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  심령에 은혜가


오늘 빌립보서의 마지막 구절을 대하면서 ‘은혜’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라는 말로 끝맺고 있습니다.



은혜라는 말은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말입니다. 그런 이유로 사실 은혜라는 말을 자주하되 별 생각없이 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생각과 은혜에 대한 기쁨과 감사를 생각하지 않은 채 은혜라는 말을 쉽게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편지를 시작하는 1:2절에서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은혜가 있기를 기원하는 말로 시작한 편지가 은혜가 있기를 기원하는 말로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이러한 형식으로 시작되고 마쳐지는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서신서가 은혜가 있기를 기원하는 말로 시작되고 마쳐지고 있으며 특히 갈라디아서와 빌레몬서의 마지막은 오늘 본문과 똑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또는 ‘함께 할지어다’라는 말로 끝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계속 반복되어서 사용되는 문장 형식으로 인해서 우리는 그러한 표현들이 다만 편지를 하는데 있어서 사용하는 형식적인 문구일 뿐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즉 편지를 하는데 있어서 빠지지 않는 인사말 정도로 여기고 지나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누군가에게 편지할 때 ‘잘 있었는가?’ ‘잘 있으라’는 문구로 시작하고 마치는 것처럼 바울 역시 교회들에게 ‘은혜가 함께 있을지어다’는 말로 인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본문이 인사와 안부의 의미가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편지의 형식을 갖추기 위해서 별 생각없이 그러한 표현을 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의미의 말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다만 형식적인 표현으로써 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도 바울은 말 하나하나에 자기가 말하고 있고 또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빌립보서를 살펴오면서 알 수 있었듯이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도 전혀 낙심하지 않고 여전히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자기 한 사람의 기쁨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 또한 자신과 동일한 기쁨으로 기뻐하기를 원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 ‘하나님이 나를 분명히 구해내실 것이다. 그래서 후에 당신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기대와 확신을 가지고 기뻐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감옥에서 구해줄 것이니까 안심하고 있으라는 계시를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을지 살지 앞일을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기뻐했던 것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상실되지 않는 주님 안의 기쁨이었으며 빌립보 교회가 이 기쁨으로 기뻐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시간 바로 저와 여러분이 바울과 같은 기쁨으로 기뻐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1:20절에 보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말합니다. 살든 죽든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려 한다는 이 말은 바울의 상황이 살지 죽을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것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우린 대개 이러한 상황에서는 불안해하기 마련입니다. ‘내가 살 수 있는가 죽을 것인가?’라는 문제로 심란해하게 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경우에도 바울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자신의 몸은 오직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믿었기에 살아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어도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는 살아도 ‘주안에서 기쁨’이고 죽어도 ‘주안에서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이러한 기쁨으로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의 기쁨을 빼앗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다루면서 권면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자로써 중요한 것은 누리며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예수님의 은혜를 알고 구원을 얻었음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리고 사는 것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구원을 얻었음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누리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누림으로써 구원이 보여지고 증거되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도로서 귀중한 존재 이유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는 본문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단순한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하면서 그 은혜로 다스림 받고 살아감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을 증거할 수 있기를 소원하는 깊은 의미의 말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기독교의 본질 자체이며 기독교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모든 것이 은혜로 시작되고 은혜로 마쳐지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삶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 안에서 진행되는 것이고 은혜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는 자기 의지와 본성을 가지고 신을 찾습니다. 신을 찾는 이유도 자신의 욕구를 신의 도움을 받아서 채우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으로 시작하고 인간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인간 중심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믿음은 인간의 의지와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와 본성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나올 수도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믿음을 위로부터 받아서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지켜지는 것도 우리들의 노력과 공로가 아니라 은혜가 우리에게 함께 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은혜가 아니면 믿음은 우리에게서 시작될 수도 없고 또 지탱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그러한 사실들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인간의 역사들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인간은 한순간도 믿음을 붙들 수가 없는 존재임이 드러납니다. 인간의 끝없는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중단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서 믿음이 지탱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은혜’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은혜를 중심으로 하여 말씀이 증거 되어져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노력과 공로가 높여져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강조는 기독교의 본질을 벗어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행위와 노력의 대가로 어떤 결과가 주어진다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오직 은혜를 말할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서신을 은혜로 시작하여 은혜로 마치고 있음을 깊이 생각하기 바랍니다. 단순한 편지 형식으로 쓴 표현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의도하는 바가 담겨있는 말씀임을 생각해 본다면 바울은 은혜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신자이며 그리스도인의 삶 역시 은혜 안에서 가능함을 말하고자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는 영원히 죽어야 할 존재, 즉 하나님으로부터 그 어떤 혜택도 받을 수 없는 존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발적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자발적 은총이라는 말은 인간의 행위나 선이라고 여겨지는 어떤 것에 대한 반응이나 대가가 전혀 아니라는 뜻입니다. 만약 인간의 행위에 대한 대가로 주어진 은혜라면 하나님의 자발적 은총이라는 말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행위로써 인간을 판단한다면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은 심판입니다. 즉 영원한 사망이며 멸망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총으로 인간을 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이 사실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봄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 본래의 운명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말이 기쁜 소리로 들려질 수 있는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바로 ‘죄인’입니다. 물론 성경은 세상의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은혜라는 말을 기쁘게 들을 수 있는 참된 죄인은 자신 스스로 하나님께는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는 악한 자임을 아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들만이 진심으로 은혜를 은혜답게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입술로만 죄인이 아니라 심령에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있는 그에게 은혜가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의미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도저히 받을 자격이 없는 자가 받을 수 없는 것을 받아 누리게 되었다는 것에 존재는 기쁨을 과연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이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존재들인가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살아가는 모습만으로도 감히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자인가를 깊이 자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고 말합니다. 과연 바울이 심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심령이란 마음을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의 마음을 심령이라고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새롭게 하여 주신 신자의 마음을 가리켜서 심령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자의 마음을 새롭게 하셨다면 그 마음은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심령에 은혜가 있으라고 선포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지배하는 삶이 되어라는 선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을 때 우리의 삶은 자연히 은혜로 다스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옥에 갇힌 사도 바울이 기뻐했다면 그것이 곧 은혜로 다스림 받는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고 견딘 것이 아니라 바울의 심령에 함께 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사도 바울을 그렇게 만들어 갔던 것입니다. 은혜가 어떠한가를 알고 그 은혜가 참으로 큰 기쁨으로 자리하고 있었기에 옥에 갇힌 상황에서도 염려하지 않고 기뻐하고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한다는 이유와 목적이 분명했기에, 그리고 그래야 하는 분명한 당위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러한 삶에 머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은혜를 누리고 사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신자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은혜든 믿음이든 구원이든 모든 것이 입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를 누리기에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고, 미움으로 대할 사람을 용서와 사랑으로 대할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주장으로 인해서 다툼이 보여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이해와 양보가 보여지는 것, 이러한 모든 것이 심령에 은혜가 있음으로 인해서 나타난 결과이고 열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그리스도의 은혜의 시각에서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있게 되면 낙심과 불평과 불만 시기와 질투 다툼 등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된 우리에게 베풀어진 그리스도의 은혜의 방식을 따라가기보다는 우리의 악한 생각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해 볼 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는 바울의 말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는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은혜가 우리의 심령에 있을 때 은혜가 우리를 지킵니다. 진리로 행하지 않을 때 심령에서 주님의 은혜가 나를 향해 외칩니다. ‘그것이 과연 주님의 은혜로 사는 것인가?’라고 외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에는 은혜가 함께 해야 합니다. 바울의 기원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소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심령에 은혜가 함께 한다고 해서 특별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남들이 받지 못한 세상의 복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은혜의 소중함을 알고 은혜를 벗어나 사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심령에 은혜가 함께 하기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자신을 은혜로 사는 삶이 되어지도록 다스리시고 간섭해 주시기를 소원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에 은혜가 함께 하는 것이고, 심령에 은혜가 함께 하기에 어떤 문제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함으로써 풀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자발적 은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은혜를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도저히 받을 자격이 없는 자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말하기 전에 은혜가 어떤 분으로부터 어떤 자에게 주어지는 것인가를 깊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은혜가 신자에게 확실한 소망과 기쁨으로 자리하기 위해서는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호의라는 사실을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서든 그리스도를 생각하도록 하십시오. 2:5-8절의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그리스도께서 어떤 마음으로 우리를 대하셨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로 인해서 우리가 어떤 존재에서 어떤 존재로 달라지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뒤를 돌아보십시오. 살아오시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불평하고 불만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을 것입니다. 누군가에 대해 한없이 미워하고 때로는 무시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나보다  못한 자로 치부하면서 거리를 두고 평가하고 판단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행위에 대해 ‘나쁘다’라고 말하기 전에 왜 그런 행위가 보여지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은 결과임을 알 것입니다. 은혜로 다스림 받기보다는 자기 본성으로 행동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기에 끊임없이 나의 심령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소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소원으로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항상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며 은혜를 누리는 풍성한 삶이 되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