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3:14-22 라오디게아 교회



한국에 기독교인 수가 천만이니 천 이 백만이니 하면서 교회 세력을 과시하려고 하지만, 예수님 편에서 한국교회를 진단한다면 교회마다 예수 부재 현상을 낳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인은 있으나 예수가 없는 교회가 만연한 것입니다. 아예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교회로 모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물론 교회마다 예수는 부릅니다. 그러나 교회가 부르는 예수는 기적을 일으키고 인간의 부탁과 소망을 접수하는 예수이지 십자가에 양손이 못 박혀 피흘리며 매달려있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일년에 한번 고난 주일에 애통해 하는 척 할 뿐, 고난주일이 지나고 나면 또 다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를 복 주는 예수님을 부릅니다. 


지금 이 시간 여러분에게 필요한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보다는 여러분의 사업을 잘되게 해주고, 자식들 세상에서 성공하도록 도와주고, 병 낫도록 기적을 일으켜 주는 예수님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닙니까? 사실 육신에 매어 사는 인간에게는 십자가 지신 예수님보다는 복주는 예수님이 더 반갑고 매력 있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의 현장에 무슨 재미가 있습니까? 재미는 복이 주어진 현장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자연히 십자가에 대해서는 고개를 돌리게 되고, 반대로 세상에 대해서는 더욱 더 집착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천국을 말하니 하나님 보시기에 기가 찰 노릇입니다. 


천국은 십자가에서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를 모르는 자들에게는 막혀 있습니다. 십자가를 말하고, 나는 죄인임을 고백한다고 해서 피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를 아는 자는 자신의 죄를 아는 자입니다. 그리고 죄를 알게 하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왜 신자가 교회에 가치를 두면 안됩니까? 그것은 우리의 죄를 알게 하고 죄를 알게 함으로서 자기를 부인하게 하는 능력의 출처가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인간의 모든 도덕과 윤리를 총동원해서 교회를 아름답고 이상적인 모습으로 만들어 놨다고 해도, 그 교회가 사람들의 죄를 드러내고 죄를 알게 하고 자기를 부인하게 하는 능력의 출처는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세상 죄의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 죄의 정체를 우리 앞에 펼쳐 놓음으로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만 의지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죄인된 인간에게는 오직 그리스도가 필요할 뿐이고,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가치 있는 분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예수님의 피를 유일한 가치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필요하다는 고백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아닌 달리 필요한 것이 있고 가치 있게 여겨지는 것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을 이용해서 다른 가치 있는 것을 확보하고자 애쓸 뿐입니다. 


신자는 천국이라는 문제 하나 때문에 교회로 모인 것이지, 교회 하나 만들어서 잘 키워보자고 모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만큼은 항상 여러분의 마음에 분명한 기준으로 세워져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신목사 저 사람은 오직 예수 전하는 것만 관심 있지 교회에는 관심 없는 사람이다'고 단정하고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저 역시 여러분을 '오직 예수님에게만 관심 두고 나온 신자'로 단정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관심 두고 얘기해야 할 것은 오직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고 십자가에 고개를 돌리지 않는 것은, 인간이란 존재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으로 배를 채우려고 하고, 세상 것이 채워지면 그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필요로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현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쓴 편지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그 행위가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다고 말씀합니다. 15,16절을 보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미지근하다는 것은 흔히 이해하는 것처럼 행동의 열심 여부를 표현하는 말이 아닙니다. 


보통 행동에 열심이 있는 사람을 '신앙이 뜨겁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전혀 행동이 없는 자를 가리켜서 냉랭하다, 신앙이 차갑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열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중간 상태를 미지근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미지근하다는 것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로서 예수님만 내 소망이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빙자해서 자신이 원하는 다른 혜택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지근한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은 토해서 내친다고 말합니다. 미지근한 상태는 입으로는 예수를 말하지만 예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세상 것으로 배불렀기 때문입니다. 


17절에 보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라오디게아의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 부요하다고 여겼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모든 면에서 풍족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에 피흘리신 예수님이 필요할 리가 없습니다. 배부름으로 자기를 과시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곤고함과 가련함과 벌거벗음과 눈먼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이란 존재가 비참하기 때문입니다. 가련하고 곤고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상태가 인간입니다. 아무리 세상 것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둘러싼다고 해도, 인간은 비참함과 멸망에 빠져야 할 곤고한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소경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곤고함과 가련함을 가려주는 분이 바로 예수님인데, 자기의 실체를 깨닫지를 못한다면 예수님을 필요로 하겠습니까? 예수님 쪽에서 아무리 '너는 가련한 존재야 너는 소경이야'라고 외친다고 해도 '아닙니다 나는 착한 일도 많이 하고 교회도 이렇게 부흥을 시켰는데 내가 왜 가련하고 부끄럽고 눈먼 존재입니까?'라고 반발할 뿐입니다.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잘사는 교회였습니다. 때문에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교회를 과시했습니다. 교회가 자랑거리고, 스스로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잘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예수님 쪽으로 나갈 이유가 없고 예수님을 의지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인간의 수치를 가려줍니다. 곤고하고 가련하고 눈먼 인간을 하늘나라의 영광스런 신자로 만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피는 자신의 수치를 아는 자에게만 필요합니다. 그들만이 예수님의 피를 향해서 나아올 뿐이지, 자신의 수치를 보지 못한 자는 절대로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배부름으로 인해서 자신의 수치를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곤고함과 가련함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서 나갈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향해서 문을 열지 않는 것입니다. 


20절에서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하는데, 이 말은 세상에서 배부르게 사는 것을 최고로 여기는 자들에게서 예수님은 이미 쫓겨나 있는 상태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다고 말씀하지만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자가 누구이며 다가와서 문을 열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자기 배부름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희생을 말하고 섬김을 말하고 세상을 포기하고 하늘만을 바라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리가 있습니까? 그 어떤 인간도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자가 없고, 스스로 예수님께 다가갈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인간으로 하여금 문을 열기를 촉구하는 말씀으로 해석을 해버립니다. 우리가 문을 안열어서 예수님이 못들어오는 것이니까 문을 열어서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선교단체에서 전도할 때 이 문구를 많이 인용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마음 문을 두드립니다 마음 문을 여시고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라는 말로서 예수님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지만, 인간에게는 스스로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자질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그런 말이 얼마나 허구적인 말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인간 스스로 마음을 열 수 있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다면 구원의 주체가 누구입니까? 결국 인간 스스로 생명을 천국을 택할 수도 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됩니다. 결국 예수님은 천국이라는 것을 손에 들고 인간에게 찾아와서 그 마음 문을 두드리면서 '제발 내가 들고 있는 천국을 받아 달라'고 사정하는 꼴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예수님과 인간 사이에 무슨 은혜가 있고 은총이 있습니까? 그저 내 하기 나름이지 않겠습니까?


20절의 말씀은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서 쫓겨난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배부름을 위해서 사는 인간에 의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쫓겨나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향해서 과연 누가 고개를 돌리고 문을 열 수 있겠습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 배부름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는 자입니다. 하늘의 생명을 보게 됨으로서 배부름과 풍요와 세상의 것을 누리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이고 쓰레기 같은 것인가를 안 자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에게 고개를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문을 연다는 것은 '나는 주님과 함께 죽겠습니다'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 것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가치 있는 분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세상 것에 미련을 버릴 수가 있고 주님에게 모든 인생을 맡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을 열고 주님이 나에게로 들어와 있는 상태입니다. 


입으로 '주여'를 삼창한다고 해서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입으로 주여주여 하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세상을 향한 우리의 바램과 욕망과 노력들이 모두가 헛된 것이고 쓸데없는 것임을 알게 되고 가장 헛되지 않은 예수님만 의지하고 살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것으로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이 산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예수 없는 내 인생은 비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오직 주님 한분 바라보기 위해서 나오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을 영접한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대로 우리는 모두가 세상에서 배부르게 사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 인간들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배부르게 믿는 것을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세상일이 잘 되어가고, 좋은 것을 많이 소유한 상태에서 예수를 믿고 살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아닙니까? 내가 믿음이 없는 것은 한순간의 자책으로 지나쳐 버리면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남들보다 가지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에는 아쉬워하고 애통해 했던 우리들이 아닙니까? 남들보다 못사는 것을 부끄러움으로 여기고 비참함으로 여겼기에 우리를 부끄럽지 않게 해주고 당당하고 힘있게 살게 해주는 것은 역시 돈이고 권력이라는 생각에서 떠나보지 못했던 우리가 아닙니까? 그런 우리들이 어떻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문을 열어라'는 말씀은 우리의 결단이나 행동을 촉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쪽에서 문을 여는 자로 만들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란 예수님이 나에게 해주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18절에서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시는데, 이렇게 하면 구원해 준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로 인해서 이미 영광스러움에 들어있는 자는 바로 이런 자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에게서 이런 혜택을 받은 사람이다는 것입니다. 


금을 사고 흰 옷을 사고 안약을 사라는 말씀 역시 이것들을 사면 구원해준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쪽에서 우리에게 제공해준 혜택이라는 것입니다. 그 혜택을 알고 그것을 최고의 복으로 인정하는 것이 곧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쪽에서 어떤 대가를 지불함으로서 금과 흰 옷과 안약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서 그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알고 그것을 나의 최고의 복으로 인정하는 것, 이것이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은, 신자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복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인데 복을 받은 자답게 복에 합당하게 살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주신 복이 무엇입니까? 19절에 보면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고 징계하고 회개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복이며, 이 복을 아는 신자는 우리를 징계하시고 책망하시고 회개하게 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아멘'하게 됩니다. 


우린 세상에서 어려움이 닥치면 무조건 힘든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을 원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 편에서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보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고 살게 하기 위해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유일한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묻고 회개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시는 일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이 주신 복을 아는 자는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아멘 하게 되는 것입니다. 


14절에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를 보낸 주님에 대해서 이르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기 위해서 일하시며 하늘을 증거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는 모든 일은 '아멘'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징계하시고 책망하신다면, 그것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시고 우리의 가련한 것과 벌거벗은 것과 곤고함을 알게 하셔서 회개하게 하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며 은혜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삽니다. 세상 것으로 배부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크고 교인수가 많으면 그것으로 자기 능력을 삼고 자랑을 여기기 때문에 곤고함과 가련함을 보지 못합니다. 교회가 적은 것을 부끄러움으로 여기기 때문에 진짜 부끄러운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지 못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는 부요하다고 했지만, 예수님 보시기에는 벌거벗었고 가련하고 곤고하고 가난하고 눈 먼 상태였습니다. 그것이 곧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실체를 보지 못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가련하고 곤고하고 가난하고 눈 먼 존재인가를 보지 못합니다. 돈 있고 집 있고 자식 있고 직장이 있어서 잘 살고 있으니까 자신을 가련하고 곤고한 존재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세상에 빠져 있기 때문에 세상 것을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그 자체가 곤고하고 가련한 모습인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린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던 우리를 부끄럽게 하시고, 내가 곧 가난하고 곤고하고 가련하고 보지 못한 눈 먼 소경이었음을 알게 하십니다. 그럴 때 나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 재물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라는 것을 고백하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곧 문을 연 신자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혜택입니다. 그래서 복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오늘 우리가 과연 무엇을 필요로 하고 살아가는지를 다시 점검하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만 필요하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한번 내 마음을 들여다보니 역시 돈을 떠나 살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실체를 발견할 것입니다. 천국만 있으면 된다는 마음인줄 알았는데, 돈이 없다는 것 때문에 남들처럼 풍족하게 살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불평하고 원망했던 실체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참으로 가련하고 곤고한 우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다시 한번 나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것이 나를 부요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를 부요하게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이미 영광스러움에 든 신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가십니다. 신자는 예수님을 안다는 것으로 부요한 자입니다. 그래서 세상 것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영광에 합당한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