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6:1-2 첫째 인

계 10:10절에 보면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고 말합니다. 말씀이 입에서는 달지만 먹은 후에 배에 들어가면 쓰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이 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말씀을 입에만 두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말씀이란 먹고 난 뒤에는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를 몸에 져야 할 운명으로 뒤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먹기보다는 단지 입에만 굴리면서 '달다'라고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나타내는 현상을 몸에 지기를 싫어하면서도 말씀이 좋다고 외치고 말씀을 달다고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의 현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특정 건물 안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 계셨습니다. 말씀 안에서 인간들을 만나셨던 것입니다. 선지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선지자들은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보여준다는 것을 쉽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보여준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선지자의 몸으로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알아야 언약궤를 중심으로 한 삶이 될 것이고, 언약궤를 중심으로 하는 삶이 곧 하나님을 아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선지자란 백성들의 죄 때문에 고생하는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인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인자라고 말씀하는 것도 백성들의 죄 때문에 고생하는 선지자란 입장에서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자들이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단순히 예수님을 믿어서 복받고 천국 간다는 것이 믿음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이 그런 정도의 것이라면 왜 말씀이 입에서는 달지만 먹으면 배에서는 쓰다고 하겠습니까? 믿음이란 말씀을 먹은 후의 현상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말씀을 먹었다는 것은 속에 말씀이 있는 자로서 말씀을 보여주는 계시적 기능의 인간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을 담당한 도구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도구로서 존재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보여주고 교회를 보여주기 위해서 오히려 말씀을 이용하는 현상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먹으면 쓰다는 반응이 아니라 말씀을 잘만 이용하면 종교적인 성공을 이룰 수 있다는 무리들 밖에 없습니다.

옛날 구약의 이스라엘이 바로 그런 현상을 나타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언약궤를 있게 하시고 율법을 주신 이유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세상에 대하여 심판과 구원을 보여주는 계시적 기능을 담당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단지 법궤가 있고 율법이 있는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우월감으로만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인해 부강한 나라 되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에 말씀이 임한 선지자가 나타남으로서 백성들의 죄를 보여줬던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죄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평강을 외쳤습니다. 말씀이 임한 선지자가 아니기 때문에 죄를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죄가 보이지 않으니 그들 눈에 이스라엘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평안한 상태로 보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말씀이 제대로 임한 현장에서는 죄가 드러나는 현상이 필연코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심판이 확실하게 확정되어지는 것이 말씀의 현장입니다. 말씀이 임하게 되면 인간의 성품이 변하고 삶이 변해서 인격과 덕목을 갖춘 신자로 성화 된다는 것은 말씀을 알지 못한 자들의 소리일 뿐입니다. 말씀이 임한 자의 현상은 무뚝뚝한 성품이 부드러운 성품으로 뒤바뀌고, 얼굴에 인자한 표정을 가지게 되고, 행동이 경건하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의 영광을 봤을 때의 현상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이것이 뒤바뀐 이사야의 모습입니다. 성품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에 대해서 바로 직시하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의 현실이 무엇입니까? 죄로 인해서 망하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죄를 아는 자는 세상이 망하는 현장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모르는 자에게 세상은 희망의 나라이고 꿈의 나라입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애쓰면 소망하고 바라는 것을 얼마든지 손에 쥘 수 있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성공하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고,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도 당연할 수밖에 없으며 교회가 교회 부흥을 위해서 기를 쓰는 것 역시 극히 당연한 교회의 본연의 모습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거짓 선지자가 교회를 향해서 외치는 것은 '평안하다'는 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죄를 모르는 자의 눈에는 교회가 극히 잘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많은 군중들이 모여드는 것도 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으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의 말씀다움도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 것으로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가장 많은 영토를 차지하고 부강했을 때는 여로보암 2세 때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가 이스라엘이 가장 타락한 시대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멸망을 싫어합니다. 자기 생명을 부여잡고 이 세상에서 내 생명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으로부터 단절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멸망에 대해서도 싫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죄라는 것을 모르니 망함을 모르는 것도 당연합니다. 이러한 세상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곧 인을 떼는 사건입니다.

6장부터 보면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인을 떼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어린양이 인을 떼었을 때 말이 등장합니다. 첫째 인을 떼었을 때 흰 말이 등장하는데 흰 말에 탄 자는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은 자이고 이기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상징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상징인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첫째 인을 떼었을 때 등장하는 흰 말을 탄 자의 모습은 그리스도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면류관을 받은 그리스도를 말하고 이긴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인을 떼었다는 것은 세상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눈에 보인 세상은 이렇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양에 의해서 발생한 성도들은 어린양과 같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양을 따라난 자가 성도이며 어린양을 따라났다면 어린양과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을 하나하나 떼는 것은 여러 종류의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첫째 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일곱을 하나하나 펼쳐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대한민국을 보여주고, 대한민국 안의 서울을 보여주고, 서울 안의 종로구를 보여주고, 이런 식으로 차근차근 접근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은 세상에 대해서 이긴자로 등장을 합니다. 이긴자로 등장하는 예수님 앞에서 드러나는 세상의 죄는 세상에서 자신이 이긴자가 되어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긴자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이긴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승리 안에서 그것을 기뻐하고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리 안에 있다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그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밀이 이긴자이신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은 내가 이긴자로 살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이긴자가 되어서 내가 승리한 기쁨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긴자로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저마다 내가 이기게 해달라고 애원을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모든 사람이 서로 이긴자가 되게 해달라면 예수님은 누구를 이기게 하시고 누구를 진자로 만드시겠습니까?

이와 같이 서로 이긴자가 되고 싶어하는 이것이 바로 이긴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죄이며 첫째 인을 떼심으로서 나타난 세상의 실체입니다. 이 세상의 모습은 이미 일곱 교회를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교회가 이긴자이신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갈 때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가를 일곱 교회가 잘 말해줬습니다. 즉 칭찬 받은 모습이 이긴자이신 예수님을 의지하는 교회이고, 책망 받은 모습이 이긴자를 의지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모습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이 있어서 나는 부요하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이 이긴자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돈을 바라보면서 '내가 이긴자다'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은 저마다 이기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세상에서의 패배는 곧 도태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세상을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버티기 위해서, 끝까지 살아남은 자 되기 위해서, 경쟁에서 이긴자 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이기지 않으면 패배자가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세상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라고 이름하는 단체에도 이런 모습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를 말하지만 이긴자로서의 예수를 알지 못한 자들의 모임은 결국 자신이 승리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모습만 드러내려고 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승리를 기뻐하고 살아가라는 말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가 이겨야 그것이 이긴 것이지 어떻게 예수님이 승리하신 것을 기뻐하고 살아가라는 것이냐고 반문합니다. 즉 내가 승리하지 않으면 승리로 여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자식으로 경쟁하고 집으로 경쟁하고 돈으로 경쟁하면서 쓸데없는 힘을 낭비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이긴자가 된다고 해도 결국 망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 세상에서 남을 자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그들이 최후의 순간에 진정한 이긴자로서 세상에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라면 세상을 살아갈 때부터 세상에서의 승리에 대해서 초월한 모습이 보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기신 그리스도를 의지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승리가 진심으로 세상을 이긴 승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세상에서 이기고 지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믿는다고 하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입니까? 이기신 예수님입니까? 여러분이 의지하는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신 분이라면 여러분은 세상에서의 이기고 지는 것에 대해서는 초월한 삶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남보다 돈을 적게 소유한 것을 패배한 인생으로 여기지만 그리스도께서 보시기에는 돈을 얼마를 소유했든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자는 실패자로 봅니다. 과연 여러분도 세상을 이러한 시각으로 보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남보다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이긴 것이 아닙니다. 공부 잘한다는 것이 심판을 피하게 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착하게 살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인정이 많고 남에게 칭찬을 듣는 삶을 산다고 해서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심판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어린양의 피를 의지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 진정한 승리자인가는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 드러나게 되어 있고, 신자는 그것을 이미 보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교회가 서로 경쟁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믿음을 가지고도 경쟁하고 종교적 삶을 가지고도 서로 경쟁합니다. 누가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지, 옆 교회보다 내가 경쟁하는 목사보다 더 많은 사람을 모아서 이기고야 말겠다는 심보로 교인에게 전도를 강조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입니다. 이런 교회가 과연 이기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이기신 분이 아니라 이기게 해주는 분으로 생각할 뿐입니다.

또한 교인들이 누가 기도를 더 많이 하는지 암암리에 경쟁을 하고, 누가 성경을 더 많이 보는지 경쟁을 합니다. 도대체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본다는 것이 심판을 이기게 할 수 없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과연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첫째 인을 떼심으로서 드러난 세상의 실체는 이기신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몽땅 자기 잘난 맛으로 자기가 승리하는 재미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이기신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기신 예수님이 있기 때문에 나는 세상에서 실패해도 괜찮고 약자가 되도 괜찮고 남들 아래에 위치한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세상의 죄를 알고 심판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판에서 견딜 수 있는 것은 오직 어린양의 피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세상에서 이기고 지는 것보다는 그리스도만 가슴속에 푸고 살아가기를 소원할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바로 그리스도안에서 이긴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보기에는 실패자로 보일 수 있고, 약자로 보일 수 있지만 그리스도가 보시기에는 승리자입니다.

여러분의 눈에 세상의 죄가 보여지기를 바랍니다. 심판이 보여지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의 승리가 승리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진정한 승리는 오직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으로 감사하면서 이긴자로 당당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 것 때문에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여러분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