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6:9-11 다섯째 인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것은 설교되어지는 말씀이 자신에게 은혜가 되어서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교회를 찾아 나온 보람과 즐거움과 기쁨을 은혜가 되어지는 말씀에서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로서 지극히 당연한 바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 은혜를 얻고 힘을 얻고 싶다는데 그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설교를 하는 입장에 있는 저로서는 한가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과연 말씀이 어떤 식으로 자신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주기를 바라느냐는 것입니다. 혹시 세상에서의 힘들고 어려운 생활을 위로 받고 싶은 것은 아닌지, 아니면 뭔가 맥이 빠진 듯한 신앙생활에서 건전지를 다시 충전한 것 같은 새로운 힘이 솟아나는 신앙생활을 기대하는 것인지 의문이 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말씀에 위로가 있고 은혜가 있고 힘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말씀은 신자에게 위로가 됩니다. 그리고 은혜 안에서 힘있는 삶을 살도록 합니다. 그러나 그 위로와 힘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감정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언젠가 TV에서 방영하는 호기심 천국에서 윗몸 일으키기를 그냥 했을 때와 영화 록키에서 나오는 주제 음악을 들려주며 했을 때의 차이를 비교하는 실험을 하는 것을 봤습니다. 결과는 그냥 한 것보다는 록키에서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했을 때가 훨씬 효과적이었습니다. 음악이 인간의 감정을 자극해서 잠재력을 일으키고 힘이 솟아나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해준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말씀에서 힘을 얻고 싶다고 할 때 그 힘을 바로 자신의 잠재력을 일깨워주고 힘이 솟아나는 듯한 느낌이 일어나는 것 같은 식의 힘을 기대하는 것일 수가 있습니다. 즉 힘이 나는 듯한 감정을 느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들어서 마음에 전혀 변화가 없고 마치 잔잔한 호수와 같을 때 그것을 힘이 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잔잔한 호수에 돌이 던져질 때 물결이 파동을 치듯이 말씀이 내 가슴에 던져질 때 내 속이 파동을 치는 것 같은 현실감이 있는 힘을 느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많은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유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교인들로 하여금 말씀에서 힘을 얻게 하기 위해서 인위적인 테크닉을 발휘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음향을 통해서 효과를 얻으려고도 하고 발성법이나 여러 가지를 통해서 교인들로 하여금 힘이 나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말씀의 힘이라는 것은 우리 속에서 솟아나는 힘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활력을 주거나 용기를 북돋아주는 에너지가 아닙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있는 힘마저도 꺾어 버리는 것이 말씀입니다. 따라서 설교를 듣고 나니까 맥이 빠진다는 것이 정상입니다.

힘이 난다는 것은 뭔가 희망적인 것을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맥빠지게 만드는 요소는 건너뛰고 천국이니 주님의 은혜니 듣기에 좋은 말만했다는 증거입니다. 물론 천국이나 은혜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피의 은혜는 반드시 인간의 죄의 현장에서만 부각되어야 합니다. 죄를 떠나서 부각되어지는 은혜는 진실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로마서 5:20절에 보면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것이 진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 진실이 말해지는 것을 꺼려합니다. 즉 인간의 죄가 말해지는 것에 귀를 막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죄를 너무 강조하니까 맥이 빠지고 주님의 은혜에 소홀해지기 쉽다. 그러니까 이제는 죄보다는 주님의 은혜를 더 강조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흥미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표정이 굳어질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가 자신과 상관없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흥미를 가지고 들을 수가 있지만 자신과 상관이 있는 죄가 외쳐지기 때문에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과 연결되어 지는 죄에 대해서 듣기보다는 주님의 은혜를 더욱 듣고 싶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대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결국 은혜가 은혜로 남기 위해서는 죄가 외쳐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를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주님의 은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교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찾으려고 합니다. 즐거움을 제공하지 못하는 종교에는 흥미를 잃게 됩니다. 물론 복음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그러한 종교성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교회를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니까 인간의 종교성과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나온다고 생각해 버리기 때문에 자신을 인간의 종교성이란 죄의 고리로부터 미리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종교성에 대해서 외쳐질 때,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를 취미 생활로 여긴다는 말이 외쳐질 때 '그래 요즘 한국교회가 엉망이야'하면서 마치 자신은 정의 편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진 채 말씀을 듣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으로 위장되어진 또 하나의 죄덩어리가 있을 뿐입니다.

복음이란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죄를 알 때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은혜가 선명하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철저하게 절망하게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무력감을 느끼도록 만듭니다. 그럴 때 인간이 말씀에 끌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만 말하니까 힘이 안난다. 이제는 주님의 은혜에 대해서만 말해달라'는 것 자체가 바로 자신의 의도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희망적인 말을 통해서 힘이 나는 신앙을 경험하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힘으로 삼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말씀을 자신의 힘으로 삼으려고 하는 순간 말씀은 여러분에게서 멀어질 뿐입니다. 말씀이 힘이 되는 경우는 철저히 자신의 죄인 됨과 무가치함을 인식하고 주님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자각할 때 능력의 말씀이 여러분을 붙들 것입니다. 그것이 힘입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설교하고 죽었던 스데반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말씀이 스데반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만 내세우게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잔잔한 내면 속에 감추어져 있는 무서운 힘입니다. 스데반은 단지 그리스도를 믿었을 뿐입니다. 죽는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나를 책임지신다는 것을 알았을 뿐입니다. 그것이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무서운 힘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말씀을 통해서 힘을 얻고 은혜를 얻고 위로를 얻고자 하는 자기 바램은 접어두고 단지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만 의지하는 인간 되어지기를 소망하는 그 마음 하나면 족할 것입니다.

말씀은 인간에게 힘이 될만한 것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적으로 볼 때 부정적인 것만 잔뜩 나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와 같습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여러분은 이 말씀에서 과연 위로가 되고 힘이 될만한 부분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간단히 말해서 신자는 세상에 의해서 죽는 자라는 것입니다. 다섯째 인을 떼자 보게된 환상은 제단 아래서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외치는 장면입니다. 죽임을 당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증거를 가졌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말씀의 증거를 가졌다는 것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병고치는 은사를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귀신을 쫓아내고 방언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말씀의 증거라면 말씀의 증거를 가진 자는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환영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으로부터 환영을 받으신 적이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었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을 했습니다. 기적의 예수님을 환영을 한 것입니다. 기적의 예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한다면 뭔가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외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인생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것이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은 인생에 보탬이 되고 도움이 되는 예수님을 원합니다. 때문에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인생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것은 시간낭비고 쓸데없는 짓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신자가 가지고 있는 말씀의 증거가 기적이고 병고치는 은사라면 세상은 신자를 환영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증거는 그리스도요 십자가입니다. 결국 말씀을 증거를 가진 신자가 외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외치신 것과 같은 말일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듯 역시 신자를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아야 한다는 이 말씀이 과연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까? 오히려 우리를 난처하게 하고 맥이 빠지게 하는 말씀은 아닙니까? 본문과 같은 말씀은 신자들의 얼굴 표정을 밝아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둡게 하는 말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힘이 되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씀의 증거가 있음으로 인해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될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죽였고 왜 죽였는가를 알기 때문에 말씀의 증거를 가지고 살아가는 자신 역시 세상으로부터 무사하지 못할 것임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다시금 말씀을 통해서 그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말씀이 힘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힘이 솟아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미움받고 죽는다는 것이 나의 운명임을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믿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힘입니다.

다니엘 세친구가 신상에 절하지 않고 풀무불에 들어갔습니다. 리가 생각할 때는 아주 용기 있는 행동이고 힘있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상한 힘이 솟아나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이 믿어졌을 뿐입니다. 설사 불에서 죽는다고 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신다는 것이 믿어졌기 때문에 불 속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힘입니다.

사람들은 말씀을 통해서 힘을 얻고자 하지만, 제가 묻고 싶은 것은 힘을 얻어서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신앙의 힘이라고 해봐야 결국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알면 뭔가 색다른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지는 줄로 생각을 하지만 십자가의 은혜는 신자를 주와 함께 죽는 자리로 인도해 갑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제단은 제물들이 죽임을 당하여 흘린 피가 뿌려지는 곳입니다. 그 제단 아래 죽임을 당한 성도들의 피가 있습니다. 성도들의 피가 제단 아래 있다는 것은 말씀의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그들의 피를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외치고 있는 것은 자기들을 죽인 자들에 대한 보복입니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 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10절) 이것이 죽임을 당한 자들의 외침입니다.

그런데 이 외침에는 한가지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고 하신 것이나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주여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라고 한 것과는 어떻게 연결해서 생각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이나 스데반은 하나님에게 보복해주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제단 아래 죽임을 당한 영혼들은 하나님이 보복해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4:10절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는 말씀을 먼저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만 받으시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즉 자기 자존심이 아벨을 죽이게 된 것입니다. 나는 무시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불만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것은 단지 인간 관계가 아니라 자기 자존심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에게도 대항하고자 하는 인간의 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하나님에게 호소한다고 합니다. 이 호소가 과연 아벨이 자기 개인을 위한 복수의 호소이겠습니까? 아벨의 핏소리의 호소는 개인 복수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항하는 인간에 대한 보복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이나 스데반이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말한 것은 자신을 위한 보복을 원치 않는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고, 본문에서 복수해달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원수를 갚기 위한 차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항하고 반발하는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서 보복해달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적에 대한 보복이지 개인의 적을 향한 보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임을 당한 신자들의 외침에 대해서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11절)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세상에 대한 보복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끝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이 끝을 바라보고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가 죽임을 당하는 그 수가 채워질 때 하나님은 세상에 대해서 보복을 하십니다. 보복의 근거는 하나님의 백성들, 말씀의 증거를 가진 신자들이 세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피흘린 신자들을 증거물로 내세워서 세상을 향한 보복을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세상은 참으로 문제 투성이입니다. 자기 자존심으로 사는 세상이고, 자신의 선악체계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 일에 자신이 유익이 되면 기뻐하고 유익이 되지 못하면 반발을 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은 인간이기에 자기를 주장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대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대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세상에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피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사고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물가가 안정되고 나라가 부강해지고 먹고살기가 편해지면 그것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여겨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십니다. 자기 인생에 보탬이 되는 것만을 찾아다니는 세상은 전혀 존재 가치가 없다고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 의해서 하나님이 무시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는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세상이 죽임으로서 명확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세상은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게 되면 하나님의 보복이 세상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바로 오늘 우리들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어떤 현실로 다가와야 합니까? 그것은 세상의 끝을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끝을 보고 사는 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린 오늘 본문을 통해서 세상의 끝을 명확히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해서 무엇 때문에 복수하시는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복수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놀랍게도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소위 복음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칫 범하기 쉬운 잘못은 복음을 안다는 것 때문에 자신을 죄의 자리에서 제외시키는 것입니다. 복음을 안다는 것을 방패로 해서 하나님의 복수의 대상으로부터 제외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우리가 아벨을 죽인 가인입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반기를 들었고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산 자들입니다. 우리는 내가 살아가는 환경이 별 문제가 없기만을 원했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문제 있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지를 않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자기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죄에 대한 말을 듣기를 싫어하고 그저 십자가의 은혜만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보복을 받아야 할 복수의 대상입니다. 그러한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를 알아야 왜 내가 하나님의 복수의 대상인가를 알게 될 것이고, 그것을 알아야 우리를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만 의지하게 될 것이 아닙니까? 세상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복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세상에서 어떻게 살까?'에 미련 두지 않을 것입니다. 끝을 아는 자가 과정에 의미를 두겠습니까? 오로지 그리스도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분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는 세상으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든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왜 세상을 복수하시는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자에게 힘이 되는 것입니다. 무시와 조롱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도록 굳건한 힘으로 우리를 붙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복수의 대상으로 남아야 할 우리가 은혜를 입은 자가 되었는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은혜로 살아가는 인생이 된 것에 감사하는 자로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