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7:9-12 구원의 노래

영생에 대한 문제는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되어지고 결정되어진 사항입니다.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되어지고 결정되어 졌다는 것은 영생을 염두에 둔 인간의 활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비록 그 활동이 우리가 보기에 지극히 선한 것으로 보이고 기독교적인 것으로 보인다고 할지라도 영생의 문제에는 하등의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영생은 이미 결정되어진 사항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나를 마음에 합한 자로 보시고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겠지'라는 우리들의 생각은 영생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에 도전하는 것이 됩니다.

물론 다들 영생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복음이지만 일단 구원을 얻고 난 뒤에는 구원을 얻은 자의 표가 분명히 나타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이미 얻은 구원을 지키고 유지하는데는 구원을 얻은 자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은 자에게는 믿음과 행함 둘 다 같이 병행되어야 하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함을 생각하면서 '이런 나를 하나님이 구원하실까?'라는 불안감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감은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믿음의 무지는 자기 행함이 구원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오해함으로 드러납니다. 이러한 무지는 성경을 보는 시각도 자기 구원을 중심으로 보게 합니다. 성경에 영생을 얻는 방법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거할 뿐입니다. 요 5:39절에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즉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으니까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만 성경을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가 아닌 자신의 구원이나 교회의 부흥에 관심을 두고 성경을 대한다면 복음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대해서는 소경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이라는 새로운 세계는 교회의 부흥이나 우리의 구원과 연결된 나라가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나라일 뿐입니다. 따라서 그 나라의 백성은 자연 그리스도에게만 모든 마음이 기울어져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세계에서는 미완성이 없습니다. 복음 자체가 이미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완성된 복음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생은 복음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복음 자체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에 대해서 의심을 가집니다. 복음만으론 불안해합니다. 복음 안에 자기 행함이 있어야 비로소 충분한 복음으로 인정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믿음 없는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 무지하고 그리스도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있기 때문에 이들이 행동하는 행함은 오히려 자기의 의를 부각하고 높이는 결과로 나타날 뿐입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충분한 완성된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자기 행함이 있든 없든 이미 복음으로 충만해져 있기 때문에 자기의 의를 부각하기보다는 복음만 부각하게 됩니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9절에 보면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라고 말씀합니다. 요한은 어린양 앞에 흰옷을 입은 큰 무리가 서 있는 것을 봅니다. 흰옷을 입었다는 것은 죄가 주님의 피로 깨끗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 1:18절에 보면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주님의 피로 인해서 깨끗함을 입은 사람들이 흰옷을 입고 서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실제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어린양 앞에 흰옷을 입고 서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깨끗함을 입은 자, 이것이 어린양 앞에 선 신자들의 상태입니다.

깨끗함을 입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충분하다는 것을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입은 자들에게서 나올 노래는 무엇이겠습니까?

10절에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라고 말합니다. 흰옷을 입은 자들이 어린양 앞에 서서 부르는 노래는 우리가 생각할 때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닌 것처럼 들립니다. 구원하심이 어린양에게 있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상식으로 되어 있는 말이 아닙니까? 때문에 좀 더 대단한 것으로 노래를 불러야지 겨우 그것을 노래로 부르느냐는 생각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무엇이 그리스도에게 영광이 되는가를 알지 못한 사람들이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흔히 교인들이 대표기도를 할 때 고민스러워 하는 것은, 기도를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기도를 더듬더듬하거나 소위 유치한 말로 하거나 금방 끝내버리면 기도를 잘못한다는 인상을 남기게 되고, 기도를 못한다는 것은 결국 믿음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를 잘하려고 신경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그대로 나타내는 자신의 마음이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궁핍하고 목말라하는 자신의 마음 상태를 솔직히 드러내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에 대해서 궁핍함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기도할게 없습니다. 기도할게 없으니까 고민이 되는 것입니다. 5분 10분을 무슨 말로 때워야 할지 고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기도를 책망하신 것도 사람에게 보이는 기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자신을 높이려고 한 것입니다. 대단한 기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를 생각하는 기도를 하게 하는 것입니다.

대단한 기도란 없습니다. 잘하고 못한 기도도 없습니다. 단지 기도냐 기도가 아니냐만 있을 뿐입니다. 문장을 잘 짜서 듣기 좋은 말을 나열한다고 해서 좋은 기도가 아닙니다. 본문에서 어린양 앞에 선 흰옷을 입은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대단한 노래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런 노래입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말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보시기에는 기쁨이 되는 노래입니다. '구원이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습니다'는 노래는 인간의 실체와 하나님과 예수님을 그대로 드러낸 노래입니다. 기도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공로가 포기된 기도, 그리스도의 의만 고스란히 드러나는 기도, 이것이 바로 주님께 기쁨이 되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모두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습니다'라는 한마디의 기도가 주님께만 모든 영광을 드리는 기도입니다.

구원하심이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다는 것은, 구원은 오직 하나님과 어린양으로부터 주어진 것이지 우리의 공로가 보태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어린양의 피로 깨끗함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이며 찬양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노래를 듣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공로를 포기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마귀에 빠진 자들입니다.

현대 교인들은 이상하게 마귀라는 존재에 대해서 소홀합니다. 아예 마귀의 존재성에 대해서도 인정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마귀에 대해서 말을 하면 이상한 교리에 빠진 사람으로 취급을 해버립니다. 또 설령 마귀에 대해서 말을 한다고 해도 모두가 엉뚱한 마귀를 얘기합니다. 즉 마귀가 아닌 것을 마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귀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결국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마귀의 존재에 대해서 얼마나 아십니까? 마귀는 귀신이나 드라큘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귀신이 부적을 싫어하고 드라큘라가 마늘과 십자가를 싫어하는 것처럼 마귀는 신자가 기도하고 성경보고 찬송 부르는 것을 싫어한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귀에게 이기기 위해서는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을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곧 마귀에게 빠져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마귀가 어떤 식으로 활동하고 무엇에 목표를 두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마귀가 인간에게 가장 처음 접근한 때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마귀가 하와에게 접근을 합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합니다. 그냥 따먹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로서 유혹을 한 것입니다.

마귀는 무엇 때문에 인간에게 접근해서 선악과를 따먹도록 하는 것입니까? 단지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붸겨나게 하는 것이 목적이겠습니까? 마귀의 목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라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맨처음 창조하신 나라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존재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 기쁨이었습니다. 인간도 하나님의 의도대로 존재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사명은 땅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종족 번식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흔히 말하는 문화사명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신 땅이 말씀에 종속된 인간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기 위해서 마귀가 인간에게 접근한 것입니다. 즉 인간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망치는 것이 목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영광돌리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를 훼손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제공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인간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인간에게 접근해서 하나님 같이 될 수 있는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 같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 유혹에 빠짐으로 인해서 은혜로 살아가야 하는 하나님 나라의 창조 질서가 깨어지고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악하고 더러운 세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결국 마귀가 목표로 하는 것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나라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 목표를 가지고 마귀는 지금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은혜로 여기며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지 못하고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곧 마귀에게 빠진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귀와 싸울 자를 보내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마귀와 싸울 자는 어떤 모습으로 오시겠습니까? 마귀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자기 중심'입니다. 자기 중심이기 때문에 남 때문에 희생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자기 유익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기도를 해도 자기 유익을 위해서 하고 찬송을 불러도 자기 유익을 위해서 부르는 인간이 되버렸습니다. 이것이 마귀에 빠진 자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마귀와 싸울 자로 오신다면 그분은 자기 사랑이 없는 자여야 합니다. 자기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자여야 합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마귀는 항상 하나님과 인간이 은혜로 연결되는 것을 훼손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조롱하도록 하고 그리스도의 중보적 역할을 무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조롱하도록 하는 것은, 힘을 의지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좋은 것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역시 좋은 것을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떡과 영광과 능력,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추구하는 좋은 것입니다. 그것으로 예수님을 시험함으로서 하늘의 좋은 것을 위해서 오신 메시야를 땅의 좋은 것을 위해서 존재하는 메시야로 뒤바꾸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러한 마귀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귀가 인간에게 제공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좋은 것을 '복'이라고 부르면서 예수님이 이러한 것을 제공해주기 위해서 오셨다고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마귀의 활동 대상은 하나님의 택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택한 자들로 모여집니다. 그들은 모여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노래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이것을 훼방하고자 합니다. 택한 자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 이상으로 마귀 역시 쉬지 않고 활동하며 택한 자를 유혹합니다.

택한 자는 새하늘과 새땅을 기다리며 사는 자들입니다. 새하늘과 새땅이 온다는 약속 때문에 보이는 세상을 현실로 보지 않고 사는 자들입니다. 오직 주님의 공로로 살아감을 고백하고 주님의 은혜로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감사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었으니 우리도 주님을 따라 살게 해달라고 소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택한 자를 향한 마귀의 활동은 주님의 공로를 흐지부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공로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역시 세상 것이 있어야하고 힘이 있고 돈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여기게 만듭니다. 따라서 마귀에 빠져 사는 사람은 주님의 피의 공로는 작게 보이고 세상이 더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 없이는 살아도 돈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느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활동 목표이기 때문에 '구원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있다'는 고백은 마귀 편의 사람과 하나님 편의 사람으로 확실하게 구분되는 기준점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구원이 어린양에게 있다는 것은 인간의 공로는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고백입니다. 날 때부터 마귀의 사고방식으로 태어나는 인간에게서는 있을 수 없는 고백입니다. 따라서 구원이 어린양에게 있다는 고백을 하게 되어진다는 것은 마귀 편의 사람에서 하나님 편에 살아가는 인간으로 뒤바꼈다는 증거이고, 이것은 오직 성령이 인친자에게서만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에 이 고백은 하나님이 택한 자로서 인 맞은 자들에게서만 보여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별 것 아닌 것 같은 노래 하나가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임한자에게서만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대단한 노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백을 했다고 해서 '난 됐다'고 하면서 안심하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끊임없이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택한 자를 유혹하는 것이 마귀입니다.

우리 속에서 외치면서 은혜의 고리를 끊고자 애를 씁니다. 구원이 어린양에게 있음을 고백할 때 '그래도 구원받은 자다운 행동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들게 합니다. 마귀는 인간의 의와 하나님의 의를 나란히 생각하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를 자랑한다는 것은 내 의는 의가 아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흰옷을 입은 성도들은 자신이 깨끗함을 입은 모든 공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피흘리신 어린양에게 있음을 노래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증인으로 사는 것은, 구원이 어린양에게 있음을 증거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전도고 선교입니다. 그런데 소위 전도하고 선교한다는 사람들이 주님의의가 아닌 인간의 의를 내세우고 자랑함으로서 전도를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고 말합니다. 찬송, 영광, 지혜, 감사, 존귀, 능력, 힘,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서 밥을 먹으며 살아갑니까? 택한 자로서 할 일은 주님의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증인으로 증거할 것은 '구원은 어린양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무엇을 노리고 활동하는가를 잊지 마십시오. 마귀는 하나님의 나라를 훼방하는 목적으로 활동합니다. 여러분을 은혜의 고리에서 끊는 것이 목적입니다. 주님의 공로가 아닌 여러분의 공로에 마음을 두게 하는 것이 마귀입니다. 여러분이 택한 자라면 택한 자로서 부를 노래는 하나입니다. 구원은 어린양에게 있다는 것, 이 노래 하나면 여러분은 구원받은 자고 성령 받은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