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7:4-8 인맞은 자

사람은 누구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현재가 고달프고 힘들다고 해도 언젠가는 나아지겠지라는 희망을 가지고 현실에 낙심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삽니다. 혹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과 여건으로서는 실현될 수 없는 희망이라면, 혹시 어떤 행운이 주어져서 나의 희망이 실현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면서 현재에 낙심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또는 자신은 이루지 못해도 내 자식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기도 합니다. 지금의 고생이 계속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언젠가는 좋은 날이 있을 것이 아니냐는 희망으로 자신을 위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희망이란 결국 '환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환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환상, 결혼에 대한 환상, 자식에 대한 환상, 미래에 대한 환상, 이러한 환상 속에서 마치 꿈을 꾸듯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젊은 청년이 여행을 가기 위해서 열차를 탔을 때 상상하는 것은 옆자리에 예쁜 아가씨가 앉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생각은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쁜 아가씨가 앉았을 때 어떻게 대화를 시작할까? 대화를 하고 친해지면 연락처를 주고받고 나중에 사귀게 되는 끝없는 상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 환상은 늙은 할머니가 앉음으로서 무참히 깨어지고 말지만 말입니다.

또 부모에게는 자식에 대한 환상이 있습니다. 이 아이가 잘 커서 훌륭한 인물이 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그런 자식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환상도 역시 자식이 성장함에 따라서 점차 허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누구나 미래를 꿈꾸며 살아가고 있지만 결국 허물어 질 수밖에 없는 환상으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이 환상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현재에 대한 불만족 때문입니다. 자신보다 더 풍족하게 살고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의 현재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되고, 자연히 불만거리가 없는 세상을 희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환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환경을 상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는 교회에 대한 환상을 가지기도 합니다. 목사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교회의 모습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천국 같고 목사를 잘 위해주고 아무런 문제도 말썽도 없는 그러한 교회를 꿈꾸며 목회라는 것을 합니다. 결국 예수님보다는 교회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환상 속에는 인간의 모든 욕망이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욕망에 의해서 환상의 나라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상의 나라에는 자기 실패가 없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자기 실패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의 의지나 소망과는 상관없이 우리를 실패하게 하기도 하고 고난으로 밀어붙이기도 합니다. 이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욕망이 사람으로 하여금 환상을 가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환상에는 자기 실패나 고난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실패와 고난이 없는 것을 꿈꾸며 살아가는 인간으로서는 항상 희망적인 말을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실패했다고 해도 실패가 전부가 아니라 잘만하면 다시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 인간에게 힘을 주고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을 종교가 하고 있습니다.

실패한 사람들이 종교에 기웃거리는 것은 뭔가 희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모여든 사람에게 항상 희망적인 말을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으로 말하기보다는 우리의 희망을 이루어 주는 '알라딘의 요술램프'로 말을 합니다. 자기에 대한 절망의 십자가가 아닌 희망의 십자가로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고난에 대해서 입을 다물어 버린 것, 이것이 바로 교회의 타락입니다. 사람들이 고난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고난을 언급한다는 것 자체를 부담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단지 예수님 한분의 고난으로 말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에 감사하면 된다는 것이 고난의 전부입니다. 이러한 교회가 생각하는 고난은 결코 축복일리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복을 원하는 것은, 복을 자기 환상의 실현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소원의 성취를 복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는 것은 자신의 환상을 실현하기 위한 욕구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피하고 싶고 거부하고 싶은 고난을 축복으로 말한다면 그 말에 대해서 환영을 할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설사 고난을 축복으로 말한다고 해도, 고난을 잘 참고 견딤으로서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 고작일 것입니다. 즉 복을 주기 위해서 우리를 고난으로 시험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고난에 대한 시각은 '죄에 대한 징계'입니다. 즉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징계로서 고난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9장을 보면 이 생각을 뒤집어 버리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시는데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우리들의 시각으로 볼 때는 불행입니다. 이것을 불교식으로 이해하면 전생에 지은 죄가 많아서 그렇다고도 할 것입니다. 이것을 '업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제자들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스승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누구 죄 때문도 아니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려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즉 죄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거지로 산 것이 징계를 받았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은 나사로를 통해서 세상에서 좋은 것을 받는 것이 결코 복이 아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나사로를 거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도구로 쓰시는데 소경으로 태어나게 해서 쓰시고, 거지로 살게 하셔서 도구로 쓰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에 나사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거지가 필요하고 소경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사로를 선택해서 거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나사로에게 정해주신 역할이며, 그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도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쓰여진다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일에 쓰여지면 내 이름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를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 부름을 받은 선지자나 사도들은 그 인생이 온통 고난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택함 받은 자에게 왜 그러한 고난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있는 고난도 없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고난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확실히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먼저 신자는 예수님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즉 예수님을 잘 믿으면 우리를 복되게 하고 하는 일도 잘되게 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인생을 인도해줄 것에 대한 기대는 몽땅 환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예수는 인간의 욕망에 의해서 조작되어 만들어진 가짜 예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가짜 예수는 철저하게 인간 편입니다. 인간 편에 서서 인간의 모든 소원과 기대를 들어주는 예수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분입니다. 이것을 소홀히 하면 안됩니다. 성경의 중심인 예수님의 모습은 십자가를 지신 분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요한계시록의 중심은 어린양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처음 목격하고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린양이란 힘없는 자를 뜻합니다. 때리면 맞고 죽이면 죽는 나약한 모습이 어린양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메시야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메시야는 용사 같은 힘있고 용맹한 자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메시야에 대해서 이러한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때 그들은 로마에 의해서 압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연 그들은 로마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소원일 수밖에 없었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한 자신들의 힘은 너무나 미약했기 때문에 결국 메시야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메시야의 오심을 자신들의 해방을 위해서라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야에 대한 환상입니다. 환경을 개선해 주기 위해서 오시는 메시야를 꿈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스스로 메시야로 자처하고 나선 인물은 너무나 보잘것없고 나약한 인물이었습니다. 자신들의 환상을 실현시켜주기는커녕 저런 인간을 메시야로 믿었다가는 더 망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분을 메시야로 인정한다면 자신들의 모든 꿈과 기대와 소망과 환상이 일시에 무너져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을 두려워 한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전에 이 세상으로부터 단절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즉 자신들의 환상을 지키기 위한 방책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은 자기 환상을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을 찾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에게서 이중적인 모습을 기대하게 됩니다. 즉 우리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린양이신 예수님으로 존재하고, 우리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도와주기 위해서는 힘있고 능력 있고 기적을 베푸시는 강한 예수님으로 존재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삶을 사랑하고 그 삶을 따라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믿음을 예수님이 나를 도와 줄 것이라고 믿는 것으로 오해를 해버립니다. '예수님은 나를 도와줄거야. 기도하면 내 일이 잘되게 해줄거야. 믿습니다' 이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고집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자신이 믿는 것이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죽은 데서 같이 죽고 사는 데서 같이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난을 피하고 싶어하고 고난을 저주처럼 생각하면서 거부하고 자신의 환상 속에서 축복을 생각하지만, 진심으로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는 신자야말로 '고난은 축복이었다'는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육신의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을 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영의 인간이 되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택한 자는 고난 가운데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인맞은 자의 수에 대해서 말합니다. 인맞은 자란 성령이 인친자란 뜻인데 성령이 인쳤다는 것은 '이가 바로 나의 택한 종이다'라는 확증이고 보증입니다. 고후 1:22절에 보면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 말씀하는데, 성령은 곧 보증인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증합니까? '이가 바로 하나님이 택한 자이고 부르신 종이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보증하기 위해서 성령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런데 성령이 무엇으로 보증하는 것입니까? 고난으로 보증합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임한 자의 모습은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성령이 오심으로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증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이가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이라는 것을 고난을 통해서 증거 하신 것입니다. 즉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들이심이 증거된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임한 자의 모습은 예수님과 똑같이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뜻에 순종하는 것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성령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 모습은 제각각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신 증거는 예수님이 이 땅에 사셨던 그 모습으로만 드러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이 예수님을 이끌어 간 것처럼 우리 역시 그렇게 이끌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고난입니다.

따라서 고난은 죄지은 자에게 내려지는 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자를 세상에 드러내고 증거 하는 수단으로 의로운 자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 대신 고난 받으셨기 때문에 내가 천국가게 되었다고 하면서 고난은 단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으면 됐지 내가 고난 받을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믿어주고 감사해 주는 것으로 고난을 해결해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난이 무조건 우리를 천국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자기 백성을 찾으시는 행위입니다. 즉 주님의 고난을 이해하고 주님의 고난 앞에서 자신의 환상과 모든 기대를 포기하고 주님이 피흘리심만을 소망으로 삼고자 할 때, 그가 바로 주가 죽으신 자리에서 함께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찾으시는 자기 백성입니다. 예수님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힐 자를 찾으시는 것이지 세상에서 위대하게 될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할 자질을 가진 사람을 찾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를 이해하는 자만이 주님의 고난을 이해하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되어지는 것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세상 시각에서는 결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러한 자를 '성령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인생의 모든 환상이 허물어지고 목표가 수정되고 생각이 뒤바뀌는 인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이러한 생각으로 뒤바뀌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이 오심으로 가능합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를 주님이 가신 인생으로 밀어붙이시고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인맞은 자의 수는 144,000명입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에 각각 12,000명씩 해서 합이 144,000명입니다. 이 수가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된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물론 144,000명이라는 수는 실제적인 수가 아니라 상징적인 수입니다. 또 한 이 세상에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단체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144,000이란 수는 12지파에 각각 인맞은 자의 수가 12,000이라는 것에서 나온 수입니다. 각 지파의 수가 줄었다 늘었다 하지 않고 변함 없이 12,000명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확정'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예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하나님의 오른손에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생명을 얻을 자의 명단이 적혀 있습니다. 그 책이 예수님에 의해서 공개가 됩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생명책의 명단이 공개되었다는 것은 구원받은 자의 이름이 공개된다는 것이 아니라 생명책에 기록된 자기 백성이 어떤 자인가가 세상에 공개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구원받은 자의 이름이 누구냐?'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자기 백성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느냐?'가 공개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그 모습과 일치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모습은 인간으로서는 보여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모습이란 성품이나 외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방식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사고방식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산다면 그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백성 아닌 자의 구분은 고난 속에서 확고하게 증명되는 것입니다.

열두 지파는 고난 당한 어린양의 운명에 동참하는 무리를 의미합니다. 어린양은 계 5:12절에서 말한 대로 죽임을 당한 어린양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된 수,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정된 자들은 결국 죽임을 당한 어린양에 동참할 자로 예정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안에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성령 받은 자는 결국 고난 받는 자로 예정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축복 받은 것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즉 복을 많이 받아서 세상 것으로 풍족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표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소위 복받은 것을 은혜 받은 표로,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진 표로 말하는데 그렇다면 선지자나 사도들은 복받은 자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을 통해서 형성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고난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 백성'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의 열 두 지파는 어린양의 아들을 의미합니다. 어린양의 아들이란 어린양의 운명에 그대로 동참된 자라는 뜻입니다. 고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받는 자의 운명에 집어넣어진 자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성령이 오심은 바로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이 운명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세상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성도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심으로 십자가를 이해한 자는 이 특이한 성도의 인생에 대해서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과 동일한 운명의 길을 가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꿈꾸며 살아가는 환상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인생에 대해서 이해하시겠습니까? 성도를 굳이 고난으로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이해하신다면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항상 주님을 생각하시고 어린양으로 오신 주님의 인생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십시오. 사는게 힘드십니까? 주님은 더 힘든 삶을 사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이 쓰시는 인생입니다. 자기 백성을 부르시기 위해서 여러분의 모든 것을 차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차압하신 인생에 우리의 꿈과 비전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환상을 가지고 사는 것은 내 인생을 끝까지 내 것으로 지켜보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인생이 아니라 철저히 내 것으로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질적인 인간의 사고방식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쓰시겠다면 마음대로 쓰시라는 마음이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인맞은 자에게서 보여지는 특이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고난 받는 백성, 그들이 바로 인맞은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