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시작하면서 말씀을 드렸지만, 사도 요한에게 예수님의 계시가 주어진 것은 요한이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는 의미 아닙니다. 계시라는 것은 뭔가 새로운 것이 추가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장래에 되어질 새로운 것을 알려주는 것을 계시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인간의 생각과 판단을 공격하는 것이 계시입니다.



세상의 모든 역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모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상의 모든 역사를 평가하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되어질 일이라는 것도 십자가 앞에서 보면 이미 명확하게 계시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미래에 대해서 새로운 계시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시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상의 역사를 평가하고 고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는가 어떻게 해야 칭찬 받는 교회가 되는가라는 시각으로 봐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심판을 대비하라는 책도 아니고 완성을 위해서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완성된 자리에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완성된 자리에서 세상을 보니까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죄의 실체가 낱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일곱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는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일곱 교회라는 현실을 통해서 세상의 악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영광의 자리에 앉아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교회라는 세상의 역사 속에서는 고난받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미 영광의 자리에 앉으신 분이기에 고난받고 죽는 것도 실패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바로 이 영광을 아는 자입니다. 영광을 알기 때문에 현재의 고난을 고난으로 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의 실패가 실패가 아니며 낮아짐에 처하는 것이 패배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언제나 영광을 무시하는 쪽으로 나갑니다. 영광을 무시하는 세상에서 영광을 아는 자로 산다는 것 자체가 곧 고난이며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이며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펼쳐내고 있는 악의 모습입니다.



19,20절을 보면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의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어떤 모습이었는가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교회에 원하시는 것은 사랑이고 믿음이고 섬김과 인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사는 것이 곧 교회의 사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업이란 조그만 것을 크게 만드는 일을 말하지 않습니다. 흔히 교회의 사업이란 말을 하면서, 선교를 하고 구제를 하고 교육관을 짓고 예배당을 짓는 것들을 말하지만 그것들은 인간의 사업이지 예수님의 사업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오셔서 어떤 사업을 하셨습니까? 교회를 세우고 자기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모으기에 열중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단지 사랑을 보이셨고, 믿음을 보이셨고, 섬김과 인내를 보이셨을 뿐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교회는 예수님이 공생애 때 하셨던 것과 일치된 길을 가는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은석교회 역시 교회라는 껍데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배당이 있고 예배 시간이 있고 모이는 사람들이 있고 목사가 있고 돈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것들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은석교회를 향해서 사랑을 원하시고 믿음을 원하시고 섬김과 인내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은석교회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에 관심을 두고 모이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존재와 유지에 관심을 두고 모인다면 예수님으로부터 거부당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신자이며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알아야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과 우리가 원하는 것이 서로 충돌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이 충돌 속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소원을 포기시키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의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두아디라 교회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칭찬했으니까 우리도 서로 사랑하고 더 잘 믿고 서로 섬기고 인내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행해서 아무리 사랑하라고 다그치고 믿으라고 애원하고 섬기고 인내하자고 졸졸 따라 다니면서 외친다고 해도 그 말처럼 사랑하고 인내하고 섬길 사람이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그럴 자질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다고 하신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것을 아시고 예수님의 것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교회는 인간의 것을 내어놓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을 내어놓게 되어 있습니다. 즉 도저히 사랑 받을 수 없고 저주와 멸망 속에 처해져야 마땅한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하심 때문에 생명 안에 거하고 산 자가 되었음을 고백할 때, 그것이 곧 주님의 것을 주님께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로 인해서 하늘의 영광에 앉은 자가 되었음을 아는 자일 때, 교회가 적고 크고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고, 잘살고 못살고 관심을 안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얻은 자인데, 그렇다면 세상것 때문에 아옹다옹하고 비교하고 시기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세상의 그 무엇보다 큰 것을 이미 얻은 자인데 세상이 보기에 작은 자로 산다고 해서 자존심 상해하고 낙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바로 이러한 영광을 아는 자가 누구인가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20절을 보면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한 것을 책망합니다. 이세벨은 신자들을 꾀어서 행음하게 하고 우상 제물을 먹게 했습니다. 그리고 회개할 기회를 주었는데도 회개치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광을 말하면서도 영광을 아는 자로 살아가지 못하는 교회의 현실입니다.



요즘 신자들의 문제점은 천국을 말하고 예수님을 말하고 생명을 말하지만, 정작 그 모든 것이 신자들의 마음속에 확고하게 자리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합 3:17-18절을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두가지의 기쁨을 서로 대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로 인한 기쁨이고, 또 하나는 무화과 열매가 무성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풍성하고 감람나무의 소출이 많고 외양간에 소가 가득한 기쁨입니다. 어느 기쁨이 더 크냐는 것입니다. 작은 기쁨은 큰 기쁨에 의해서 밀려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만약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보다 세상의 소출이 풍성한 것이 더 큰 기쁨이라면 그 사람에게 구원의 하나님은 헛되고 무의미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이 더 큰 기쁨으로 자리한다면 하박국서의 말씀대로 소출이 있고 없고에 상관없이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시 4:7절을 봐도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도 주님으로부터 온 기쁨과 곡식과 포도주의 풍성으로 인한 기쁨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만약 곡식의 풍성함이 더 큰 기쁨이라면 이들은 곡식의 풍성함과 소출이 가득한 기쁨을 위해서는 언제라도 하나님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가치 없거나 적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은 포기하게 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가치 있는 것에 눈을 돌리고 관심을 두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그리스도가 얼마나 가치 있는 분으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슥 10:7-8절에 “에브라임이 용사 같아서 포도주를 마심같이 마음이 즐거울 것이요 그 자손은 보고 기뻐하며 여호와를 인하여 마음에 즐거워하리라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 불어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같이 번성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휘파람을 불어서 자기 백성을 불러모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불러 모은 이스라엘은 하나님 말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소유물이 있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에게 소유 당한 것을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불러모으신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으로 기뻐하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소유하신 것으로 기뻐하십니까 아니면 세상의 것을 소유하는 것으로 기뻐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소유하셨다는 것은 세상 복에 대한 보장이 아니라, 천국에 대한 확고함입니다. 그런데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천국에 대한 가치가 희미하고 불확실한 마음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뭔가 확실하고 눈에 뚜렷하게 보이는 세상 것에 더 가치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천국이 가치 있음을 모르고 귀함을 모르는 것입니다. 마 13:44절에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천국에 대한 비유입니다. 흔히 이 말씀을 설교하기를 ‘우리는 우리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천국을 소유하자’라고 말하지만, 천국을 위해서 자기 소유를 다 판 사람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천국의 가치보다 내 소유를 더 가치 있게 보기 때문입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천국보다 더 가치 있게 보여지는데, 누가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천국을 사려고 하겠습니까? 보화가 밭에 감추어져 있고 또 그것을 목격을 했다고 해도 보화를 보화로 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 보화를 보화로 볼 수 있는 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화 때문에 자기 소유를 다 파셨습니다. 그래서 마 13장에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밭을 산 사람은 우리보고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보화를 보화로 볼 수 있는 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포기하심으로서 천국이 얼마나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인가를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들도 나처럼 세상의 소유를 버리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은 자기 소유를 다 버려도 좋을 만큼 가치 있고 귀하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는 세상 소유를 버리기 위해서 애를 쓰는 사람이 아니고, 착한 일을 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도 아니고 다만 천국이란 내 소유의 모든 것과 바꿔도 좋을 만큼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때 자기 소유에 붙들려서 허덕이고 불안해하고 안타까워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 얼마나 헛된 것이고 십자가와 상관이 없는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을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받기 위해서, 좀더 나은 신자가 되기 위해서 잘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구원받은 자의 입장으로 사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자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긋한 것이 있겠습니까? 뭔가에 눌림을 당하고, 불안하고,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이 아니라 꽉 채워져서 더 이상 채워야 할 것이 없는 자로 세상을 사는 것처럼 홀가분한 것이 있겠습니까?



구원받은 자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못했다고 주눅들 것 없고, 잘한 것이 있다고 해서 고개 쳐들 것도 없이 잘하면 못한 것 잘한 것이 없이 현재 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며 감사하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유를 얻은 자의 모습이고, 이 자유는 분명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과 은총을 아는 자에게서만 보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자의 입장은 산다는 것은, 2:7절에서 말한 대로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은 자로 사는 것이고, 10절에 생명의 면류관을 받은 자로 사는 것이고, 17절에 속에 만나가 있고 흰 돌이 있는 자로 사는 것이고, 27절에 철장을 가지고 질그릇을 깨뜨린 입장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으로 산다면 이세벨의 꼬임도 악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자들의 문제는 악한 것을 악한 것으로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악한 것을 선한 것으로 선한 것을 나에게 해를 주는 악한 것으로 판단해 버립니다. 그 이유는 선악기준이 자기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좋은 것은 무조건 선한 것이고 나에게 해가 되는 것은 악한 것으로 판단하는 아담의 시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세벨의 꾀임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세벨의 꾀임이란 모두가 인간을 좋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발람의 교훈이며 이세벨의 꾀임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인간을 좋게 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삽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모르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를 안다면 그리스도를 좋게 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좋게 하는 것은 악으로 보게 됩니다. 인간을 좋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빌라도가 유대인을 좋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죄없는 줄을 알면서 죄없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2계명을 보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볼 때 우상이란 자기를 위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세벨이 이스라엘을 행음하게 하고 우상을 섬기게 했다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도록 꾀였다는 것이 됩니다.



인간을 좋게 하는 것을 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을 좋게 하는 가르침을 악한 것으로 구분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무조건 인간을 좋게 해주기 위한 말씀이고 하나님도 역시 인간을 좋게 해주기 위해서 존재하신 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을 인용해서 인간의 복지를 말하고 인간에게 주어질 혜택을 가르칠 때 쌍수를 들어 환경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악한 것을 악한 것으로 볼 시각이 없기 때문에 21절에서 말한 대로 회개할 기회를 줘도 회개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이고 멸망 받을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할 피조물이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곧 멸망과 심판의 이유인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등장하는 참된 주님의 교회는 누구이겠습니까? 그들은 자기를 위해서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책망과 징계 앞에서 자기 죄를 알고 회개하면서 주님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로서 살기를 원하는 자들입니다.



세상이 심판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 살면서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를 나와도 나를 위해서, 헌금을 해도 나를 위해서, 기도를 해도 나를 위해서 하는 것, 이것이 인간의 악함과 더러움을 보여주는 것들이고 하나님은 더러운 것을 모조리 청소해버리실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합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편지를 보낸 예수님을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는 분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8절에서도 예수님을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말합니다. 우리의 뜻과 마음이 무엇을 향해 있는가를 살피시는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뜻과 마음이 무엇을 향해있습니까? 더러운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더러울 수밖에 없고 악한 행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더러운 인간을 그리스도의 피가 깨끗케 했다는 것을 안다면 그는 구원받은 자의 입장에서 사는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시 2:9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고자하는 것을 깨뜨리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를 위해서 살고,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고 하는 세상은 마지막 때 주님에 의해서 깨뜨려질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를 위해서 산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주님을 아는 신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생명이 유지되고 주님의 피 때문에 산 자가 되었음을 알기에 지금의 인생을 덤으로 사는 인생으로 보게 됩니다.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인생이 되어라고 하나님이 덤으로 주신 인생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만 살아가는 세상은 심판 받고 깨어질 것을 바라보면서, 자기를 위해서 살고자 힘쓰는 자신을 치면서 그리스도를 바라볼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로 살아갈 수 있는 자는 철장으로 세상을 깨뜨리는 입장에서 사는 자입니다. 깨어질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를 안다면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삶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습니다. 때문에 세상에서는 얼마든지 낮아질 수 있고 비천에 처할 수도 있고 가난한 자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이미 얻은 자이고 승리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당당함과 넉넉함과 자유함이 여러분의 것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