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9-10 주의 날



목회의 허구성은 교회를 찾아온 사람들을 구원하려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나 그 입장에 대해서는 전혀 염두에 두지도 않은 채 오직 인간 구원에만 집착한 채 목회라는 것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목회 하신다는 것도 무시해 버리고 위임 목사랍시고 하나님이 이 교회를 나에게 맡겼으니까 내가 목회하는 것이고 내가 짊어져야 할 사명이라고 공공연하게 큰소리치는 것이 오늘날 목사라고 이름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목회가 추구하는 것은 결코 천국이 아닙니다. 오직 교회를 바라보고 교회를 추구하는 목회일 뿐입니다. 교회를 부흥시키고, 교회를 성장시키고, 소위 이상적이고 아름답고 이름난 교회로 만들기 위해서 목회라는 수단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목회를 위해서 예수를 끌어오고 성경을 끌어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죽이시는 무서우신 분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인자하신 할아버지고, 나의 목회를 옹호하고 도와주시는 분으로 여깁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기도했는데 교회가 부흥이 안되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 책임입니다'라는 말도 안되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습니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그리스도가 좋다면 교회까지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좋다면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고 교회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사랑이 곧 교회 사랑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졌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이러한 목사들의 말에 교인들은 쉽게 넘어가고 맙니다. 목사의 상식과 교인들의 상식이 서로 일치하고 통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서로 상식이 통하고 생각이 일치하는 그 현장에서 결국 죄가 의로 뒤바껴 버리는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 진짜 의가 투입되었을 때 사람들은 일치 단결하여 그 의를 몰아내고 맙니다. 그래서 발생한 것이 십자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 십자가 앞에서 마치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려 죽은 것은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인 듯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운운하는 것은 인간을 모르고 예수님을 모르는 무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기사 처음부터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도 관심 없이 다만 예수님을 팔아서 교회를 만들고 성경을 팔아서 내 이득을 챙기기에 급급해 있었으니 오직 목회에 미칠 수밖에 없고 '내 교회'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교회가 부흥하려면 찾아온 자들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요즘 같이 교회 수가 증가하고 한 건물에 서너 교회가 함께 있는 현실에서도 더욱 더 내 교회가 우월하다는 것을 만인에게 보여줘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 구원에 관심을 두고 찾아온 자들에게 '인간 구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열심을 내면 하나님도 우리의 정성에 마음이 움직여서 복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곳이 소위 목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는데,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가 내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합니다(요 6:38-39). 예수님은 아버지가 주신 자가 누구인지 누구를 구원할 것인지 조차도 자기 권한 밖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뭡니까? 자기 구원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기 구원만 생각하는 자들은 자기 인생에서 위태롭거나 어려운 일이 발생했을 때 하나님에게 반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생각했던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고 나를 지켜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발생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전혀 안중에 없기 때문에 잘되고 못되고는 모두가 아버지의 손에 달려 있고, 또한 나같은 자는 세상에서 잘되고 편안한 삶을 살 가치도 없는 자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세상에서 복을 받고 편안하게 잘 살아갈 가치 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인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것을 목사들이 부추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갈 생각을 꿈에나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가신 길이 좁은 길이고 그 길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나 하겠습니까? 결국 예수님 따로 나 따로 살아가는 삶이면서도 말은 하나님과 함께 한다느니 예수님과 동행한다느니 떠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요한계시록을 천번 만번 읽어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만이 아니라 모든 성경이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우리들 앞에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환난과 고난에 참여한 자로 등장합니다. 9절에 보면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계시를 받은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 자였다면 그 계시에 대해서 읽고 듣고 있는 우리 역시 예수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 자리에서 이 말씀을 대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요한계시록이 이해되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했다는 것은, 오직 마지막 때 영원히 남는 것 하나 바라보고 산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다 망해도 영원히 남는 것 하나, 그 하나가 바로 내 속에 있기 때문에 환난도 마다하지 않을 수 있고 그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사가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그 허구성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마지막 때는 교회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생각지도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교회에 매일 필요가 없고 교회에 매여서도 안되는 것은 마지막 때에는 교회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미련을 두고, 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세상에 붙들려 있기 때문에 환난이 두렵고, 세상을 떠나서 그의 나라에 동참한다는 것이 불안하게만 느껴지는 것입니다. 


벧후 3:10절에 보면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의 날'을 말하는데, 베드로 후서에서도 '주의 날'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를 보면 주의 날은 무시무시한 날입니다.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난다고 합니다.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없는 아무 것도 없는 날입니다. 여러분이 가장 귀하게 생각하고 아꼈던 것도 사라질 날이 주의 날입니다. 


베드로후서에서 주의 날은 주님이 오시는 날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실 때 그냥 빈손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과 함께 오십니다. 영원한 천국이 오기 때문에 이 세상은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천지창조때 만드셨던 해도 달도 다 사라져야 할 날입니다. 주의 나라는 해도 달도 필요 없는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체가 빛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해와 달이 있음으로 해서 날과 시간을 구분합니다. 그런데 해와 달이 사라졌다면 자연히 날과 시간도 함께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나라에는 날도 없고 시간도 없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다 소멸되어 버리는 것, 이것이 주의 날입니다. 주의 날을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로만 보지 말고 모든 것이 다 소멸되고 사라질 날로 보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주의 날이 어떤 의미로서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가 '주일'을 말하면서 그 근거를 본문에서 말하는 '주의 날'에 두고 있습니다. 즉 오늘날 일주일 중 첫날인 주일을 의미하는 것이 주의 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의 날은 해뜨고 해지는 개념으로서의 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후서에서 말한 주의 날 역시 해뜨고 해지는 개념으로서의 날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부서지는 것을 의미하는 날입니다. 따라서 요한 계시록에서 말하는 '주의 날' 역시 시간적인 개념의 날이 아니라 모든 것이 소멸되버린 상태를 의미하는 날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에게는 날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벧후 3:8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주님에게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과연 시간적인 의미로서 해석할 수 있습니까? 천년인데 하루고 하루인데 천년이라는 말이 어떻게 이해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하늘에서 시간과 땅에서의 시간으로 구별을 해 버립니다. 즉 하늘에서는 천년이 지나야 하루로 계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이 죽으신지 2천년이 지났지만 하늘에서는 겨우 이틀밖에 되지 않았다는 억지 주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재림하실 날도 세상 시간으로 보면 멀지만 하늘 시간으로 보면 금방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만년 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해도 지상에서는 만년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10일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성경에서도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웠다는 표현을 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늘에서 만년이 10일이라고 해도 우리가 만년을 10일로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만년은 만년일 뿐입니다. 


그러나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은 천년과 하루가 같은 것이다는 뜻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지난주에 말한 묵시 세계입니다. 날과 시간의 의미가 없는 세계입니다. 이것이 주님 안의 세계입니다. 20장에서 말하는 천년이라는 말도 시간적인 의미에서의 천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상관이 없는 묵시 세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그 수명이 얼마였겠습니까? 그때는 몇 살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죽음이 없는 상태인데 몇 살이라는 나이 개념이 있겠습니까? 인간이 인간의 수명에 대해서 몇 살로 따지게 된 것은 죽음이 있고 부터입니다. 즉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이라는 의미가 몇 살이라는 말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죽음에 가까이 다가갔는가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인간의 나이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죽음이 없었던 상태인 아담에게는 나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죄를 범하고 인간에게 죽음이 왔습니다. 즉 수명에 한계가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의 형상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에게도 그 수명이 한계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수명을 보면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제일 오래 산 므두셀라를 보면 969세를 살았습니다. 즉 인간은 그 수명이 천년을 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969세를 살았으면 얼마든지 천년을 넘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인간이 천년을 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천이라는 숫자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다른 세상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죽음이 있는 인간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 '천'이라는 숫자가 가지고 있는 의미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영생을 표현하는 의미로서 천이라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 안에서는 날이라든지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단지 어떤 상태를 말할 뿐입니다. 다라서 일주일 중 하루가 주님의 날이라고 하는 것은 새날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옛것을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어리석음이라고 밖에 말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나라에는 날이라는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 나라에 거룩한 날과 거룩하지 않는 날의 구별이 있다는 것 자체가 성경에 대한 무지함을 폭로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이 주의 날에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데, 여기서 말한 주의 날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주의 날은 세상의 모든 것을 부숴 버리는 날입니다.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없어지고 주님의 공로에 의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지는 날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 주의 날입니다. 


요한이 주의 날에 본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은 예전에 주님이 살아 계셔서 함께 다닐 때의 약해빠진 모습이 아니라 가슴에 금띠를 띤 무서운 모습의 예수님을 봤습니다. 이 모습은 마치 웃시야가 죽던 해에 이사야가 성전에서 본 하나님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본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을 본 요한은 땅에 엎드렸습니다. 요한이 과거에 예수님을 보고 땅에 엎드린 적이 있었습니까? 과거에 함께 다니던 예수님을 다시 만났으면 반가워해야 하는데 왜 땅에 엎드립니까? 그것은 전혀 다른 모습의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얼굴 모습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을 심판하는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땅에 엎드린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난 그 상태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날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만난 그 상태가 바로 주의 날입니다. 


주의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만난 상태는 땅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결국 주의 날이라는 것은 어떤 상태로서 세상을 살아가느냐를 말하는 것이지 시간으로서 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주의 날이 언제냐고 묻지 말고 주의 날은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주일을 주의 날이라고 하면서 그 날을 지키기 위해서 예배드리고 세상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과연 누가 주일을 지킨 자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주일을 통해서 주일이라는 하루도 주님을 위해서 제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들의 허물을 발견하는 것이 옳은 것이지 겨우 예배 한번 드렸다고 해서 마치 주님을 위해서 하루를 바친 양 말하고 복을 기대한다는 것은, 인간을 위해서 인간 스스로 주일이라는 날을 만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짜 주님의 세계를 살아가는 신자가 주의 날에 참여하고 사는 것은 뭔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태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만나고 땅에 엎드렸듯이 신자가 주님을 만났다면 주님 앞에 엎드린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주의 날에 참여한 것입니다.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했다는 것도 주일을 잘 지켜서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해서 요한이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세상이 심판 받을 장소로 보이고 자기 자신 역시 심판 받을 자로 보여진 것, 이것이 바로 주의 날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주의 날에 참여한 자로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즉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고 요한이 예수님을 만난 그 상태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의 상태는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심판 받을 장소로 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자신 역시 심판 받을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을 말합니다. 내가 심판 받을 죄인임을 알게 되었을 때 심판주이신 예수님을 만난 이상 엎드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심판의 장소로 보고 살아가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의미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어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생명으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앞에 엎드린 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주의 날에 참여된 신자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