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22  가이사 집 성도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의 마지막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21절)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도에 대한 문안은 단지 인간적 관계에서 안부를 묻는 차원의 문안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는 특별한 범주에 속한 자들끼리의 문안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문안은 단순한 인사차원의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하나됨을 뜻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로서 성도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잊고 산다면 성도의 문안 역시 있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죄 가운데 출생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죄 가운데 사는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여깁니다. 죄인줄 알면서도 죄를 즐긴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극히 당연한 자신의 삶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출생의 자리가 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임하게 되고 구별되고 죄에서 불러냄을 받은 자가 있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서 ‘성도’라 부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따로 택하시고 불러내서 구별하신 백성입니다. 세상에서 구별하시고 불러 내셨다는 것 때문에 ‘거룩한 백성’ 즉 성도로 불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따로 세우신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시기를 원하시는 뜻에 의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로 불려지는 것에는 인간의 행함은 전혀 개입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은혜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내가 무엇을 행하고 행하지 않음을 바라보면서 ‘성도다’ ‘성도가 아니다’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은 부당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을 입었다는 것을 훼손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를 근거로 하여 생각해야 하는 것이 곧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성도는 누구든 될 수 있으며, 어디에서든 성도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구별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따라 주어지는 것이며, 어떤 장소로 구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행동의 차이로 인해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착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성도로 불려진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는 전혀 무가치한 것이 되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귀함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행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과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 안에 과거와는 다른 무엇이 존재하고 있음을 의식할 때 그 모두가 하나님의 행하심의 결과임을 생각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밖에서 죄인의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늘의 것을 소망하고 바라볼 눈이 없습니다. 육신의 눈에 보여진 것만을 전부로 알고 살아갈 뿐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원수된 자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 굴복한 자로 살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조차 자신에게 굴복해주기를 원하며 살아갑니다.



세상은 하나님께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마음에 살아 계십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행하신 결과라는 말 밖에 다른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성도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한가를 다시 우리들의 마음에 굳게 세우기를 원해서입니다. 성도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굳게 하기 위해서 드리는 말씀인 것입니다.



간혹 군대 얘기를 해서 죄송하지만 계급이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심심찮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스톱에서 딴게 아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병장이 일병을 기합 주면서 ‘작대기 네 개가 고스톱해서 딴게 아니다’는 말을 합니다. 그것은 작대기 네 개, 즉 병장이란 계급을 우습게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고생하고 힘든 시간을 지내서 붙여진 것이 병장이란 계급장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우습게 여기지 맙시다. 우리에게 은혜는 공짜로 주어진 것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고난이 있었고 죽으심이 있었습니다. 아마 우리가 고생해서 얻어진 것이 은혜라면 그 은혜를 소중히 간직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라 하면 ‘공짜’ ‘거저 주어진 것’이란 개념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나님 편에서의 고난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가치를 알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행한 것만큼 은혜를 주시는 방식으로 일하신다면 주어진 은혜를 자신의 행함의 결과로 인식하게 될 것이고, 결국 은혜를 자신의 행함으로 자랑하는 것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내 행함의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끝까지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가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굴복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거룩한 삶이 보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삶은 진리를 깨달은 자들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은혜를 아는 자들의 삶입니다. 여기에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성도가 행하기 위해서 애쓰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구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죄가운데서 특별히 구별되어 부름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행위가 나에게 역사하셨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결코 소홀히 할 수도 잊을 수도 없는 은혜이며 기쁨이고 감사인 것입니다.



이 기쁨과 감사는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구별된 자라는 특별한 집단에 속하게 된 사람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기쁨과 감사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것으로 서로 한 집단에 속해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월드컵 축구로 인해서 전국에 ‘대한민국’이라는 구호가 외쳐지고 있습니다. 한국이 4강에 올랐다는 것으로 모든 한국사람들이 기뻐하고 환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한국 사람이라는 민족성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한국인으로서 한국이 승리하는 것에 대해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한국의 승리가 마치 자신이 승리한 것과 같이 여겨지고 자랑스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부둥켜안고 승리를 기뻐할 때 ‘우린 자랑스런 한국인이다’는 동질감을 가지게 되고 뭔가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성은 타민족에 대한 배타적 감정을 드러냅니다. 타민족의 강함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내 민족만이 강해야하고 내 민족이 다른 모든 민족을 누르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우뚝 서야 합니다. 그것이 곧 같은 민족이라는 관계에서 누릴 수 있는 자신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관계에는 민족성도 그 어떤 인간관계도 개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행하심 안에서 은혜를 알게 된 사람들이고 성도가 되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성품이나 민족, 그리고 기질 등 모든 인간적인 것과는 상관없이 다만 베풀어진 은혜에 대한 기쁨과 감사로 모이는 관계일 뿐입니다. 이러한 성도의 관계는 타인에 대한 배타적 감정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나의 성품과 기질 학연 지연 등 그 어떤 것이든 그것을 이유로 해서 타인을 배척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세상적인 인간관계가 개입되어 파벌이 형성되고 끼리끼리의 관계가 보여진다면 그것은 교회로서 아주 나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만은 교회가 아주 조심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서로 의견이 같고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어울린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로서의 모습을 벗어버렸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삼가야 하는 것은 여러분의 생각과 판단이 기준 되어서 타인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의 행동을 보면서 ‘저 사람은 성도되기 틀렸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를 멀리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두어야 합니다. 이것은 다만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앞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듯이 우리가 성도된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들의 기질이나 성품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성도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나쁜 일을 안하고 비교적 양심껏 살았다고 해서 성도될 자질이 있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도 되어지는 것이 분명 우리의 양심과 성품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착하게 살았다고 해도 그가 성도될 가능성은 100%없는 것이 인간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성도된 것을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도가 누군가의 행동을 보면서 ‘성도될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배타적인 행동을 취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어떻게 성도 되어졌는가를 잊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건 그리스도를 알건 그 모든 것이 자신이 스스로 깨우친 것으로 인식하고 있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나같은 자도 성도 되었다’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나같은 자도 하나님이 행동하심으로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게 되고 내 죄를 깨닫고 은혜에 감사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자에 대해서 가능성을 두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자에 대해 기다리는 것이 있어야 하고 오래 참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한 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베드로후서 1:5-7절에 보면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믿음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가느냐?’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덕으로 이끌어 가고, 지식으로 이끌어 가고, 절제 인내 경건 등으로 이끌어 갑니다. 즉 믿음으로 인해서 이러한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오래 참으심으로 일하십니다.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면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때문에 성도는 오늘 자신의 모습에서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도 안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깨닫기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집 사람 중 몇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단순한 문안 인사로 가볍게 넘길 수도 있지만 우리의 눈길을 끄는 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집 사람 중 몇이니라”는 구별입니다.



가이사 집은 로마 황제의 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가이사 지의 몇 사람이 빌립보 교회에 문안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이사 집에 믿는 자가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당시 이스라엘로서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가이사 집에서 그리스도인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는 로마 황제의 집에서, 그가 종이든 황제의 신하든 황제의 인척이든 상관없이 가이사의 집에 믿는 자가 있고 그들이 빌립보 교회에 문안한다는 것은 민족과 기질 등 모든 환경과 형편을 초월해서 이루어진 성도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믿는 자를 죽이는 일에 앞장서던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라는 상상을 누가 했겠습니까? 여러분은 북한의 김정일이가 성도가 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의 기질이나 사상, 지금까지 보여준 그의 행동, 이런 것들을 기준으로 계산해 본다면 그는 분명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빨리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가 살아있는 것은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방해만 될 뿐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믿음이 없는 생각일 뿐입니다. 김정일이가 성도될 것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 누구든 성도되게 하실 수 있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를 바로 여러분 자신에게서 찾고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성도될 가능성이 있어서 성도된 것이 아닙니다. 성도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자질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조금 도와줘서 성도가 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본질을 깨닫고 무가치함과 죄인됨을 잊지 않는다면 이러한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살아가게 된 것은 분명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이 나에게 일하신 것이 있기 때문임을 확신할 수 있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서 더 크게 부각되는 것이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 대해서든 그의 행동과 성경에 대한 이해를 기준으로 해서 ‘신자되기엔 틀린 사람’으로 판단하고 무시하고 배타적으로 대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성도됨을 자신의 자질의 결과로 돌려버리는 것과 같은 것임을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자될 수 없는 사람으로 판단하고 밀쳐 내고 있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그를 택하시고 성도로 부르시고 성도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행동하고 계시고 있을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가능성을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성품과 자질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전능하신 분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누구 앞에서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예수 믿기는 틀린 사람이니까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예수를 믿지는 않을거야’라고 판단하고 아무렇게나 행동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성도로 부르신 것은 여러분을 세워서 택하신 자기 백성을 부르시겠다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택한 자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모든 자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은혜를 말한다해도 세상을 살아가는 삶에 대한 것으로 국한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본질은 성도될 수 없는 자가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에 있습니다. 이 은혜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는 결코 자신의 무가치함을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우월감 역시 버리지를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누군가에 대한 배타적인 행동을 만들어 내게 될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누구에 대해서든 소망이 없는 자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누군가가 회개할 가능성이 없는 자로 여겨진다면 그를 신자되기 틀린 사람으로 배척하고 밀쳐낼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은혜 안에 있는 성도의 바른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에게서 믿음이 없을 때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가슴에 두고 살아가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곳에 있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라면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이사집 사람 중의 성도라는 이 말을 생각할 때마다 누군가를 배척하고 무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있는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가이사 집 사람 중에 성도된 것은 도저히 성도가 되어질 수 없는 환경에서 성도가 되어진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이사 집은 로마 황제의 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로마 황제의 궁은 분명 통제된 곳이고 그러므로 복음이 전달되기란 거의 힘든 환경입니다. 그러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 중에 성도가 된 사람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의 능력은 환경도 초월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환경도 인간의 어떤 기질도 복음의 능력에 방해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린 본문에서 어떤 사람이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으며, 어디서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복음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특별한 환경과 조건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은 저와 여러분을 어떤 환경이나 어떤 조건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처한 환경과 형편에 대해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붙들고 있고 일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은 개인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하십시오. 내가 잘하면 내가 복받고 못하면 벌받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내가 잘할 때, 즉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를 힘쓸 때 그것이 누군가를 그리스도인 되게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로서 중요한 원칙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든, 누구에 대해서든, 설사 그가 내 마음에 들지 않고 미움이 가는 자라 할지라도 내 자신이 하나님께 입은 은혜와 사랑을 깊이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인가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인의 감정과 생각과 판단은 그리스도 뒤에 감추어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오늘 우리의 부족은 그리스도를 내세우려고 하기보다는 자기 개인의 감정과 판단을 중요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 속에 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은 성도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란 겨우 교회 다니는 것으로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전부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그리스도인, 성도로 부르셨습니다. 그것을 여러분을 세워서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 일에 사용하시겠다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그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일에 도구로 쓰여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귀함이고 가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쓰여지는 것 자체가 성도의 가치인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성도된 것은 하나님의 귀하신 은혜와 사랑의 결과임을 생각하시고 그 은혜와 사랑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힘쓰십시오. 이것이 성도된 우리의 의무이며 책임입니다. 용서를 받았은즉 용서하는 삶으로 용서를 증거 하십시오. 이것이 용서받은 성도에게 주어진 요구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용서는 여러분의 용서로 증거되고, 여러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여러분의 사랑으로 증거 되어짐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깨달은 은혜와 사랑이 귀하면 귀할수록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은혜와 사랑을 지키고자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은혜와 사랑을 나눔으로 증거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