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8:3-5 나팔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인생에 무엇인가를 추가시키기 위한 욕망으로 살아갑니다. 주어져 있는 것으로 잠잠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며 항상 새로운 것, 자신에게 없는 것이 자기 인생과 삶에 자기 것으로 존재되기를 꿈꾸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으로 인해서 인간은 고통 하게 됩니다.

인간의 고통은 대부분이 심적 고통입니다. 그리고 심적 고통의 대부분은 욕망에 대한 불만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욕망하며 살아가는 인간에게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이 결국 고통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도 고통하며 살지만, 여러분 주위에서 여러분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염려하고 고통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원인을 살펴보면 모두가 자기 욕망의 불성취에서 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만족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욕망의 성취는 인간에게 대단한 만족을 느끼도록 해주며, 만족을 느끼는 그 순간은 무한한 행복을 만끽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욕망의 불성취에서는 불행을 느끼게 됩니다.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이 불행과 고통에서 탈출하기 위한 시도가 기도라는 행위로서 표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기도를 할 줄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인간이라도 추구하는 것은 행복이지 불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한 대로 행복은 욕망의 성취에서 느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욕망의 성취를 위하여 각자 신을 찾고 신 앞에 나와서 자기 욕망을 들어주기를 소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기도란 모두가 자기 욕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같이 욕망의 성취라는 목적을 바라보고 신을 찾고 있습니다. 자기 뜻의 성취가 기도의 목적일 뿐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기도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사람들은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서 주기도문을 하고, 무슨 회의를 마치거나 행사를 마칠 때 수시로 주기도문을 외우면서도, 무엇 때문에 주기도문이 있는지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그들이 기도를 전혀 해보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그들은 하나님에게 기도를 해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예수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냥 하던 대로 계속 기도하면 안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자기들의 기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즉 지금까지 자신들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전제 할 때 예수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이전의 기도와 예수님을 알게 된 후의 기도가 결코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기도는 오직 십자가를 아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누구나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시간 내고 열심만 조금 내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 기도라고 여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만 생각하기 때문에 누구나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생각하는 기도란 하나님을 찾아서 자신들의 욕망의 보자기를 풀어 헤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나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기도라면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말도 안했을 것이고, 예수님 역시 새삼스럽게 기도를 가르쳐 줄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준 것은 지금까지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기도가 기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기도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는 인간의 기도를 공격하고 깨어 부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자기의 뜻은 살아있지 않습니다. 내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기를 기도하며,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를 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살아가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주님의 기도에는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일용할 약식은 이미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즉 이미 주어진 것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자기 욕망으로 살아가지 않는 인간되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기도에는 자신이 살아있고 철저히 자신을 위한 기도이지만, 주님의 기도에는 자신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의 일을 위한 기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는 인간이 얼마나 자기 욕망을 위해서 발버둥치고 살아가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소위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기도에 담겨 있는 뜻을 알지 못하고 그저 암송하는 것으로서 신자의 행세를 하려는 것을 보면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작태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주기도문은 어린양 되신 예수님이 피흘리신 현장인 십자가를 아는 자만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자기가 죽고 포기되어지는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자는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자기 백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주기도문을 암송할 수는 있지만, 주기도문 아래서 자기가 포기되어지고 부인되어지는 은혜를 체험할 자는 따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복을 받은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를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인간은 하나님에게 요청할 수 있는 권리가 없습니다.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가 주신대로 받아 누리는 존재이지 자기의 뜻과 계획을 수립하고 그것을 위해서 손을 내밀 수 있는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래 모습은 받고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타락한 후에는 너나 할 것 없이 요청하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하기 이전에 먼저 자신의 마음상태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현재의 것이 최선의 것이고 충만 되고 충족된 것으로 믿는 마음의 자세가 있는지를 살펴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아니라면 여러분의 기도는 결국 요청하기 위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이방인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마 6:31-32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이방인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왜 이방인의 기도입니까? 그렇다면 신자는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만 안하면 신자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에 대한 문제는 이미 천부, 즉 하나님께서 다 아시는 문제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아신다면 하나님이 책임지실 문제인데 인간이 나서서 이것 내놔라 저것 내놔라고 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책임지고 계십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이 책임지셨기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이미 받은 자이기 때문에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위해서는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신자는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하나님의 손길 아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결국 이방인과 신자의 차이점은 이미 받은 자로 사는 것과 받기 위해서 살아가는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받기 위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아 챙기기 위해서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린양을 알지 못한 자들의 기도이며, 이러한 기도에는 인간의 탐욕만이 잔뜩 묻어 나올 뿐입니다.

본문에 사도 요한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일곱 천사가 각기 나팔을 받아드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다른 천사가 나오는데 그 천사는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습니다. 나팔을 부는 것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세상에 대해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심판을 받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말씀을 가진 자를 세상에 남겨 놓으셨을 때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즉 세상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죽였다는 사실에 대해서 도저히 발뺌할 수 없는 것은, 지상에 예수님의 사고방식으로 예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자들을 보내셨을 때 그들을 핍박함으로서 증거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을 싫어한 세상에서 신자가 예수님을 따라 산다는 것은 고난과 핍박을 받는 길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복음을 싫어하고 예수님을 싫어하고 복음을 말하는 신자를 핍박하고 미워하는 것에 대해서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5절에 보면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고 말씀합니다. 천사가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아 버립니다. 그러자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납니다. 이런 모든 얘기는 세상에 대한 심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곱 천사가 나팔을 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경고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 이 세상은 결코 평안하다고 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심판은 이미 결정되어졌습니다. 이 심판을 돌이킬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심판을 돌이키지 못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주지해야 할 것은 도대체 심판의 기준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은 무엇에 대해서인가를 언제나 확인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항상 긴장감 속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심판에서 우리를 건지는 가장 확실한 것 하나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이 세상이 싫어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놓을 수 없는 것이 신자의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 되는 것을 세상이 거부하고 미워하고 싫어한다고 해서 감추거나 놓아 버릴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신자의 입장임을 아는 자라면 그 기도는 오직 그리스도가 중심이고 하늘을 향하는 기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천사가 향로에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는다고 말합니다. 왜 단 위의 불을 담아서 땅에 쏟는 것입니까? 그냥 아무 불이나 담아서 쏟으면 안되는 것입니까? 여기에는 여러분이 명심해야 할 의미가 있습니다.

제단 위의 불은 단 위의 제물을 태우는 불입니다. 제물을 태운다는 것은 심판의 행위입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이 단 위의 제물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단에 제물이 불에 태워져 재가 되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에게 떨어져야 할 심판이 아무런 죄도 없는 제물 위에 떨어짐으로서 자신들이 심판에서 죽지 않고 살게 되었음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단 위의 불을 소홀히 여긴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심판의 행위를 우습게 여긴다는 것이고, 심판 받아야 할 자신의 죄 또한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레위기에 나옵니다. 레위기 10:1-2절에 보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는데, 그 이유는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가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서 여호와 앞에 분향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명하시지 아니한 다른 불이란 단 위의 불이 아닌 다른 불을 의미합니다. 장작불이냐 가스불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단 위의 불이냐 아니냐를 따지시는 것입니다. 단 위의 불이 아닌 자른 불을 담아서 여호와 앞에 나오는 것은 여호와의 거룩을 우습게 여기고 여호와의 심판을 가볍게 보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인 것입니다.

단 위의 불을 향로에 담아서 여호와 앞에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 제가 바로 심판 받아 죽어 마땅한 더러운 자입니다. 그러한 제가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단 위에서 나 대신 죽은 희생 제물 때문입니다'는 고백이 담겨 있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불을 담아 온다면 이 모든 것을 마음에 두지도 않고 있고 우습게 여긴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따라서 단 위의 불을 담아서 땅에 쏟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땅에 쏟는 것인데, 결국 하나님의 진노는 단 위의 불이 아닌 다른 불을 가지고 여호와께 나오는 자들에 대한 진노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아는 자들이 바로 선지자고 사도였기 때문에 그들은 끊임없이 인간의 죄를 고발하며 희생 제물로 오신 그리스도를 의지하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단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심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는데, 인간은 예수님의 그 희생을 우습게 여겨버립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이 세상에서 죽은 것을 기준으로 세상을 움직이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마음도 뜻도 무시한 채 온통 자신의 뜻과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른 불을 담아서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라고 말씀합니다. 향연은 단 위의 불에 의해서 태워진 향을 말합니다. 그 향이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하늘로 올라간다고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받으시는 성도의 기도란 단 위의 불과 연관이 있습니다.

사 6장에 보면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목격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부정한 사람이고 망할 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이사야에게 천사가 단 위의 숯불을 가져다가 입술에 대면서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볼 때 단 위의 불의 의미를 아는 자는 오직 자신의 더러움을 발견한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더러움을 알아야 단 위의 불로 인해서 자신이 정결케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 것이 아닙니까? 이사야에게 단의 숯불로 인해서 주어진 은혜는 무엇입니까? 망해야 할 더러운 자가 죄사함 받고 정결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나 대신 희생한 제물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사람이 과연 제단 앞에서 자신의 건강을 구하고 재물을 구하는 기도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받으시는 성도의 기도는 무슨 열심이 있다거나 정성이 있다거나 오래한 것이 아닙니다. 단 위의 불을 담은 기도, 그 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 악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피말고 다른 것에 가치를 두고 사는 것이 모두 악입니다. 그 악을 용서하지 않고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진노를 단 위의 불을 향로에 담아 쏟음으로서 보여주는 것이고, 그 진노를 경고하기 위해서 일곱 천사가 나팔을 받은 것입니다.

기도를 행위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새벽기도 나오고 철야기도 나오는 것만을 기도라고 말하게 됩니다. 기도를 하기 위해서 따로 뭔가 해야 하는 것이 없습니다. 기도란 단 위에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희생하신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모두 드러난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앞에서 자신이 다 드러났다면 나올 것은 '죄인입니다'는 고백 밖에 없습니다. '나는 더러운 자고 망해야 할 자입니다'는 고백만 있습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나를 살리는 주님의 피의 은혜이지 결코 재물이나 다른 것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보좌 앞에서 자신이 모두 드러났기 때문에 꾸며야 할 것도 없고 감추어야 할 것도 없고 숨길 것도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항상 자신의 악함을 인식하면서 주님의 은혜가 나를 살렸다는 그것 하나만 고집하고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단 위의 불을 담아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신자는 자신의 자랑이 없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것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피의 은혜만 자랑되고 주님의 이름만이 높여지기를 소원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입니다. 자신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 살아있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희생하신 어린양이 살아있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기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살아있지 않은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선택된 자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기도하라는 것은, 요청하면 들어준다는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기도하라는 것은, 너는 죄인이며 죽어야 할자라는 것을 기도를 통해서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생명 되신 예수님의 은혜가 그 마음을 점령하고 다스릴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 하고 있는 기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기도를 통해서 무엇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욕망이 살아있는 기도입니까 아니면 나의 욕망을 죽이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어지는데 도구로 써달라는, 자신이 죽어 있는 기도입니까? 누구나 하는 기도가 아니라 어린양의 희생을 아는 선택된 자의 기도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