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5:6-7 어린양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세상 속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있기를 바라는 욕망으로 살아갑니다. 타인이 자신의 의지에 굴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타인의 의지에 굴복하는 것은 수치로 여깁니다. 그래서 타인을 자신의 의지에 굴복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것을 '고집'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이 '고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굽히지 않으려는 자기 의지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합리적이고 유익된 것인가를 따지기보다는 '왜 내 의견에 따라주지 않느냐?'는 불평과 도전 속에서 언제나 자신이 중심적인 위치에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자아는 인간이 모여있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라도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가정에서도 각자 자신의 자아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자기 고집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가족이 자기 의견에 따라주고 자기 성격에 맞춰주기를 바라는 자아가 살아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이 권력과 힘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의견을 고집하며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어쨌든 꺾여지고 굴복 당하는 자아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꺾여지고 굴복 당하는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권력과 힘입니다. 즉 인간의 자아가 함께 모였을 때, 어떤 자아를 중심으로 모여지느냐는 것은 누가 힘이 있고 권력이 있느냐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에게도 자아가 있고 자기 고집이 있고 의견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나보다 더 강한 힘과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 앞에서는 자신의 자아를 고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가난한 사람이 돈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자아를 고집할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모여있는 집단의 구조입니다.

앞에서 잠깐 가정의 얘기를 했지만, 가정도 역시 마찬가지로 힘의 구조로 형성이 되어 있습니다. 특히 한국 사회는 옛날부터 가부장적인 문화 속에서 가정이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힘의 구조가 더욱 깊이 형성이 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흔히 아버지를 '가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정은 이 아버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아버지의 말이 중심이고 법과 같은 권력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가정을 자신의 자아 속에 굴복시키려고 합니다. 아내나 자식 모두가 자신의 자아 속에서 자기를 중심으로 자기를 위해서 존재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내도 가장인 자기를 위해서 존재해주기를 바라고, 자식들도 아버지인 자신을 위해서 존재해주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위해서 공부를 잘해주기를 바라고, 자신을 위해서 사회에서 성공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결국 아내나 자식의 자아는 아버지라는 권력 앞에서 굴복 당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권력에 도전하고 자신의 자아를 고집할 때 결국 자아와 자아의 충돌이 발생하게 되고, 누구 하나 자신의 자아를 포기하지 않고 굽히지 않을 때 부부는 '이혼'이라는 극한 상황까지 나아가게 되고, 자식들은 '가출'이라는 상황을 만들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혼이나 가출 이 모두는 인간의 자아 충돌의 결과이며 자신의 자아를 포기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으려는 욕망에서 나온 결과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모인 가장 최소 단위인 가정을 한 예로 들었지만, 이러한 가정의 모습은 사회의 현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을 확대시켜 놓은 것이 바로 사회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모여서 살아가는 사회 역시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권력과 힘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자아가 굴복된 채 타인의 자아에 복종해야 하는 구조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구조에서 해방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즉 권력과 힘에 의한 굴복이라는 사회 구조는 누구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인을 자신의 자아에 굴복시키고 싶은 욕망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오히려 타인의 자아에 굴복해야 한다는 것이 견딜 수 없는 수치와 모멸감으로 남게 되고 그것이 결국 스트레스라는 정신적인 피곤함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사회에서 굴복해야 하는 구조 속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가정에 오게 되면 굴복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일어나게 되고, 가정에서조차 자기 중심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권력이 있는 사람은 굴복이 없으니까 스트레스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세상의 권력은 물고 물려 있는 관계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은 재벌이라고 해도 비록 회사에서는 굴복시키는 입장이고 자기 중심으로 존재할 수 있지만, 정부에 대해서는 굴복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따라서 돈 많은 부자 역시 자신의 자아를 굴복시켜야 할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국가의 대통령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국가 안에서는 굴복해야 할 대상이 없다고 할지 몰라도, 다른 나라와의 관계 속에서는 굴복해야 할 관계가 조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람은 굴복자임과 동시에 지배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사회의 구조와 교회의 구조를 비교해 보자는 의도에서입니다. 사회는 권력과 힘에 의해서 굴복해야 하고 굴복시키는 구조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입니까? 사회가 힘이 기준이고 중심이라면, 교회는 무엇이 기준이고 중심이 되어야 합니까? 교회의 기준이요 중심은 오직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이 기준과 중심을 벗어날 때 그것은 이미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란 인간이 모인 곳이 아니라 신자가 모인 곳입니다. 인간이 모인 교회는 자아와 자아가 충돌할 수밖에 없고 서로 굴복하지 않으려는 자기 의지만 보여지지만 신자가 모인 교회에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마음과 정신만이 보여질 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항상 우리가 무엇을 기준으로 하고 모이는가를 점검하고 또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기준이요 정신은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말씀합니다. 즉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목사도 아니고 장로도 아니며 돈 있는 자도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가 교회의 중심이고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면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본문입니다. 본문 6,7절을 다시 보면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지난 시간에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오른손에 책이 있는데 그 책은 생명책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생명책에는 구원 얻을 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이름들은 이미 창세전에 예정된 이름들입니다. 구원 얻을 자의 이름이 이미 창세전에 예정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이것은 구원이란 인간의 행위와는 전혀 연관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창세전이라면 이미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입니다. 태어나기도 전이라면 우리의 행위란 아예 없었을 때를 말합니다. 이미 그 때 이름이 예정되었다면 그것은 곧 생명은 우리의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내가 착한 일을 많이 했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천국보내시겠지라든가, 교회 봉사를 많이 하고 주일을 잘 지켰으니까 복을 주시겠지라는 말들은 생명책 앞에서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책의 이름들은 우리 행위를 근거로 해서 기록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책이 봉해져 있었는데 그것을 어린양이 뗀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얘기입니다.

7절에 보면 어린양이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합니다. 예수님이 책을 취함으로서 드러나는 것은 생명책에 기록된 자기 백성들입니다. 어린양에 의해서 생명책에 기록된 자기 백성이 생산되는 것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질 분은 오직 어린양 외에는 없습니다. 즉 어린양이 죄에서 건지는 자기 백성은 그때그때 임의로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자를 자기 백성으로 여기시고 그들만 건지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건지시는 분이 세상에 오신 모습이 어린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구원의 원칙인데, 이러한 얘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에 '아 그거 잘 안다'하고 그냥 지나쳐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시비 걸어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구원 얻을 자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해 놓으셨다면 그 명단대로 그냥 구원시키면 되는 것이지 무엇 때문에 어린양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것도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이라는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일을 이루시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그러한 구원의 원칙을 통해서 인간은 그 누구도 스스로 구원 얻을 자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도 천국에 들어와서 자신의 행위를 자랑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어린양을 보내시고 죽게 하심으로서 자기 백성을 건지시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구원 얻을 자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시고, 어린양이 없이 그 이름대로 천국으로 보내셨다면 그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이 잘나서 천국에 온 것으로 착각을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흠없고 깨끗한 하늘나라가 또 다시 인간의 자기 중심과 자기 위대성에 의해서 오염되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깨끗하고 흠없는 천국을 만드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되 어린양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어린양은 이미 구약부터 등장한 존재입니다.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구약에 어린양을 제물로 등장하게 함으로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양은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 지고 피흘리고 죽은 제물입니다. 이스라엘이 제사장 앞에 나와서 어린양을 바칠 때 그들은 '이 죄없는 어린양이 내 죄를 대신 담당함으로서 나는 죄에서 용서받고 어린양은 죽는구나'라는 것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양이 흘린 피는 곧 내 죄 때문이고 어린양이 피를 흘렸기 때문에 내 죄가 용서받게 된다는 알고 어린양의 피에 감사할 때 그가 곧 참된 이스라엘로 일컬음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에 등장한 여러 가지 규례들은 어린양의 피의 정신을 알고 살아갈 때 이스라엘의 내부에서 보여져야 할 삶의 모습을 말씀한 것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진심으로 어린양의 피의 의미를 알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눈치 챈 이스라엘이라면 너희에게서는 이러한 삶의 모습들이 보여질 것이다'는 의미로 주어진 것이 규례와 법도였던 것입니다. 즉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확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참된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피에 의해서 생산되는 것이고, 오늘날 자기 백성 즉 신자 역시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생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산된 자들의 모임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신자는 교회에 의해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신자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들이 하고 있는 '제자훈련'이라는 것은 허구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제자훈련'이란 명칭 자체에 시비를 거는 것은 아닙니다. 명칭이야 어떻든 그리스도의 제자 되게 하는 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고 훈련을 통해서 숙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에 대해서 시비를 걸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어린양의 피에 의해서 생산됩니다. 교회가 교인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고 훈련시킨다고 해서 신자되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기 백성인 신자는 예수님이 찾아가시고 예수님에 의해서 생산되기 때문에 교회는 다만 예수님의 백성, 즉 어린양의 피를 의지하고 피를 따라가는 백성이 어떤 존재인가를 가르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교회를 위한 제자도 아니고 목사의 목회를 돕기 위한 제자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증인일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제자훈련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증인이 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해서 전도하는 수단 놓고 기술 있는 교인을 양성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어야 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고 봉사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없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신자란 그리스도만을 따라가는 자입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이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서 자신의 운명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십니다. 즉 죄인인 인간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서 이제 예수님은 죄없는 하나님으로서의 운명을 벗어나서 죄인된 인간의 운명에 들어왔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죄인된 인간의 운명은 사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다시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서 사망을 이긴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온 세상에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된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나는 이제 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사셨던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생만이 참이고 진실된 것이기 때문에, 거짓으로 뭉쳐져 있고 더러운 내 인생을 벗어나서 예수님의 인생 속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고백이 바로 세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해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따라가야 하는 대상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가 아니라면 그가 아무리 목사고 장로고 권사 집사라고 해도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자란 교회 출석 년수와 직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주를 따라가느냐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어린양이 책을 취했다는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어린양이 책을 취했다는 것은 어린양에 의해서 생명책에 기록된 자기 백성이 생산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린양에 의해서 자기 백성이 생산된다면 생산된 자기 백성의 모습은 어린양과 일치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신자라면 그에게서는 자연히 어린양과 일치된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을 '증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5절에 보면 어린양을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라고 말합니다. 또 6절에서는 다윗의 뿌리를 어린양이라고 하고, 이 어린양의 모습을 일곱 뿔과 일곱 눈으로 말하는데 이 눈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예수님을 이런 식으로 묘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데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는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라고 하고, 빌라델비아 교회에 쓴 편지에서는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것은 '구원은 내 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에 의해서 교회가 탄생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일은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움직여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 힘과 노력과 기술과 정성을 들고 나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것만 잊지 않는다면 인간의 방법을 동원해서 그럴듯한 교회를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 얼마나 악한 생각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모르고 있는 것은 세상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움직여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의 중심에는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절대로 내 중심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이 내 중심으로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것만 안다면, 나의 자아를 고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알 것입니다.

어린양은 세상이 흠모할 만한 모습이 아닙니다. 나약한 모습입니다. 너무나 초라하고 연약하고 서글픈 모습입니다. 세상의 권력 앞에서 짓밟힐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싫어하고 거부하는 모습입니다. 강해지기를 소망하고 힘으로서 타인의 자아까지 자신의 자아 앞에 굴복시키고자 하는 욕망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어린양이란 결코 환영할 모습이 아닙니다. 그래서 6절에서는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어린양이 생명책을 취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린양에 의해서 생산되는 자기 백성의 모습은 바로 어린양과 같이 힘없고 짓밟히는 연약한 모습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인생이란 세상에서 영광을 얻고 흠모할 만한 성공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것이 위대해지는 길이 아니라 위대하신 분, 즉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 진짜 위대한 존재로 일컬음 받는 것임을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인생입니다.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진리요 길이고 생명으로 보여지고 그 분을 따라가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 기도하고 주님을 찾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자의 위대한 인생입니다. 비록 세상은 위대한 인생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위대한 인생으로 인정하시고 참된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정한 위대함이 무엇임을 알고 있는 신자가 세상의 위대함과 힘을 위해서 살겠습니까? 오히려 세상의 힘과 권력에 의해서 어린양이 희생되었음을 알고 힘을 미워할 것입니다. 그럴 때 자기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 자기 중심으로 살고자 하고 자신의 자아에 타인의 자아를 굴복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곧 예수님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그러한 자신의 자아까지 주님께 맡기면서 십자가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세상 일이 내 중심으로 되어지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내 생각대로 되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불평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린 단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모든 일이 되어지고 있는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신자는 오직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와 더불어 새롭게 출발된 우리 인생입니다. 예수님과 똑같은 환경을 살아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그 마음 그 정신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에게서는 나를 고집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고집하는 모습이 보여질 것입니다. 이것이 어린양에 의해서 생산된 신자의 위대한 인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