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6:7-8 넷째 인

세상은 온통 거짓으로 철저하게 위장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을 모르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바로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흙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입니다. 흙은 흙일뿐입니다. 지식을 많이 쌓아서 박사가 된다고 해도 그는 흙입니다. 세계 제일의 갑부라고 해도 그는 역시 흙입니다. 세계 최고의 미인이라고 하는 미스 유니버스라고 해도 역시 흙일뿐입니다. 흙에다가 금칠을 했다고 해서 흙을 금으로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흙이란 본질을 보지 않고 겉에 치장이 되어 있는 금을 보고 금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거짓일 뿐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온통 거짓으로 위장되어 있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흙'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떠나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에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참입니까? 흙이 흙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해도 '나는 흙입니다. 지식이 나를 가치 있는 자로 만들지를 못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참입니다. '나는 흙입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졌다고 해도 나를 가치 있는 자로 만들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을 아는 자의 고백인 것입니다.

세상은 인간의 본질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가리려고 합니다. 세상의 것을 자기 몸에 갖다 붙임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키고자 합니다. 지식으로, 재물로, 권력으로, 자식의 성공으로 자신의 가치 향상을 꾀하고 살아갑니다. 결국 무가치한 자가 세상의 것을 도구로 삼아서 가치 있는 자로 향상되려고 하는 것이 흙이라는 본질을 가리는 거짓인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자신의 몸을 가리고 숨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죄지은 인간의 속성입니다. 땅에 있는 것을 도구로 삼아서 자신의 수치를 가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수치를 아는 자로부터 숨어 버립니다.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숨었다는 것은 끝까지 가치 있는 존재로 남겠다는 의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치가 가려져야 하고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는 대신 무엇인가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인간은 자신의 수치를 가리고 가치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언제나 세상의 것을 필요로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뭔가 하나라도 얻게 되면 그것을 도구로 삼아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게 됩니다.

이러한 인간의 거짓이 교회에 그대로 스며들어있습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진리라고 하는 성경은 단지 자신을 가리고 가치를 높이기 위한 수단이요 도구일 뿐입니다. 성경만이 아니라 기도, 봉사, 헌금, 예배, 모든 것들이 인간 가치 향상을 위해서 강조되어집니다. 교회가 인간의 본질을 모릅니다. 분명히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이 성경에 절대불변의 말씀으로 박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말씀은 죽은 자에게나 해당되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흙이 곧 나의 현실임을 아예 생각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흙에 무슨 가치 있는 흙이 있고 가치 없는 흙이 있겠습니까? 흙은 흙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서 흙이 흙이 아닌 것입니까?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흙이 금으로 변하는 것입니까? 무엇을 한다고 해도 인간은 흙입니다. 그렇다면 진심으로 참을 외치는 교회라면 '인간은 흙이다'는 이 본질을 기준으로 해서 말씀이 증거 되어야 합니다. '40일 금식기도를 했습니까? 그래도 여러분은 가치 없는 흙에 지나지 않습니다.'가 외쳐져야 합니다. '60평생 동안 주일을 잘 지켰습니까? 그렇다고 여러분이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흙입니다'라는 참이 외쳐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 안에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려주는데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무화과 잎으로 자신의 수치를 가렸듯이, 목사들이 기도를 동원하고 헌금을 동원하고 주일성수를 동원하고 봉사 충성을 동원해서 인간의 수치를 가려줍니다. 이것이 거짓을 말하는 교회입니다.

이렇게 거짓의 세상에 참되신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인간들이 자신을 가리고 있는 모든 것을 벗겨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흙일 수밖에 없는 수치스러운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만난 자는 자신의 본질을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흙으로 주님께 나오게 됩니다. 흙으로 주님께 나오는 자는 자신에게 전혀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무엇을 했다고 해도 여전히 자신을 흙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의로 오신 주님을 바라볼 때 자신의 의라는 것은 내세울만한 가치 없는 것임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인간과 비교하면 내가 흙임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저 사람보다는 더 낫다고 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면 언제나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뭘 했다는 말조차도 꺼낼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무가치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참으로 가치 있고 의가 되는 주님의 행위만 찬양을 하고 높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입니다.

인간의 본질을 잊지 마십시오. 인간은 흙이라는 것을 잊고 사신다면 여러분은 세상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스스로 마음 상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못 참아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자존심입니다. '왜 나는 저렇게 잘되지 못하는가?'라는 자기 한탄이 스스로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잘돼야 한다. 나는 남들보다 높아져야 한다. 나는 남보다는 가치 있는 자가 되야 한다'는 이 싸움이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흙'이라는 본질을 기준으로 하고 사신다면 '내가 잘돼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살아가실 것입니다. 물론 힘든 일이 있을 때 그것으로 고통스러워하겠지만, 그 고통 속에서 '내가 고통을 받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흙인데'라는 쪽으로 생각을 하신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하나님이 하신 당연한 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을 아는 자의 삶입니다.

인간의 본질이 흙이라는 것은 죄에 의한 결과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죄를 벗어버리지를 못한 이상 흙이라는 본질을 떠날 수 없습니다. 설사 신앙이라고 할지라도 이 본질을 떠나게 하지 못합니다. 만약 신앙이 인간을 흙이라는 본질에서 가치 있는 본질로 변하게 한다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이러한 가르침을 서슴없이 하고 있습니다. 물론 노골적으로 '신앙이 있으면 흙으로 돌아가라는 원칙에서 벗어난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이 있으면 아예 죽지 않는 신체가 된다는 말이 되버리기 때문에 그러한 말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이 형통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말은 서슴지 않고 합니다. 형통한 길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까? 축복 역시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수단과 도구가 주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까? 분명히 말씀드리기를 흙이 자신의 가치 향상을 꾀하고 행동하는 것은 자신의 본질을 모르는 거짓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살면 형통해지고 복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신앙이 있으면 흙이라는 무가치한 존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흙은 무엇을 소유해도 흙입니다. 가치 있는 흙이란 없습니다. 흙이 금을 품고 있다고 해서 흙 자체가 가치가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믿음도 흙을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때문에 믿음을 빙자해서 형통한 삶을 꾀하고, 믿음의 행동을 통해서 축복을 꾀하는 것은 자기 본질을 잊어버린 거짓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기 본질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믿음이 있는 자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인간이 가치 있어 하는 것을 뺏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본문을 보면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인간이 싫어하는 것은 모두가 등장을 합니다. 사망, 음부, 검, 흉년, 죽이는 것, 하나같이 세상이 거부하고 밀쳐내려고 애를 쓰는 것들이 등장을 합니다. 싫어하는 이유는 그 모든 것이 인간의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인을 떼자 청황색 말이 나옵니다. 그 청황색 말에 타고 있는 자가 있는데 그 이름이 '사망'입니다. 말에 탄 자의 이름이 등장을 하는 것은 본문이 처음입니다. 이것은 사망이 세상에서 권세를 가지고 행세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지금 세상의 현실입니다. 세상의 권세자는 사망입니다. 아무리 땅에서 권세를 잡은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사망 앞에서는 무릎을 끓습니다. 아무리 힘을 가진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죽음 앞에서는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권세를 가진 사망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 죽이더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현실은 사망이 인간을 위협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사망을 두려워하며 죽지 않기 위해서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에게 죽음의 위협을 가하는 존재가 발생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신에 대한 반발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생명의 위협으로 벗어나기 위해서 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세상은 죽음 아래 있습니다. 아무도 죽음을 피할 자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들어 죽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굶어죽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전쟁터에서 죽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주의 뜻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사실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의 인간 확인 작업입니다. 인간이 얼마만큼 하나님에 대해서 반발을 하며 사는 존재인가를 확인하고 드러내시기 위해서 죽음이라는 상황으로 밀어 넣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하나님을 믿고 복음을 알고 십자가의 피를 의지하고 산다고 해서 우리의 형편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으로 사는데 왜 우리를 좋은 환경으로 인도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믿음으로 살기 전이라면 힘들게 하신다고 해도 이해하겠는데 믿음으로 산다면 신자를 세상이 당하는 나쁜 환경에서 건져 줘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누가복음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눅 13장에 보면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18명이 예루살렘에 거하는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교회를 잘 안나오니까 저런 일을 당했다'는 식의 말이 거짓임을 보여줍니다. 망대가 무너져 죽은 18명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간 것뿐입니다. 즉 하나님의 원칙이 적용된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죽지 않은 자는 흙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도 흙이지만 단지 하나님이 살려놨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좋지 않은 일을 당하면 꼭 그에 대한 이유를 찾으려고 합니다. 나쁜 짓을 하고 죄를 지었으니까 그런 일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내린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일이 있는 사람들은 역시 좋은 일을 하니까 하늘이 복을 준 것이라고 말합니다.

망대가 무너졌을 때 18명의 죽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극적으로 살아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죽은 자와 산 자를 평소의 인간 행위를 기준으로 해서 분석하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 행위가 아니라 인간 본질을 통해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즉 남보다 죄가 더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흙이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갔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망대가 무너질 때 극적으로 살았다고 해도 역시 죽게 됩니다. 다만 죽은 사람과 시간 차이가 있는 것이지 흙이라는 본질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이 좋은 환경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의 본질을 망각한 착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말씀으로 산다고 해서 죄가 가벼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가리움을 받을 뿐입니다. 죄 없는 자로 여김을 받을 뿐입니다. 믿는 자나 안믿는 자의 죄는 동일합니다. 비행기 사고로 죽고 굶어 죽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아에 허덕이는 소말리아를 보면서 사람들은 '저주받은 땅'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우리는 굶어죽지 않고 곡식이 풍성한 땅에 살고 있으니까 축복 받은 자라는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누구는 저주하시고 누구는 축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습니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소말리아 사람들을 굶어죽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 역시 그들처럼 비참해야 할 존재고 죽어야 할 흙에 지나지 않음을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여건이 우리가 귀하다거나 가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믿지 않는 자들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의 본질을 생각하지 않은 착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흔히 교인들이 많이 생각하듯이 '나는 남보다 더 봉사를 많이 하고 십일조를 열심히 하고 전도 기도도 뛰어나게 하니까 하나님이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대우하시겠지'라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을 모르는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을 모른다는 것은 죄인 됨을 모르는 것입니다. 죄인 됨을 모르기 때문에 회개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이 세상을 흔드실 때 드러나는 것입니다. 흉년과 죽음과 고통 속에서 신자라는 보석이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과 고통 속에서 세상은 신에게 반발을 하지만 신자는 인간의 본질을 알기 때문에 '당연히 받아야 할 심판'으로 여기게 됩니다. '나 같은 자가 진작 이런 일을 당해야 했는데 지금껏 편하게 산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가 바로 신자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목사님, 죽음에 처한 상황에서 그렇게 고백하며 나올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라는 반발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 반발이 바로 우리가 어떤 인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끝까지 인간의 본질을 인정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물론 평소에는 '예 맞습니다'라고 하다가도 그와 같은 상황이 되면 어떤 모습을 드러낼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은 나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것은 이런 상황이 되면 이렇게 고백하라는 방법론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신자되기 위해서 억지 고백을 끌어내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인간의 나약함과 극한 상황을 계산하면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말씀이 이렇다는 것을 소개할 뿐입니다. 저 역시 어려운 상황이 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 저의 깨달음은 저에게 인간은 무가치한 존재임을 외치고 있습니다. 무가치한 존재이기 때문에 비참에 처해야 하는 것이 원래 모습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살고 있음을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본질을 망각하지 않는 자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나는 망하면 안돼' '나는 병걸리면 안돼' '나는 실패하면 안돼' '내 자식은 뛰어나야해' 이러한 생각들은 자신의 본질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회개가 없는 것입니다.

신자니까 하나님이 나를 세상의 좋은 쪽으로 인도해 주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생각 자체가 이미 신자가 아니라는 증거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자는 죄가 없거나 남들보다 착한 일을 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의 본질을 알고 자기 죄를 회개하는 자입니다.

세상이 망하는 이유는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이유는 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를 모른다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 앞에서 신에게 반발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분명히 성경에서는 말씀하기를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선악과를 먹은 후의 인간의 본질은 죽음입니다. 흙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신자라면 '나는 죽어야 할 죄인에 지나지 않습니다'라는 자기 인정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가 죽는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반발을 하겠습니까? 신자라면 죽어야 할 자가 죽을 뿐이라는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내가 유일하게 바라보고 소망할 것은 오직 다시 사신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음을 확고하게 할 것입니다.

세상은 사망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사망 앞에 굴복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신자는 사망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죽어야 할 자가 당연히 죽을 뿐이라는 생각으로 산다면 살기 위해서 발버둥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지 마십시오. 저는 단지 말씀이 이렇다는 것만 소개할 뿐입니다. 저 역시 이 말씀 앞에서 나의 죄인 됨을 발견하고 회개해야 할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서 망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하늘에서 망한 자로 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세상 것을 구하기보다는 세상에서 떠난 자의 마음으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고 언제나 나 자신을 흙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시고 죽어 마땅한 자로 인정하면서 주님의 은혜에 더욱 더 마음을 두고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러한 신자를 틀림없이 도우십니다. 언제나 인간의 본질을 아는 겸손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