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6:5-6 셋째 인

신앙이 환경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하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평안할 때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떠들던 사람이 어려운 일이 닥치니까 은혜는 사라져 버리고 '하나님 제가 뭘 잘못했기에 이렇게 하십니까?'라는 불평과 원망만 남게 되는 것을 많이 봅니다. 결국 어려운 일이 있음으로 인해서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 않았다는 것이 들통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환경에 의해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에 의해서 변하는 신앙이라면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신앙이라는 증거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선물로 주신 신앙은 절대로 환경에 의해서 지배받지 않습니다.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신앙은 요지부동일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이 은총으로 주신 신앙입니다.

신앙이란 돈과 관계된 것도 아니고 자식의 성공과 관계된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관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돈이 있고 없고가 신앙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자식의 문제가 신앙에 영향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환경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신앙은 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종교가 믿음을 말하지만, 그 믿음은 자기를 위한 믿음입니다. 즉 나 자신이 먼저고 그 다음에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힘들고 사정이 어려워지면 얼마든지 믿음의 문제는 뒤로 미룰 수가 있다고 여깁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자기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신앙이기에 자기에게 도움이 안되고 이익이 없으면 얼마든지 버릴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기 이전에 과연 나 자신이 환경에 지배를 받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에게 지배를 받고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환경에 의해서 수시로 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이 하신다'는 그 마음이 남아 있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신앙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셔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는 신자를 세상에서 편안한 삶을 살도록 하시겠다는 것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편안한 삶이란 우리의 탐욕일 뿐이지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단지 부르신 자를 이용해서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시는 것에 있습니다. 세상에 의해 죽으신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시기 위해서 미리 택한 자를 부르신 것이지 세상에서 성공하게 하고 출세하게 하기 위해서 택하시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의 부르심이 세상의 복과 관계가 있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도 않은 자들이 돈을 벌고 잘사는 것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합니까? 부르심을 받지 않고도 잘 사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셔서 이렇게 잘 살게 되었다'고 자랑할 때 과연 그것이 자랑이 되겠습니까? '웃기는 놈들, 하나님을 안믿어도 잘살 수 있는데 뭐하러 믿는가?'라는 조롱만 받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우리의 이름을 높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높이는 것에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우린 단지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도구로 선택되어서 부름을 입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생각하는 복이라는 것은 신앙과 아무런 연결이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욥기서에 보면 마귀가 주장하기를 욥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은 모든 것이 풍족하고 여유 있는 환경이 주어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욥이 가지고 있는 소유를 치면 욥은 당장에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의 소유물을 칠 것을 허락을 합니다. 사탄은 욥에게서 모든 재산을 다 빼앗아 가버리고 자식까지 다 죽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원망일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라고 말합니다. 결국 욥을 통해서 드러난 것은 참된 신앙은 환경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욥과 같은 경우를 당했다고 합시다. 그럴 때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안된 일'이라고 하면서 혀를 찰 것입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잘된 일, 안된 일의 기준은 육신의 소유에 있기 때문입니다. 소유가 증가하면 잘된 일이고, 소유가 감소하면 안된 일로 여깁니다. 그렇다면 욥은 분명 수많은 소유를 잃어버렸습니다. 거기다가 자식까지 몽땅 죽어 버렸습니다. 분명 세상적으로 볼 때 이것은 안된 일로만 여기기보다는 저주를 받았다고 여길 정도로 엄청난 일입니다.

그러나 과연 욥도 그것을 안된 일로 여겼습니까? 욥은 자신을 아예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온 자로 보고 있습니다. 적신, 즉 빈 몸으로 태어나서 빈 몸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애당초 빈 몸으로 태어나서 주어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하나님이 다시 가져가신들 내가 무슨 할말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처음부터 빈 몸으로 태어난 자가 다시 빈 몸이 되었는데 그것이 무슨 안된 일이냐는 생각입니다. 자신을 빈 몸으로 태어난 자로 여기기 때문에 환경에 의해서 신앙이 영향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욥에게 주신 신앙이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다고 해도 안된 일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내가 볼 때 그렇게 보여지는 것이고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지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안된 일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천만 원 있었는데 내일 오백만 원을 잃어버렸다고 할 때 우린 그것을 안된 일로 생각하고 마음 아파하지만 애당초 빈 몸으로 태어난 우리에게 천만 원을 주신 하나님이 오백만 원을 가져가셨는데 그것이 무슨 안된 일입니까? 설사 천만 원 다 가져가신들 결코 안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열심히 일해서 모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아까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당신이 내 처지가 안되어서 그런 소리를 하지 내 처지가 되면 그렇게 쉽게 말을 못할 것이다'라는 반발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목사는 목사 입장에서 목사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내 처지가 되봐라'는 것을 과연 예수님 앞에서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어떤 환경과 어떤 처지를 사셨습니까? 그야말로 머리 둘 곳도 없는 삶을 사시다가 죽으신 분이 아닙니까? 그런 분 앞에서 '당신이 내 처지가 되봐라'는 말을 못할 것입니다.

목사는 바로 예수님의 입장에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목사인 저 역시 어려운 일을 당한 여러분의 처지가 되면 어떤 모습을 드러낼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복음만 전했는데 이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하고 원망을 할 수도 있습니다. '빨리 이 일이 해결됐으면'하는 마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저를 말씀이 칠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는 목사도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을 발견할 수밖에 없는 죄인인 것입니다.

욥에 있어서 환경은 신앙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고통이라는 것이 욥에게 주어졌을 때 원망이 아니라 오히려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는 것만 남았을 뿐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욥이 자신의 신앙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신앙이 고통 속에서도 변함 없이 드러남을 통해서 여호와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욥이 강하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강하신 분이라는 것이 욥에게 주신 신앙을 통해서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환경이라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환경이 나빠지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신앙으로 사는 사람은 결코 환경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내가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강하신 분이시고 능력이 있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 듯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셋째 인을 떼자 검은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검은말에 탄 자가 있는 데 그가 저울을 가졌습니다. 저울이란 곡식을 판매할 때 그 양을 재는 용도로 쓰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정한 액수를 지불했을 때 얼마만큼의 곡식을 주느냐를 통해서 물가가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데나리온에 밀 한되 보리 석되라고 합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이 품삯으로는 밀 한되, 보리 석되 밖에 살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밀 한되를 사면 겨우 하루 벌어서 자기 혼자 먹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보리 석되를 사면 다른 식구도 먹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밀과 보리만으로 생활을 해결 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이 말은 물가는 높은데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가난한 자들이 곤란을 당하는 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물가가 올라간다고 아우성들입니다. 아무리 정부에서 물가를 내리고 싶다고 해도 그것은 마음대로 안되는 일입니다. 원유가가 올라가는데 물가가 오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모든 물품들이 기름이 있어야 생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원유가가 오르고 물가가 오르는 것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하십니까? 왜 세상에서 먹고사는 것이 힘들게 만드십니까? 물가가 오른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물가가 오를 때 힘든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지 돈 많은 자들은 물가가 아무리 오른다고 해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가난하고 힘든 자들을 더 힘들게 하시는 것입니까? 차라리 힘들게 하시려거든 편안하게 잘 사는 부자들을 힘들게 하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괴롭게 하고 보복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생각에는 부자들에게 보복을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지만 그것은 결국 자기를 사랑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보다 잘 살고 편안한 자에 대한 시기와 미움이 보복의 차원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간혹 뉴스에 보면 공직자들의 부인들이나 돈 많은 자들이 고가의 옷을 구입하고 가구를 구입하면서 사치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것을 보고 소위 서민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분개합니다. '왜 없는 자들을 생각하지 못하느냐?'고 외치면서 있는 자들만 편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돈 많은 자나 돈 있는 자나 똑같이 자기만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고 말씀합니다. 밀과 보리는 가난한 자들이 먹는 음식입니다. 그리고 감람유와 포도주는 돈 있는 자들이 먹는 고급음식입니다. 그런데 감람유와 포도주를 해치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서민들이 먹는 음식은 궁핍한 반면에 부자들이 먹는 음식은 풍부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부자들 편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부자들은 계속 풍부함을 즐기면서 살아가고 가난한 자는 물가가 오르고 먹을 것이 귀해지면서 어렵게 살아가게 함으로서 세상 전체가 무엇으로 사는가를 확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도 부자는 온갖 풍부함을 누리면서 편안하게 살아가지만 가난한 자는 갈수록 더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가가 오르면 가난한 자들만 고통을 겪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에서 말씀한대로 셋째 인을 뗌으로서 드러난 세상의 현실입니다.

이 현실 속에는 부자는 물가가 얼마가 오르던 자기 재산을 굳건히 믿고 살아갈 것입니다. 물가가 오른다고 해도 전혀 걱정이 없습니다. 돈이 있고 그 돈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는 하늘을 원망하고 투덜대며 살아갈 것입니다. 고정된 수입을 생각하면서 걱정하고 근심할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돈을 의지하는 것이고 자기 스스로 살려고 하는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물가가 오르게 하심으로서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가 자기 스스로 자기의 힘을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하나님은 누가 과연 하나님이 주신 신앙으로 살아가는지를 확인하십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살려줄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게 하면 살고 죽게 하시면 죽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복종할 뿐이라는 것이지 하나님이 내 생각을 들어준다는 신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교회가 말하는 믿음이란 단지 자기 생각에 대한 신념이지 결코 신앙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신념을 자기 스스로 믿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신 신앙으로 환경에 변하지 않고 살고 죽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백성을 확인하시기 위해서 물가를 오르게 하시고 없는 자들을 더 힘들게 하시고 부자는 편안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힘들게 하심으로서 가난한 자는 가난한자대로 부자는 부자대로 자기만 믿고 세상만 바라보고 살고 있음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심판 속에 있음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입니다.

왕하 6,7장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아람 왕이 사마리아를 공격을 해서 포위를 해버립니다. 아람 군대가 포위함으로 인해서 물품을 외부로부터 들여 올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인해서 곡식이 귀해지고 자연히 물가가 올라가게 됩니다.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고 합분태 사분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을 합니다. 결국 가난한 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게 되고 나중에는 아이까지 먹는 일이 발생합니다. 한번은 왕이 성 위를 가는데 여인이 하소연을 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오늘은 네 아들을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고 합의를 해서 자신의 아들을 먹었는데 다음날 네 아들을 내라 하니까 아들을 숨겨 버리고 내 놓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이러한 사태를 지켜본 왕은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왕하 6:33)라고 합니다. 이런 일이 있게 한 여호와를 이제는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왕에게 엘리사가 여호와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고 하셨다는 말을 전해도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즉 살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고 죽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죄를 문둥이를 통해서 드러내십니다.

당시 성문 어귀에 네 문둥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도 양식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여기 있어도 굶어 죽고 성에 들어가도 양식이 없으니 죽을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니 차라리 아람군대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두면 살고 죽이면 죽을 따름이라'고 생각하고 아람군대로 들어갑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람군대로 하여금 큰 군대가 몰려오는 소리를 듣게 함으로 모두 도망을 치게 만들어 버립니다. 결국 문둥이들은 아람 군대에 쌓여있는 음식을 실컷 먹고 그 사실을 사마리아에 알렸던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드러내신 것은 아람 군대에 의해서 포위를 당함으로 물가가 올라가자 하나님이 살게 하는 대로 산다는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 없음이 '살려주면 살고 죽게 하면 죽을 따름이라'는 생각으로 아람 군대로 들어간 문둥이를 통해서 드러난 것입니다. 생존문제에 위험이 오자 믿음 없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사단은 언제나 여러분에게 생존 문제를 가지고 접근을 합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가장 먼저 내세운 것도 떡, 즉 생존 문제가 아니었습니까?

신자는 살려주면 살고 죽이면 죽을 따름입니다. 우리에게 과연 하나님이 주신 이런 신앙이 있는지 확인하시기 위해서 생존에 위험이 오게도 하시고 어렵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살든지 죽든지 주의 뜻이다'가 아니라 '사는 것이 주님의 뜻이다'라는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은 죽어도 나는 죽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파묻혀 있습니다. 살게 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우깁니다. 그러기 때문에 생존의 문제를 가지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짜증을 내면서 하나님께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살게 하시는 대로 살자'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겸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렵게 하니까 신자라고 이름하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이 어렵게 하심으로 인해서 살게 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려고 애를 쓰는 인간의 악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주신 신앙이 있다면 어려움 속에서 '나는 하나님이 살려주는 삶을 사는 자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있어서 어려움은 잘된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잘된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만 높이며 살아가는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