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7:1-3 세상 현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을 당한 십자가의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세상은 결단코 희망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르면서 하나님이 세상에 사랑과 자비로움을 풍족히 베풀어서 이 땅을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주기를 원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 세상에 십자가의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린 상태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결코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죽인 곳으로 바라봅니다. 심판의 대상으로만 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 편에 서서 산다면 세상을 바라볼 때 십자가의 사건이 일어난 장소로 보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세상에 대한 시각이 결코 긍정적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갈 2:20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것이 아니요 오직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만약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고 있고 자신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는 상태라면 세상을 보는 눈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다면 그리스도를 죽인 세상에 대해서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것은 세상을 심판의 장소로 보고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십자가를 단지 우리를 천국 보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로 여겨버리기 때문에 세상과 십자가의 관계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단지 옛날에 못된 유대인들이 죄없는 예수님을 죽인 흘러가 버린 과거사로만 생각해 버리기 때문에 지금의 이 세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로 단정짓고 살아갑니다.

이런 시각으로 세상을 둘러보면 세상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인간들끼리 마음을 모으고 힘을 합해서 좋은 세상 만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애를 쓰며 잘 살아가고 있는 곳으로만 보여집니다. 악한 일을 한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서 자기 재산을 털어 내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사람도 많은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잘만하면 살기 좋은 땅으로 만들 수가 있다고 여깁니다. 즉 세상의 심판이라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설령 종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그때의 문제이지 종말을 지금부터 생각하면서 겁을 내고 두려워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을 보시는 시각은 전혀 다릅니다. 마 24:37-39절을 보면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세상을 평가하시는 시각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부정적인 모습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세상이 볼 때는 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삶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종말의 현상을 이처럼 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삶을 들어서 말씀합니다. 세상이 볼 때는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이 예수님이 보실 때는 단지 종말의 현상으로만 보여질 뿐입니다.

노아의 때 사람들은 종말을 의식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면서 종말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옆에서는 종말을 의식하고 방주를 만들고 있는 노아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노아 시대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종말은 전혀 자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현 시대를 바로 노아의 때와 같이 평가합니다. 즉 종말을 의식하지 않은 삶을 종말의 현상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종말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 예수님 말씀대로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면서 종말을 의식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단지 종말 때까지 심판 때까지 잠시 유보되어 있는 삶에 지나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삶 자체가 종말을 피할 수 없는 이유가 아니라 종말을 의식하지 않은 삶이 바로 종말을 피할 수 없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계 21:1절에 " 내가 하늘과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진심으로 이 말씀대로 그대로 되어질 것을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날마다 딛고 살고 바라보고 사는 하늘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습니다. 그리고 처음 하늘과 처음 땅, 즉 지금 우리가 딛고 사는 땅과 하늘은 다시 있지 아니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땅이 사라지고 하늘이 사라진다면 땅위에 있는 것도 하늘에 있는 것도 결코 보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땅위에 있는 것을 영원한 것으로 여기고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라지고 없어질 땅에서 내 사업이 잘된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에게 희망이 되겠습니까? 물론 종말을 없애버리고 생각한다면 희망일 수도 있고, 기쁨이고 즐거움이고 힘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땅의 침몰과 함께 침몰해버릴 것이 세상 것이라면 내 사업이 잘된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허무로 끝나버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종말은 분명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종말이라는 말에 대해서 인상을 찌푸립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조차 종말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왕이면 희망적이고 건설적인 말을 해주지 부정적인 말은 될수록 하지 말라고 요구합니다. '교회가 종말, 심판 이러한 극단적인 말만하면 세상이 교회를 싫어하게 될 것이고, 세상이 교회를 싫어하면 전도를 하는데 지장이 있으니까 굳이 세상이 싫어할 말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말이니 심판이니 하는 말은 단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로만 여기고 장차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으로 그치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말을 인정해주면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세상은 희망적인 말을 기대합니다. '열심히 하면 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러한 희망적인 말을 통해서 힘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망한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회개하라' 이런 말에 대해서 누가 달갑게 들으려고 하겠습니까?

결국 세상은 세상의 현실을 모릅니다. 하지만 신자는 세상의 현실을 압니다. 지금 세상이 어떤 처지에 있는가를 환하게 아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세상의 현실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이 시간에는 이 세상이 처한 현실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 후에 내가 천사가 모퉁이에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권세를 얻은 천사를 향하여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요한은 환상 중에 세상의 현실을 목격했습니다. 그 현실은 이와 같습니다. 1절에 보면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서 있습니다. 땅 네 모퉁이라면 동서남북을 의미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네 천사가 각기 동서남북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네 천사가 동서남북 땅 사방에 위치한다는 것은 결국 이 땅 전체를 네 천사가 주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천사가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을 주관한다고 하니까 아마 허황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인간의 열심과 힘과 재주에 의해서 주관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네 천사가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들고는 바람이 땅이나 바다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땅과 바다와 나무에 분다는 것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네 천사가 사방의 바람을 붙들고 있다는 것은 결국 지금 심판은 유보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세상 현실입니다.

세상은 비록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안심하고 자기 일에 집착한 채 세상에서 자기 소유를 더 많이 모아보겠다고 아등바등 살아가지만 세상 현실은 네 천사에 의해서 심판이 유보되어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네 천사가 붙들고 있는 바람을 놓아버리면 그순간 세상은 사라지고 맙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세상 현실을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네 천사가 땅 사방에서 바람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심판이 유보되어 있다는 이 말에 황당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세상 현실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네 천사가 땅과 바다와 나무를 해하지 못하도록 바람을 붙들고 있습니까? 2절에 보면 해돋는데로부터 올라오는 또 하나의 천사가 있습니다. 해 돋는 쪽은 동쪽입니다. 즉 동쪽으로부터 올라온 천사가 네 천사에게 지시하기를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를 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심판이 유보되어 있는 것입니다.

동쪽으로부터 올라온 천사란 생명을 가지고 오는 천사라는 뜻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하나님이 생명나무를 감추어 버립니다. 그곳이 바로 에덴동산 동편이었습니다. 따라서 동쪽이란 생명과 연관이 있는 것이고 생명을 가지고 오는 천사가 하나님의 종들에게 인치기까지 심판이 유보된 것입니다.

계 6:11절에 보면 "각각 저희에게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고 말씀합니다. 제단 아래 있는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세상을 언제까지 심판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호소하자 '죽임을 당한 종들과 형제들의 수가 차기까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현실입니다. 네 천사가 바람을 붙들어서 땅과 바다와 나무를 해하지 못하도록 붙들고 있는 것이나 마태복음에 요한이 말한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다는 것이나 같은 의미의 말인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이 현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삽니다. 종말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고 현실이라고 믿고 살아갑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지진이 있고 기근이 있고 전쟁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것은 단지 자연의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볼 때 종말은 희망적인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종말은 희망입니다. 동쪽에서 올라온 천사가 네 천사로 하여금 하나님의 종들을 인치기까지 세상을 해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 이것은 참으로 희망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멸망 속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삼으신 자를 인친다는 것, 그리고 그 수가 차기까지 심판은 유보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희망이지 않습니까?

심판의 유보는 하나님의 종들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은 죽음 속에서 생명을 얻었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동쪽에서 올라온 천사가 하나님의 종들을 인치기까지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소위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나 희망적인 말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인친 자가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데, 멸망 속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시겠다고 한다면 그것을 거부할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 누구나 기뻐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이 곧 고난을 의미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는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거부하는 방식으로 믿는 것입니다. 성경도 좋게 들려지는 말씀은 취하고 거부감이 오는 말씀은 밀쳐내는 방식으로 대합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도 종으로 부름 받았다면 하나님이 더 특별히 사랑하실 것이고 특별히 사랑하신다면 남보다 더 좋은 것으로 가득 채워줄 것이 아닌가를 상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종 = 고난'이라는 원칙이 적용될 때는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종으로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고난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는 것은 좋지만 고난은 싫다'는 것은 없습니다. 종이란 내 삶을 내가 계획하고 내가 원하는 쪽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원하시고 주인이 시키는 쪽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크림빵을 주셨는데 내가 좋아하는 맛있는 크림만 골라먹고 나머지 맛없는 밀가루 부분은 버리겠다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모두 나에게 주어진 것으로 여기며 사는 것이 종의 삶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이든 좋아하는 것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좋아하고 자신이 기뻐하는 것만 골라 가지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신자와 신자가 아닌 자의 구별이 드러납니다. 신자 아닌 자는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것이 주어질 때 불평을 하고 거부를 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깨닫고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종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이 부르신 종으로서 성령의 인침을 받은 자라면 분명 심판을 의식하고 살아갈 것입니다. 심판을 의식하고 산다면 잠시 잠간의 고난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도들은 세상에 대해서 비관적인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에 소망을 두고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불만이 있기 때문도 아니고 원한이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단지 세상 현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현실이 어떻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세상에 대한 미련에서 멀어지고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고난을 잠시 잠간의 고난으로 여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잠시 잠간의 고난과 영원한 생명을 맞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으로 사십니까? 잠시 잠간의 고난과 영원한 생명을 맞바꿀 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잠시 잠간의 고난을 피하기 위해서 영원한 생명을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 여러분의 마음이라면 여러분은 현재의 삶에 대해서 전혀 불만이 있으면 안됩니다. 주어진 삶에서 그리스도만 드러내고자 힘쓰는 삶이어야 합니다. 내 고생하는 것보다도 주님의 은혜가 드러나고 증거 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길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고난이란 고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고생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고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고난이란 주님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만 아니라면 떳떳하게 자랑하면서 자신의 일을 드러내면서 살아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를 알기 때문에 자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못난 자로 여겨지고 죄의 모습만 발견되고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자신을 치면서 애통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으로 인해서 자신이 죽어지고 포기되어지고 잘남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고 오직 주님의 은혜만 남는 삶, 이것이 바로 고난입니다. 이것이 신자로서 정상적인 삶이고 세상의 현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삶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종들이 다 채워질 때까지 심판을 유보되어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안다면 어떤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종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항상 하나님께 이렇게 물으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 세상은 심판이 유보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 현실입니다. 이 현실을 아는 자가 신자입니다. 이 현실을 알기 때문에 세상에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기 위해서 오신 주님에게만 모든 희망을 두고 삽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만 좋아하고 그 분이 오실 날을 기다리면서 사모하고 애통하는 날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