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4:1-4 열린 하늘문



오늘날의 기독교는 십자가를 말하되 십자가를 너무 가볍게 처리하고 있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는 십자가'. 믿는다는 말만 하면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님의 피가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서 천국에 보내준다는 것이 오늘날 교회인들이 생각하는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신이 되어서 죄악의 땅에 오시고 인간에 의해서 피흘리고 죽으신 모든 일들을 단지 '하나님의 인간 구출작전'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본질보다는 십자가의 기능에 초점을 두고 있는 종교인의 모습입니다. 


개중에 어떤 교회인은 십자가 은총의 혜택을 입은 자로서의 의무를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으니까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행함을 주장합니다. 착한 행동, 선한 행동, 사랑의 행동, 이러한 행함이 없고서는 십자가에서 주어진 예수님의 은총을 입은 자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교회인은 아예 십자가와는 전혀 상관없이 다만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스스로 예수님을 믿는 신자로 착각해 버립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의무를 생각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을 들여다보면 소위 복음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의 여러 활동을 볼 수 있습니다. 무슨 기독교문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하고, 청소년 문화, 대학 문화를 운운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기독교 문화가 세상에 자리잡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복음을 아는 자가 해야 할 운동이고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문화라는 것을 선한 기독교 문화와 악한 세상 문화로 구분해서 기독교 문화가 세상에 널리 퍼져 가는 것을 그리스도의 승리로 여깁니다. 복음이 확산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기독교 문화가 확산될수록 입가에는 희열의 미소가 떠오릅니다. 승리했다는 기쁨일 것입니다. 기독교 문화가 확산되는 것이 곧 복음이 확산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십자가의 본질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기독교 문화라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있다면 단지 교회 냄새를 풍기는 교회 문화이고 종교 문화 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이 소위 말하는 세상 문화와 구분되는 것도 아닙니다. 랩을 부르며 요란한 악기 소리에 광란하듯 춤을 추는 모습이나, 소위 가스펠 송이라는 것을 요란한 악기 소리에 맞춰서 손뼉을 치고 춤을 추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누구나 좋아하는 취향에 단지 가스펠 송이라는 옷을 입혀 놨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기독교 문화라는 명목아래 정당성을 부여하고 세상 문화라는 것에서부터의 구별을 주장하는 것은 십자가의 본질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결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선한 문화, 기독교 문화, 가정 사역, 이런 것들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기독교 문화를 외치고, 가정 사역을 외치고, 선한 행동들을 말하고 있는 것은 결국 세상 속에 기독교인으로서의 자기 자리를 확고하게 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 속에 기독교라는 자기 종교가 모든 종교보다 우위를 차지함으로서 종교적 우월감을 과시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본질은 죽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임과 동시에 나의 죽음입니다. 죽음 안에 '나의 삶'이란 없습니다. 자기를 위한 삶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죽음입니다. 자기 발전, 자기 확장, 자기 극복도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참된 성도들을 통해서 세상은 그리스도의 증거를 보게 되는 것이지 선한 문화, 기독교 문화, 교회의 사회 운동, 이런 것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증거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고전 2:2절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곧 십자가의 본질을 알게 된 참된 성도의 고백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알게 된 기쁨에 의해서 자신이 정복당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게 된 기쁨이 자신을 차지했기에 다른 것을 기쁨으로 여기지도 않게 되고, 자기 행동을 통해서 기쁨을 성취하려고도 하지 않게 됩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알게 된 기쁨이 자신을 행동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만들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만 알면 됐지 공부할 필요도 없고 돈 벌 필요도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게 된 후부터는 공부해서 성공하는 것이 목적도 아니고 관심도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증거 되는 것을 목적으로 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면서도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드러나는 것인가에 관심 둔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십자가로 모아지는 것, 이것이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사도 바울의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의 계시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의 본질이 아닌 기능에 관심을 두거나, 십자가를 믿는 자로서의 자기 의무나 할 일에 관심을 두고 성경을 대하기 때문에 계시가 엉망이 되버리고 엉터리 성경 해석이 진리인양 전파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 등장하는 이적이나 어떤 신앙인들의 체험과 경험들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수단이고 도구들입니다. 그런데 관심을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에게 두고 있고, 기독교라는 종교에 두고 있다 보니까 성경에 등장하는 신앙인의 체험과 경험들이 계시가 되어 버립니다. 즉 그들의 체험과 경험을 현실적으로 정당히 해석해서 '우리도 이렇게 하자'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삶은 없다'라는 자기 죽음 안에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기 삶의 확보라는 욕망 안에서 성경을 보기 때문에 과거에 복받은 신앙인의 행위가 계시가 되어서 그 행위를 본받으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도 자기 삶의 확보라는 욕망에서 성경을 보기 때문에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여겨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마음에 두지 않고 있는 인간들이 사단의 생각을 따라서 성경을 해석하는 결과입니다. 


신자란 한마디로 말해서 십자가에 목숨 건 사람입니다. 이 각오가 없다면 그분은 신자라고 하기에 곤란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자기 백성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죄악된 모습들, 십자가에 관심 없는 삯군 목자들이 판을 치고, 종교에 지나지 않는 교회가 난무하는 것을 묵인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속에서만이 '자기 백성'이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도 역시 교회 아닌 교회 속에서 드러나는 참된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를 말씀한다고 했습니다. 일곱 교회에서 칭찬들은 모습을 모아 놓은 것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이고, 책망들은 모습들을 모아 놓은 것이 교회 아닌 세상의 모습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22장까지의 말씀은 참된 교회, 즉 생명책에 기록된 성도의 구원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가를 말하고, 교회가 아닌 것, 즉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의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이것을 보지 않고 살아갑니다. 성경을 볼 때 오로지 자기 삶에 관심을 두고 보기 때문에 지금 하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세상에 들이닥칠 일이 무엇인지에 도무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자기 삶이 평안하고 신자라는 이름에 벗어나지 않게만 살아가면 그것으로 다된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얼마전 홍수로 인해서 죽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산사태가 나서 흙이 집을 덮쳐서 죽은 사람도 있고, 물이 불어나는 줄도 모르고 놀다가 불어난 물에 휩쓸려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지금 나에게 무엇이 덮쳐오고 있는 줄을 모른 채 단지 세상에서 노는 것에 즐거워하고 정신 팔려 살고 있는 모습일 수 있습니다. 흙더미가 덮쳐오고 물이 덮치는 상황이라면 빨리 그 자리를 피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기독교문화니 남북 통일이니 교회 부흥을 떠들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1절에 보면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고 말씀합니다. 


'이 일 후에'라는 것은 예수님이 일곱 교회에 편지를 쓴 후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은 시간 개념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처음에 시작하면서 요한계시록은 역사적 개념이 아니라 묵시적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시간을 초월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들은 시간적 개념, 즉 사건이 발생한 역사적인 순서대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6장에 보면 일곱 인을 떼는 사건이 나오고 8장에서는 일곱 째 인을 뗄 때 나팔 재앙이 일어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일곱째 인을 떼니까 다음에 나팔 재앙이 일어났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쉽게 말하면 '양파 껍질 벗기기'입니다. 사건을 순서대로 나열해서 가장 마지막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양파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감으로서 점차 속의 실체가 드러난 것처럼 세상의 실체를 점차 드러내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사건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 '이 일 후에'라고 말하는 것도 일의 순서로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적 개념을 가지고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요한계시록에 대한 긴장감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예수님이 재림할 때 일어날 일로만 여기기 때문에 아직 재림이 없는 상황에서 요한계시록의 내용들은 지금과는 상관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현실이 아니라 미래의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긴장감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사람들로 하여금 긴장감이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에 보면 '열 처녀 비유'가 있습니다.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 열 처녀가 등불을 들고 나갔는데 다섯 처녀는 신랑이 늦게 올 것을 대비해서 기름을 준비했고, 다섯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기름을 준비한 것과 준비하지 않은 것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만약 신랑이 늦게 오면 그때 준비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즉 신랑이 늦게 와서 기름이 떨어진 것을 나중의 일로 여겼습니다. 이것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의 모습입니다. 기름이 떨어지면 그때 준비해도 된다는 것이 그들이 생각할 때는 지혜로운 것이고 현명한 판단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늘의 시각에서 볼 때는 미련한 것이고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심판을 말해도 느긋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그때 가서 준비하면 된다'는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지금의 일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결국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는 나중의 일을 지금의 일로 여긴 모습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나중 일을 지금의 일로 여긴다는 것은, 시간 개념을 초월한 사고방식입니다. 심판, 재림을 시간 개념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나중에 준비해도 되겠지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고, 그 생각이 바로 천국에 가지 못할 자의 사고방식입니다. 


지금 당장 나에게 물이 덮쳐 오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 이순간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가 분명해집니다. 그 자리를 피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오늘밤에 죽어도 낙원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삶을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삶으로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신자란 세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이 자신에게 생명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생명이 아니고 세상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 아님을 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세상보다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의 자세입니다. 


신자란 물 속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 허우적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물 속에서 빠져 나온 자로 삽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구원을 위한 책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미 심판의 자리를 빠져 나와서 심판의 자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빠져 나온 자로서 왜 세상이 망해야 하는가를 선포하는 것이 신자의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빠져 나온 것이 신자라면 지금 신자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하늘에 있는 자입니다. 몸이 하늘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이미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하늘에 열린 문이 있어 요한을 올라오게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되어질 일을 보여줍니다. 결국 요한은 하늘에 앉아서 세상에 되어질 일을 느긋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늘에 앉아 세상을 사는 신자입니다. 이러한 말들이 십자가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자에게는 허황된 말로 들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현실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엡 2:5,6절에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는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하늘에 앉히움을 받았습니다. 이 은혜를 아는 자에게는 세상이 현실이 아니라 하늘에 앉아 있는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요한은 하늘에서 보좌에 앉으신 분을 봤습니다. 그 모습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무지개가 보좌를 둘렀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다고 합니다. 이러한 요한의 체험을 우리가 부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우리가 체험할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차 우리가 하늘에서 체험할 것을 미리 보고 사니까 세상이 시시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살고 싶습니까? 계 22:1-3절에 보면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생명책이 기록된 성도가 누릴 복된 나라입니다. 생명수 강가에 생명나무 열매가 줄줄이 늘어서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몰골이 초라하다고 해도 죽어서 천국에 가게 되면 말할 수 없는 영광으로 옷입게 됩니다. 이것을 미리 보고 사는 신자라고 할 때, 그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한낱 꿈에 지나지 않고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모든 것을 누릴 것임을 알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만 따르고 섬기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신자가 어떻게 십자가 외의 것을 목적으로 하고 살아가겠습니까? 


여러분이 세상에서 갖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시시해 보이는 것들에는 마음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신자가 세상에서 마음을 돌릴 수 없는 것은 세상에 있는 것이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마음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난 우리들이 세상과 결별한 삶을 살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세상의 것이 좋아 보일 때 천국을 생각하십시오. 하늘의 것, 하늘의 영광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의 것이 하늘의 영광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영광의 나라로 인도한다는 것을 안다면 그순간이라도 세상이 시시해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귀하고 가치 있음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하늘에 열린 문이 있고 요한에게 하늘로 올라오기를 허락했다는 것은 요한에게는 하늘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했다는 것입니다. 요한에게만 하늘 문이 열린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향해 하늘 문이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마음대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지성소와 세상의 구별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세상 전체가 지성소가 된 것입니다. 세상 전체가 하나님의 지성소라는 것은 이제 세상에서 누구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 자는 죽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제사장이라고 할지라도 지성소에서 자기 마음대로 행동했을 때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성소가 된 이 세상은 이제 누구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자는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늘 문이 열렸다는 것은 하늘의 영광이 세상을 심판한다는 뜻입니다. 하늘과 땅의 구별이 없어진 것입니다. 결국 하늘의 영광을 아는 자는 천국이지만 영광을 모르는 자는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이 하늘에서 영광을 보게 되고 그 영광의 나라에서 세상을 볼 때 세상 실체가 어떠한가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늘 문은 열려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늘의 영광이 어떠함을 압니다. 하늘의 영광을 알기 때문에 세상의 죄가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심판의 장소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물이 덮치고 흙더미가 덮치고 있는 것이 세상의 본 모습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보고 산다면, 옆에서 아무리 돈을 자랑하고 좋은 집에서 좋은 차 굴리면서 살아간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이 시시하게 보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세상일이 잘되든 안되든 괜찮은 것입니다. 돈이 있든 없든 괜찮은 것입니다. 이미 그리스도로 그 마음이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하늘 문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열려 있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영광을 아는 자입니다. 이미 말할 수 없는 큰 것을 가졌고 알고 있기에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하늘에서 누릴 영광이 얼마나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시고 그 영광된 것으로 인해서 세상은 시시하게 보여지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여러분의 마음에 귀하고 가치 있고 생명된 것으로 남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