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20  나의 하나님


 구약은 이스라엘이란 국가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스스로 만들어 간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연출되어지고 펼쳐진 하나님의 이야기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란 국가를 내세워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셨던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막연하게 하늘에만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즉 그들의 생각에 머무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함께 하시고 이끌어 가시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만들어 가셨던 실제적인 분이었습니다.



죄를 범하면 징계를 받았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는 그 어떤 강대국도 물리치는 체험을 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삶에서 만났던 것입니다. 애굽의 군대에 쫓길 때는 홍해가 갈라지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고, 광야에서는 불기둥과 구름 기둥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실적으로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비하면 현대의 하나님은 너무 조용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사실 그런 느낌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인도하신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사건이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더욱 그런 생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나의 삶을 인도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만 할 뿐 실제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지 못할 때 결국 신앙은 이론일 뿐 결코 실제적이고 사실적인 신앙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즉 삶과 하나님이 단절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체험하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실제 자신과 함께 하고 계심을 느껴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 어디를 둘러 봐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삶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하나님을 체험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찬양과 기도 등 종교적 열정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즉 열정적인 찬양과 기도를 하면서 눈물이 나오고 마음이 벅차 오르고 감동이 되는 것들을 하나님이 자기 속에 함께 하셔서 자신을 감동시키셨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좋지 않은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종교적 열정에 나타나신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열정 자체를 무시하거나 죄악시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열정으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느껴보거나 확인해 보려고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나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해 냉담합니다. 나의 삶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이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막연하게 믿고 있는 것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하나님은 말할 수 있을지 언정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알지만 나의 삶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은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말할 수는 있지만 나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잠깐 말씀드린 대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는 말을 하면서 “나의 하나님”이란 말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1:3절에서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라는 말을 하면서 “나의 하나님”이라 표현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란 사도 바울의 개인적 삶에서 만나고 체험함으로써 알게 된 하나님이란 뜻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에 대해서 기록한 것은 삶과 동떨어진 이론적이고 지식적이고 학문적인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만이 아니라 바울이 쓴 서신서 모두가 신학박사가 발표하는 신학 논문과 같은 차원의 글이 아니라 바울에게 함께 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고 자신의 삶에서 만나고 체험하고 알게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란 표현이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결코 이론이나 지식에만 존재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바울의 삶에 함께 하는 실재적인 분이었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우린 다같이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어쩌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있으나 하나님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삶은 없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공허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살게 하시고 하나님이 이끄시고 함께 하시는 삶이라면 자신의 삶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실제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하나님은 단지 이론으로 머물 뿐입니다. 즉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지금 체험을 강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체험을 근거해서 하나님을 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이들은 하나님을 말하기보다는 자기 체험을 말하려고 합니다. 성경을 근거로 해서 자기 체험을 살피고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무시하고 오직 자기 체험을 근거로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말했던 삶에서 하나님을 체험해야 한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경험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것임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어떤 형편과 환경에서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확신하는 그것이 삶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자신의 어려움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의 고난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은 삶에서 되어지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확인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즉 삶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명 삶에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평범한 것만 가지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느낌이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근거로 해서 삶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모든 삶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으로 보여질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될 수 있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근거로 해서 삶을 본다면 모든 삶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함께 하시는 순간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단지 지식과 이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나고 체험한 하나님으로서 사도와 같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할 수 있어질 것입니다.



요즘 한국의 거리마다 태극기가 안보이는 곳이 없습니다. 태극기가 그려진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 얼굴에 태극기를 그려 넣은 사람들, 태극기를 몸에 두른 사람들, 이런 모습을 보면 마치 한국 사람이 태극기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과연 한국 사람이 태극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요? 사실 이들은 태극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이 월드컵에서 강한 국가를 물리치고 승리한 것을 즐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한국이 월드컵에서 좋지 않은 성적을 올렸다 해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결국 지금의 현상은 월드컵으로 인해서 태극기를 사랑하게 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 뿐이지 태극기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태극기를 사랑한다면 월드컵의 성적과 상관없이 그 모습이 보여져야 합니다. 월드컵에서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태극기는 변함없이 태극기 그대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닌 이상 월드컵이 끝나면 태극기에 대한 지금의 모습은 사라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을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 우리 자신들이 평소에는 하나님께 관심을 두지 않고 살다가 어떤 특별한 좋은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유익이 좋아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익이 없을 때는 자연히 하나님에 대한 마음도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삶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을 보지말고 하나님을 근거로 해서 삶을 보라는 제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따라 하나님이 달라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근거로 해서 삶을 본다면 오늘의 삶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결코 변함이 없으신 것입니다. 즉 삶의 형편은 변할지언정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쓸 것을 채우시는 하나님을 여러분의 삶에서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을 보지 말라는 것은 곧 나를 근거로 해서 하나님을 보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근거로 해서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반대로 자신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을 보려고 합니다.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일이 이루어질 때 자신에게 유익된 일이 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갑자기 나타나서 놀라운 일을 행해주시는 분으로 여기기 때문에 평범한 삶에는 하나님이 안계신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하나님이 바울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바울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만났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로 하나님은 그 누구와도 직접적인 교제를 하지 않으십니다.



구약의 아브라함에게처럼, 모세에게처럼, 선지자들에게처럼 직접 말씀하시고 교제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시겠다는 의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인격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우리를 만나신다면 결국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오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얘기가 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도외시하고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자기 백성을 어떻게 인도하실 것인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하신 일을 통해서 명백히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써 세상에 심판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독생자 아들을 고난으로 밀어 넣으시면서 세상을 향해 죄가 무엇인가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고 그 자리에 자기 백성을 세우신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하나님을 상상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백성을 고난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항상 성공으로만 이끌어 주기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삶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필요로 하는 것도 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본다면 먼저 죄인된 자기 자신이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된 나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용서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하게 된다면 그 필요가 이미 그리스도로 채워졌음을 알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사랑하는 아들을 고난으로 밀어 넣으신 하나님이신 것을 안다면 우리 역시 고난으로 밀어 넣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난이 있을 때 고난을 피할 방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고난에서 믿음으로 굳건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힘을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파선을 당하고 태장을 맞고 오해받고 모욕을 당하고 돌에 맞아 거의 죽을 뻔도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그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강건케 하였기 때문입니다.



딤후 4:16-18절에 보면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복음을 위해서 많은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고난에 처했고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기도 했던 사도 바울이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신다는 말을 합니다. 고난에 처한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이 채우신 것은 강건함이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이 사라지기를 기대한 것이 아니라 고난에서도 강건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바울을 강건케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항상 그와 함께 하심을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이 고난이 있을 때 고난이 사라지기를 기대한 것이 아니라 강건하기를 원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고난의 의미 또한 알았기에 자신을 고난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까지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니면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우연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쓰여지는 순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지금의 형편이 어려움과 고통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려움과 고통에서 필요한 것은 흔들림이 없는 믿음의 강건함이며 그 필요를 하나님이 채워주신다는 것도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삶에서도 고통의 삶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흔들림이 없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시고 내 쓸 것을, 나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과 어려움이 없는 삶만을 생각한다면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음이 자명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예수님을 통해서 배우시고 여러분의 삶에서 일하시는 그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한 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