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6:12-17 여섯째 인

목사나 교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점은 성경 속의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성경 속의 모든 사건은 과거의 역사 속으로 흘러가버린 내용들인데 단지 현대를 살아가는 교인을 교훈하고 가르치기 위해서 성경으로 기록되어서 지금까지 흘러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구약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대부분이 남의 나라에 의해서 침략을 받고 압제를 받는 내용들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인정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과거 이스라엘의 현실을 오늘 우리자신들의 현실로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이 왜 압제를 받고 고통을 받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찾아내서 우리는 이스라엘처럼 행동하지 말자고 교훈 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나님의 계시로 보게 되면 이스라엘은 단순히 우리를 교훈하기 위한 목적으로 등장하는 역사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기를 이스라엘이 남의 나라에 의해서 압제를 받고 결국 멸망을 당하게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살아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죄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즉 이스라엘에만 일어나는 결과가 아니라 누구라 할지라도 말씀을 청종치 않고 죄가운데 있으면 망한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로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도 역시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죄가운데 있으면 망한다는 것이 현실로 다가와야 합니다. 좋은 집에서 잘먹고 잘살고 직장에 잘 다니고 자식들 잘 크는 것들이 현실이 아니라 죄로 인해서 망하고 죽는 것이 바로 내 현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봅니까? 마치 이웃 나라에서 지진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는 사건들을 보면서 '쯧쯧 안됐다'하고 혀를 차고 동정하는 것처럼 단지 먼 옛날에 우리하고 전혀 상관이 없는 나라에서 일어났던 일로만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했다는 성경을 보면서도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내용으로 보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 속의 현실을 오늘 나의 현실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의 멸망을 얘기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얘기하고, 선택을 얘기하고, 십자가를 얘기하면 '목사님 그런 것만 얘기하지 말고 좀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이 지금 우리들의 현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IMF가 터지고 직장에서 밀려나고 먹고살기가 힘든 지금의 현실에 맞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이 지금 내가 먹고 살아가는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지신 것이 IMF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목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는 목회를 자기 현실로 여깁니다. 교인들을 잘 가르치고 다스려서 교회를 부흥시켜야 하는 것이 바로 눈앞에 닥친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들도 자기 현실에 이익이 되고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때문에 십자가를 얘기하면서도 결국 자기 현실에 보탬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이스라엘을 얘기하면서 역시 자기 현실에 이익이 되는 결론을 내립니다.

예를 들어서 말씀을 청종하지 않아서 멸망을 당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계시로 그리고 우리의 현실로 인정한다면 '말씀을 청종하지 않는 것은 죄다. 그리고 죄의 결과는 멸망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산다면 결국 우리의 현실은 멸망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말씀을 청종하는 삶이 전혀 아니다. 우리들 속에는 말씀을 청종하고 말씀에 순종하고 살려고 하기보다는 내 뜻대로 살려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다. 때문에 우리는 이스라엘처럼 멸망당할 죄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내려집니다. 즉 이스라엘의 멸망을 계시로 인정할 때 우리의 현실은 죄인이며 멸망당할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멸망이 현실로 인정될 때, 좋은 집을 장만하고 아이들이 출세하고 돈을 모았다는 것들은 결코 현실이 아니라 모두가 허상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멸망이라는 현실에서 가장 가치 있고 귀한 것은 그리스도의 피며, 그리스도의 피를 믿게 되었다는 것이 곧 기적이고 그 기적에 주님의 은혜로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 곧 인생의 성공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멸망을 계시로 인정하지 않고 우리의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위와 같은 말은 절대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은 말씀을 청종하지 않아서 멸망을 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부지런히 말씀을 청종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부지런히 전도하고 십일조 열심히 하고 봉사도 많이 하는 것이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기 목회에 도움이 되는 말을 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멸망이 현실이 아니라 목회가 현실이고 출세가 현실이고 돈이 현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성경이 관심이 아니라 목회라고 하는 자기 현실이 관심거리입니다. 내 교회가 살아있음을 증거 하는 것이 관심이고, 내 교회가 부흥되어서 자기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 관심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자기 교회에 관심을 두고 성경을 전하는 것, 이것이 바로 다른 예수를 전하는 것이고 거짓사도이고 이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무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성경을 현실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에 의해서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돈에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돈을 현실로 인정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현실을 따라가게 되있습니다. 현실이 우선이지 미래를 우선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과거의 일어났던 일을 말하고, 미래에 있을 일을 말한다고만 여겨버리기 때문에 현실로 여기고 있는 돈에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돈이 현실이기 때문에 돈이 많아지는 것을 축복으로 생각하게 되고, 목회가 현실이기 때문에 교회가 부흥되는 것이 축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현실이겠습니까? 본문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산과 섬이 자리에서 옮기우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종과 자주자가 굴과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단지 미래에 있을 상황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만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장차 이 세상을 어떻게 심판하시는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미래에 있을 일이기 때문에 지금 현재에는 안심해도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마 3:10절에 보면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찍어서 불에 던지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도끼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 뿌리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즉 도끼가 나무 뿌리 놓여 있는 현실 앞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도끼에 의해서 찍히지 않으려면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여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선천적으로 죄속에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즉 처음부터 이미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에 달린 자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이라면 중요한 것은 '좋은 열매를 맺자'가 아니라 '회개'입니다. '나는 불에 던짐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나쁜 열매입니다'라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좋은 나무로 오신 그리스도에게 나의 전부를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있는 것을 지금의 현실로 인정하게 된다면 자신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날마다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사는 것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장차 되어질 일을 나중 일로 밀쳐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일로 여기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을 예수님이 오셨을 때 되어질 일이라고만 여긴다면 현재에 있어서는 뭔가 안심을 하게 됩니다. 느긋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조금 잘못한다고 해도 아직 회개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나중에 회개하고 잘믿자'라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자꾸 나중 일로 인식하려고 하기 때문에 현실이 아닌 미래의 일로 밀쳐내게 되고 대신 현실로 인정되는 문제에 급급해 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솔직히 여러분에게 있어서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세상 심판입니까 아니면 돈 문제이고 자식 문제이고 직장 문제입니까? 모르긴 몰라도 심판보다는 돈 문제 자식 문제가 더 우선적이고 현실로 다가올 것입니다. 세상을 심판한다는 하나님의 계시 앞에서는 마음이 전혀 요동을 하지 않고 근심도 하지 않다가도 돈 문제만 발생하면 마음이 흔들리고 근심에 빠지고 염려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솔직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이 마치 나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인 양 담대하게 살아가지 않습니까? 수십년 교회 다니고 십일조하고 봉사한다는 것을 방패로 내세우면서 말입니다.

어떤 분은 자신 스스로 '나는 믿음이 없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는 속마음은 자신의 믿음 없음에 대한 솔직한 고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애초부터 믿음이 없는 사람이니까 믿음으로 살아라고 말하지 말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일수도 있습니다. 즉 믿음으로 살기 싫은 마음을 '나는 믿음이 없다'는 말을 통해서 내뱉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우습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 보여지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년 전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사건이 있었습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것은 갑자기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건물을 부실하게 지음으로 해서 여기저기 금이 가면서 하루하루 무너져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단지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살았을 뿐입니다. 아마 백화점을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은 건물이 무너진다는 것을 생각조차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안심하고 물건을 사고 파는 자기 현실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백화점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당장에 백화점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 애를 썼을 것입니다. 백화점이 무너진다는 것을 안 이상 현실은 백화점이 무너지는 것이지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삼풍백화점이라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상이 무너진다는 계시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을 현실로 받아들인 자는 분명 세상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되는 것이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아무리 세상에 좋은 것들이 쌓여 있다고 해도 그것에 마음 뺏기지 않습니다. 단지 세상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은 빠져나오기 위한 삶이 아니라 오히려 빠져드는 삶으로 보입니다. 점점 세상에 깊숙이 빠져 들어가는 삶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어느 누구를 가리지 않습니다. 모든 자에게 차별 없는 것이 심판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종과 자주자가 굴과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은 임금 왕족 장군 강한 자 가난한 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부흥시켰다고 해서 심판이 피해가지 않습니다. 몇 십억을 헌금해서 예배당을 지어 바쳤다고 해서 심판이 피해가지 않습니다. 세상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가난한 자라고 해서 역시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수십년 교회에 다니고 봉사하고 충성하고 기도하고 성경 봤다는 것으로 심판과 상관이 없을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심판은 그 누구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자입니까? 맞습니다. 인간은 아무런 희망이 없는 자로 세상에 태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고 우리 자신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서 희망이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비록 세상은 돈이 희망이고 출세가 꿈이고 힘이지만, 그 모든 것도 심판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희망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희망 없는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유일한 희망으로 오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생명이요 길이요 진리로 오신 그리스도입니다.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길이 전혀 없는 세상에 단 하나의 길로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그분에게로 나오겠습니까? 어떤 자가 그분이 지신 십자가에만 고개를 돌리고 그분의 피가 흘려진 십자가만 가슴에 안고 살려고 애를 쓰겠습니까? 그는 바로 심판이라는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희망 없는 인생이라는 현실을 깨달은 자입니다. 돈을 벌어 놓으면 뭐합니까? 돈이 생명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결국 죽을 것인데 돈이 죽음 이후의 세계를 책임지겠습니까? 그래서 죽음을 현실로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돈이 전부고 돈에 의해서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지만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우리의 생명을 책임지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마음이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전부로 알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어린양의 진노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린양이 심판을 한다는 뜻입니다. 마 25:31-34절에 보면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때에 임금이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 보면 예수님이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구별을 한다고 합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이 이쪽 저쪽으로 구별하는 것이 심판입니다. 그리고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는 말씀을 합니다.

마지막때 심판에서 살아남을 자는 어린양의 오른편, 다시 말해서 어린양의 편에 서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너도 나도 '내가 어린양 편에 서서 살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 진짜 어린양 편에 서서 산 사람인가를 구별하기 위해서 세상에서 죽임을 당한 자로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어린양 편에 서서 산다는 것을 죽임을 당한 어린양과 함께 죽임을 당한 자 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줌으로서 어린양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산자들로 하여금 어린양 편에 서서 살았다는 말을 할 수없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이라면 죽어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을 내 백성으로 인정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섯째 인을 뗄 때 제단 아래에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어린양 편에 서서 살았던 사람이고, 심판은 하나님이 이들의 호소를 들으심으로서 세상에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지금 심판이 중지되어 있는 것은 자기 백성들의 수가 차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현실이 눈에 안보인다고 해서 철저히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현실에 급급한 채 예수도 팽개치고 십자가도 짓밟으면서 오로지 내 교회, 내 가정, 내 자식을 현실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어린양의 진노로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자기 백성을 찾고 있는 이 현실 앞에서 우리가 기껏 예배당에 신경 쓰고 돈에 신경 쓰면서 모이는 것이 옳습니까? 항상 세상에 되어질 마지막 심판을 현실로 인정하고 살아가기 바랍니다. 심판이라는 현실 앞에서 진심으로 우리에게 필요하고 가치 있고 귀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시고 사라지고 없어질 것에 미련을 두기보다는 우리의 유일한 희망으로 오신 그리스도에게 모든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그런 신자로 살아가기를 소원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 교회가 잘됐으면 하는 욕심이 일어날 때 어린양의 진노로 세상에 다시 오시는 주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이런 말들이 어리석은 말 같고 허황하고 비현실적인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런 어린양의 진노가 임했을 때 과연 누구에게 "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는 말씀이 주어질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