그분이 하라고 하는 것을 하면 됩니다. 신자로 살아가면 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