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20  채워주시는 하나님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세상 사람들은 풍성을 세상 것을 소유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세상 것을 소유하는 것으로 배부름을 얻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배부름을 생명에 속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의 배부름은 세상의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바울이 배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모든 환경에서 자족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외에는 다른 비밀이 없습니다. 바울이 신비한 기적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신비한 기적을 체험했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등의 신비한 일을 체험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확실하게 믿게 되었고 그것으로 모든 환경에서 자족할 수 있는 사도가 되어진 것이라면 신자의 자족은 바울고 같은 신비한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과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모든 일에서 배부르며 자족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라는 비밀을 배웠고 알았던 것입니다. 바울이 모든 일에 자족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오늘 우리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수준 높은 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어떤 일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확증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함으로 배우게 된 삶의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이것은 특정인에게 해당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자에게 해당된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잊어버리기에 자족과 상관없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했습니다. 선을 이룬다는 것도 모든 결과가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되어진다는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 믿음의 유익을 의미한 말입니다.



물론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지는 과정에는 우리가 생각할 때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을 것입니다. 어려운 일도 있고 힘든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 펼쳐지는 하나의 과정들이며 결과는 선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모든 일’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내가 원하는 일은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세상 일이 신자들이 원하는 대로 되어진다면 뭐든지 잘 될 것 같은 생각을 가지겠지만 인간이 자기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결국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 중심으로 되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모든 신자가 세상의 일이 자기 중심으로 되어지기를 원하고 그것이 그대로 되어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울이 말하는 모든 일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계획하고 있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모든 일에서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지키고 어떤 환경과 형편에서도 소망과 기쁨을 잃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강한 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두고 한 말인 것입니다. 모든 환경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할 수 있고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인으로 굳게 설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이 19절에서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는 말을 합니다. 앞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모든 일에 자족했으며 비천에도 궁핍에도 풍부에도 처할 줄 알았던 바울로서는 극히 당연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쓸 것을 하나님이 채우신다는 것을 믿는 것만큼 넉넉한 마음이 또 있겠습니까? 바울은 이 믿음으로 모든 일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살펴보기 앞서 역시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본문에 대한 오해입니다. 과연 교회가 본문에서 어떤 오해를 가질 것인가 하는 것은 여러분도 능히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회가 하나님을 말할 때 빼놓지 않고 강조하는 것 중에 하나가 무엇입니까? 바로 ‘채우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쓸 것을 채우시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신자는 쓸 것을 두고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특히 예배당을 지을 때 처음부터 무리한 건축을 계획하면서 목사가 교인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쓸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이니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믿음이 크다면 크게 계획해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결국 큰 예배당이란 목사의 욕심이 개입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교묘하게 믿음으로 위장하고 감추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일이 가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쓸 것을 얼마든지 채워주실 수 있는 분임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께 있는지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여러분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권리가 여러분 자신에게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있습니까?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은 우리의 쓸 것을 채우시는 분입니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대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이것만큼은 여러분이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현대 교회가 오해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것으로 여깁니다. 즉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권리를 인간에게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을 교회의 하나님으로 끌어 내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결코 교회의 바른 모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함으로써 교회다움이 증거되는 것이지 교회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교회다움이 증거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하나님은 우상과 능력 다툼을 하는 분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욕심을 이루어 줌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는 자신들의 욕심으로 인한 경쟁에 하나님을 끌어 들입니다. 기독교보다 불교가 더 잘될 때 그것을 하나님이 부처에게 뒤쳐지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불교를 이기는 것이 하나님의 하나님다움이 증거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종교 싸움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것일 뿐이지 하나님은 애초부터 우상과 경쟁하는 분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들의 삶의 방식은 필요한 것에 대한 결정을 스스로 내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필요한데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도들의 이러한 삶을 교회가 기억하지 않음으로써 오늘날 교회가 은과 금을 필요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구함으로써 교회로서의 능력을 상실해 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다른 교회는 바울이 받고 있는 고난을 기억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빌립보 교회만이 바울의 고난을 기억하고 선물을 보냈을 뿐입니다. 이러한 빌립보 교회에 바울은 깊은 감사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하며 모든 일에 배부른 자로 살았음을 말합니다.



 바울에게 선물을 보낸 것이 하나님께 제물을 바친 것과 같은 것이지만 교회가 바울의 쓸 것을 주기 전까지 바울이 쓸 것이 없어서 낙심했다거나 바울이 쓸 것을 교회가 보내주기를 기다렸다는 생각을 금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빌립보 교회가 보내준 선물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만 교회가 주는 것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쓸 것을 채워주시는 풍성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쓸 것을 보내면서 ‘우리가 이것을 보내지 않으면 사도 바울이 곤란을 받는다’라는 식의 생각을 하지 않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만약 빌립보 교회가 그러한 생각으로 선물을 보낸 것이라면 결국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세상을 살아갈 때 필요한 것이 충족되는 것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 본문과 같은 말을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는 말씀은 신자의 삶을 참으로 풍성하게 할 수 있는 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지금껏 내가 필요한 것을 마음껏 공급받지 못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고, 내가 원하는대로 주시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 원망을 가지고 살아왔던 우리들로서는 너희 모든 쓸 것을 하나님이 채우신다는 말씀에 대해 깊이 이해가 있어야 하며 우리의 삶의 중심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대하면서도 시큰둥해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원하는 대로 채워주지 않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너희 쓸 것을 하나님이 채우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이 말에 마음에 움직일 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대하면서 이미 그 마음에 ‘하나님은 나의 쓸 것을 채워주는 분이 아니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분명히 정립한다면 모든 답이 자연스레 내려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미련하고 잘못된 생각에 신자가 당연히 누려야 할 은혜의 부요함을 얼마나 많이 빼앗기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욕심과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우리 중심적인 생각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영광과 풍성함을 잃어버리고 무능력한 신자로 전락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모든 것을 공급하시고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풍성함을 우리의 욕심으로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나의 필요한 것, 내가 쓸 것을 내가 결정함으로서 모든 것에서 부족함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결국 신자로서의 배부름과 행복은 사라지고 모든 일에서 궁핍을 느끼고 스스로 불행하다 여기는 결과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삶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모든 것에 풍부하신 분입니다. 못하실 일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우리의 쓸 것을 채우신다면 지금 현재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따라 넉넉하게 채워주신 순간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부족을 느낍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신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신다고 해도 항상 넉넉하다는 생각보다는 부족하다는 생각밖에 없습니다. 사치하지 않고 남들보다 힘들게 살아가는데도 필요한 것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도대체 이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까?



사실 궁핍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신자에게는 ‘너희 쓸 것을 채우신다’는 말이나 현재 주어진 것이 하나님이 채워주신 것이라는 말들이 공허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나의 필요를 하나님이 결정하신다고 해도 최소한 힘들지 않게 살아갈 정도는 주셔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하나님에 대한 오해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무작정 너희 쓸 것을 하나님이 채우신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쓸 것을 채우신다고 할 때 그 쓸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육체의 삶을 위해서가 아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육신의 생활을 위해서 쓸 것을 채워주신다면 우리 생각대로 우리가 넉넉하다고 여길 수 있을 만큼, 그리고 우리가 힘들지 않고 어렵지 않을 만큼 채워주시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렇게 본다면 분명 쓸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육신의 생활을 위해서 쓸 것을 채우시는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풍성한 대로 쓸 것을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하면 쓸 것에는 분명한 제한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안에서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임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벗어나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 자체가 헹복이고 기쁨입니다. 사도 바울이 배운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배웠고 그분이 비천에도 궁핍에도 풍부에도 처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비천이든 긍핍이든 고난이든 그 모든 것은 자기 개인의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보여주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여짐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는 고난도 기쁨이었고 궁핍도 감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에게는 지금 주어진 모든 것이 넉넉하게 채워진 것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쓸 것을 채우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제한적 요소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생활의 풍성을 위해서 쓸 것을 채우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의 풍성대로 쓸 것을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육신의 편함이나 풍성함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풍성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주어진 것이 육신의 생활을 기준으로 한다면 궁핍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그리스도를 배워가고 알아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결국 내가 궁핍이라고 여기는 순간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쓸 것이 채워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떠나서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나의 소원이 되어서 살아가지 않는 한 우리는 쓸 것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풍성케 하심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궁핍함에서 오는 불만만 있게 될 뿐입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 스스로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구할 것을 구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육신을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삶에 필요한 것은 놓쳐 버리고 날마다 육신의 것에 매달리고 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을 두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대로 이루지 않으시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 기도대로 이루어 주신다면 육신의 생활을 풍성하며 모든 것을 다 누릴 수 있다 할지라도 구원은 잃어버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대로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로 만들어 가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결정하시고 그대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조차 보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나에게 필요하신 무엇인가를 보고 계신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살피는 그분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필요로 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하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살피시고 보내신 것이 아닙니까? 그분이 우리의 먹을 것 입을 것을 아끼시겠습니까? 다만 더욱 더 큰 일이 있기에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한 필요로 인해서 먹을 것 입을 것 등의 것은 작은 일로 여겨질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 가운데 풍성한 대로 모든 쓸 것을 채우시는 하나님이 바로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으로 살아가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