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7:13-17 환난에서 나온 자

사람들은 성경을 단지 '좋은 말씀이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대합니다. 사람을 위하는 말씀일 것이고, 도덕적으로 살고 착하게 살아라는 좋은 말씀이 있을 것이고, 예수님을 잘 믿으면 천국 간다는 류의 말씀들이 기록된 것이 성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말씀들이 하나같이 인간들을 곤란하게 하고 난처하게 하는 말씀일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합니다. 사랑의 많으신 하나님의 말씀인데 어떻게 우리를 곤란하게 하고 난처하게 하는 말씀이 있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하나하나에는 사랑이 듬뿍 담겨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 5:11-12절에 보면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있는 모습은 착한 일이나 교회에 대한 열심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핍박을 당하고 모든 악한 말을 듣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의 상태라고 말씀합니다. 이에 대한 증거가 선지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들이 욕을 먹고 핍박을 받고 백성들로부터 모든 악한 말을 듣고 거슬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말씀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이것이 곧 복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라면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핍박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예수님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요 15:18-19절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신자가 예수님께 속했다는 증거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으로 드러난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세상 자체가 예수님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세상이 예수님을 싫어하고 미워한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우리들의 상식과는 전혀 거리가 먼 얘기이지 않습니까? 우리들의 종교적인 상식으로는 세상은 결코 예수님을 미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희생한 분이시고 착한 분이고 좋은 말씀을 많이 하신 분인데 왜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겠습니까? 미워하기는커녕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정해서 존경하고 본받자고 외치고 있는 분이 아닙니까? 아무리 둘러봐도 우리 주위의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예수님은 세상이 나를 미워하고 나에게 속한 자도 미워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이러한 점이 성도로 하여금 난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살고 싶은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세상이란 육신이 몸을 담고 살아가는 공간입니다. 때문에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곧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것이고, 삶의 공간인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당한다는 것은 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누구라도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하지 미움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이 성도를 미워 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미워할 것이라는 필연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 속한 자로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의 운명입니다.

그러면 왜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입니까? 요 7:7절에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인정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악하다고 증거 하신 것 때문에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 편에서 세상을 볼 때는 부정적인 면도 물론 있지만 긍정적인 면도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든지 노력하면 개선할 수 있고, 좋은 세상으로 만들 수 있는데 긍정적인 면은 보지 않고 세상을 모두 악하다고 증거해 버리니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의 현대 사회는 예수님에 대한 미움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현대 사회는 왜 예수님에 대한 미움은커녕 오히려 성인으로 추앙하면서 경배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세상이 보고 있는 예수는 세상이 악하다고 증거한 예수가 아니라 다른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이라고 하는 교회, 신자가 다른 예수를 세상에 증거하고 있습니다. 착한 예수, 사랑의 예수, 희생하신 예수, 가난한 자 천대받는 자들을 위해서 사신 예수, 겸손하시고 인격이 훌륭하신 예수, 이런 예수만 증거 했기 때문에 세상이 생각하는 예수는 훌륭한 인격과 성품을 가지고 세상에 본이 될만한 행동을 한 예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를 세상이 미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미움을 받지 않는 예수는 다른 예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세상과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마 10:34절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오심은 세상과의 분쟁이지 결코 화합이나 타협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예수를 세상의 화합을 도모하는 예수로 뒤바꿔 버렸습니다. 세상이 악하다고 증거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증거 했을 때, 교회 역시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받게 되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예수님을 반대로 존경을 받고 칭송을 받는 예수로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갈 1:6-8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 말씀하신 대로 다른 복음에는 저주가 있을 뿐입니다.

복음은 세상의 악함을 드러내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미워하는 세상이라면 예수님의 복음의 역시 귀를 막고 싫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증거 하는 복음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교회가 전하는 복음의 정체에 대해서 의심해봐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계 6:9절에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성경은 언제나 말씀을 가진 자의 모습을 죽임을 당하거나 핍박을 당한 자로 증거 된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언제나 우리를 곤란하게 하고 난처하게 한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운명을 그대로 반복하는 자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으셨던 그 운명이 그대로 신자를 사로잡습니다. 그래서 신자 역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길로 가도록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이 힘든 것이고 고난임을 알면서도 그 길을 가게 되어지는 것은, 예수님만이 생명으로 그 마음속에 굳게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고난 속에서 증거 되어집니다. 고난 당하신 어린양에게 동참하는 자가 신자인 것입니다. 본문 13,14절에 보면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흰 옷을 입은 자들은 어린 양의 피로 깨끗함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환난에서 나왔다는 것은 신자는 환난에서 생성되어진다는 말씀입니다.

환난이란 교회에 다니지 못하도록 핍박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돈이 없어서 고생하는 것이 환난이 아닙니다. 타국에 가서 선교하느라고 고생하는 것도 환난이 아닙니다. 흰옷을 입은 자들이 당하는 환난은 예수님이 당하신 환난입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환난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예수님의 환난은 교회를 세우기 위한 고생이 아니었습니다. 태어날 때 방한간 없이 짐승의 우리에서, 그것도 짐승의 먹이통에서 태어난 고생을 환난이라고 말씀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겪으신 고생은 지금도 돈없는 자들은 얼마든지 겪는 고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생을 환난이라고 한다면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자도 얼마든지 예수님과 같은 환난을 겪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환난은 환경에서 주어진 고생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말씀 때문에 당한 환난이었습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환난에서 난 신자가 받게 되는 환난 역시 고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10절의 말씀대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라고 증거 함으로 인해서 주어지는 환난인 것입니다.

14절에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환난에서 나온 자들은 흰옷을 입은 자들인데 그들의 흰옷은 어린 양의 피로 씻음 받은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 씻음 받은 흰옷을 입었다는 것은 나를 깨끗하게 하신 어린 양의 피만 자랑하고 높이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그 모습은 고난과 핍박과 환난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처럼 세상의 악함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 씻음을 입었다는 것은, 자신의 악함을 알게 된 자에게 해당된 말입니다. 자신이 전적으로 악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어린 양의 피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신자되었고,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고백함으로서 이미 구원받은 자가 되었다고 생각해 버리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선포가 계속 되어지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계속해서 세상의 악함을 증거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사람이 선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믿음이 있고 성령을 받으면 사람이 달라지고 변화되어서 예전의 악함이 사라진다고 생각하지만, 믿음이란 우리의 악함을 알게 되고 인정을 하고 자신의 악함을 깨끗케 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어린 양의 피가 나를 살렸다는 것을 믿는 것이지, 성품의 변화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을 교회가 거북스러워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악하다는 말이 교회의 부흥과 유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쉬지 않고 악함을 증거 하는 자에 대해서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세상으로부터 받는 핍박이고 환난입니다. 축복을 외치고 교회 부흥을 외치는 자들로부터 받는 핍박이고, 예수 믿는 것으로 다되는 것이냐? 기도도 하고 성경도 보고 선교도 하고 봉사도 해야 그것이 믿는 것이 아니냐라고 하는 자들로부터 당하는 핍박인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를 믿는다거나 예수를 믿으니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가 아닙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속죄제물 되시는 어린 양의 피의 완전성을 믿는 것입니다. 속죄제물 되신 어린 양의 완전성이 나를 생명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늘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신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관심은 언제나 그리스도고 어린 양의 피로 집중되는 것이지 교회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소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를 소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 3:36절에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말씀 한 대로 오직 아들에게만 영생이 있기 때문에 아들에게만 모든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아들을 향한 관심 집중을 교회로 탈바꿈해서는 안됩니다. 즉 교회에 대한 관심 집중이 곧 아들을 향한 관심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교회란 아들에게만 관심을 두는 자들이 모인 모임이기 때문에, 그러한 교회는 교회가 관심이 아니라 여전히 아들에게만 관심 둘 뿐입니다. 아들만 자랑하고 아들만 높이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아들을 공경하느냐 공경하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곧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이미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이 공경할 수 없는 나약하고 천한 모습으로 보내신 것도 세상적인 시각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아들을 알아보는 자기 백성을 찾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아들을 공경하게 되고 아들만 자랑하게 되지만, 기록되지 못한 자는 끝까지 아들에 대해서 거부하고 반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아들을 좇는 자까지 거부하고 핍박을 하게 되어진다는 것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아들을 공경하지 않고 어린 양의 피를 무시했던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환난에서 나온 흰옷을 입은 자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심판의 보좌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살았던 인생을 기준으로 해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인생에 동참되어져서 살아가는 신자는 자신의 고난을 원망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늘의 일을 아는 자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 것을 알고 있는 자입니다. 헛된 것이 무엇이고 영원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을 모르고 어린 양의 피에 관심을 두지 않는 자들로부터 당하는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인생이 심판의 기준이라는 것은, 어린양의 인생에 동참되어진 신자에게는 위로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고난이 애매한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쓰여지고 있는 고난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의 믿는다고 하는 자들은 저마다 고난을 회피하고자 합니다. 고난은 저주의 흔적이고 형통만을 축복으로 인정하는 분위기 속에서 고난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밀어붙이고, 저마다 예수님의 고난을 이용하려는 무리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 환난으로 난 자들이 있고 이들은 어린 양의 피로 씻음 받은 자로서 흰옷을 입은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바로 이들에게만 있습니다.

16,17절에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25:8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마지막 때 어린 양이 환난에서 나온 자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눈물을 씻어주신다고 할 때 문제는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흘린 눈물이 없다면 씻어줄 눈물도 없는 것입니다. 이 눈물은 돈이 없어서 고생하며 흘린 눈물이 아닙니다. 흔히 고생을 하는 사람을 위로할 때 천국에 가면 하나님이 그 눈물을 다 씻어주신다고 말합니다. 자식 때문에 흘린 눈물도, 돈 때문에 설움을 당하고 흘린 눈물도 하나님이 다 씻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돈 때문에 흘린 눈물은 돈만 있으면 씻어집니다. 자식 때문에 흘린 눈물이라면 자식이 잘만하면 당장에 씻어질 눈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씻어주실 눈물은 돈으로도 성공하는 자식으로도 씻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흘린 눈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때문에 흘린 눈물이기에 주님에 의해서 씻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 물어야 할 것은 과연 나 자신에게 어린 양 때문에 흘린 눈물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돈 때문에 흘린 눈물은 있고 자식 때문에 흘린 눈물은 있는데 어린 양 되신 예수님 때문에 흘린 눈물은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눈물이 없는 이유는 복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예 주님의 고난에 관심도 없고 고난과 상관이 없이 세상을 살기 때문에 눈물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고난에 마음을 두고 사십니까? 그 고난은 주님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신자로 부름 받은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인생에 동참되어진 자로서 주님의 고난에 참여할 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고난을 요구하는 주님의 말씀은 참으로 우리를 난처하게 하지만 세상에 계획되어진 하나님의 일을 안다면 고난으로 인도하는 주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이해해주기만을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 때문에 흘려지는 눈물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고 살기 때문에 자기 문제로 인한 눈물은 얼마든지 있지만, 주님 때문에 흘려지는 눈물은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씻어주실 눈물이 없는 것입니다.

새로운 21세기를 말하면서 희망과 새로운 기대를 말하는 이 시대에 고난이니 눈물이니 하는 말들이 현 시대와 맞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하늘의 보좌에서 베풀어진 심판의 일을 아는 신자라면 21세기니 새로운 희망이니 하는 모든 말들이 참으로 어리석은 일임을 알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보기에는 21세기에 고난을 말하고 죄를 말하고 눈물을 말하는 것이 시대를 분별하지 못한 어리석음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21세기에 전혀 유익 되지 못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바로 이러한 시대 속에서 어린 양만 외치는 자입니다. 구원은 21세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만 있다고 외쳐할 자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린 양만 자랑하면 됩니다. 21세기에 기대 걸지 마시고 어린 양에게만 모든 기대를 걸고 살아가십시오. 그것 때문에 고난이 있고 눈물이 있다고 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눈물을 흘린 여러분을 생명샘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그 눈물을 씻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슴속에 어린 양의 피만 생명으로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