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8:6-13 나팔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명확하게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에는 지상에서 하나님이라는 신의 이름을 부르는 인간 단체를 형성하거나 그 단체를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노력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독생자이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인간의 손에 의해서 비참하게 죽도록 내어 버려 두신 그 마음을 알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온통 하나님의 마음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알아주기만을 바라고 살아갑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꿈이니 비전이니 하면서 들떠서 야단들입니다. 마치 죽은 것은 내 아들이 아니라 남의 아들이니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식입니다. 오늘날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내 아들이 죽은 것은 아니니까?' 하면서 덤덤해하고, 성경에서 아들이 죽은 것은 내 죄 때문이라고 하니까 억지로 슬퍼하는 척 해주는 것으로 할 일 다했다고 여겨버리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면, '언제까지 십자가의 죽음만 말하고 있을 것인가?'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힘써 일하자'라고 떠들지 않고 있습니까?

아들을 죽음에 내어버리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의 꿈이나 비전이라는 것은 들이밀 수 없는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아들을 죽음에 버리실 정도로 세상의 죄에 대해서 진노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오직 '우리는 죄인입니다'는 고백 외에는 필요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참 신자이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예수님의 외침은 사실 우리들의 외침이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할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외침을 주님이 대신 하신 그 현장에서 우리의 축복과 평안이나 꿈꾸고 있다면 주님의 외침에 대해서 귀를 막아 버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십니까? 아들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하나님 앞에서 교회를 부흥시킨 우리의 업적을 자랑할 수 있으며, 돈 많이 번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면서 마치 자신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것이 과연 신앙입니까? 이러한 것은 모두가 다 사단의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보지 못하게 만들기 위한 사단의 수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보지 못한 자는 신자도 아니며 자녀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요 15:13-15절에 보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예수님의 친구로 일컬음 받을 수 있는 자는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기도를 한다거나 헌금을 하는 등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나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의 친구는 예수님이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를 말합니다.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한 대로 예수님은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셔서 친구로 일컬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친구는 예수님을 이용하고 예수님의 덕을 보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 덕에 세상에서 어떤 혜택을 누리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알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관심 두며 하나님의 마음에 순종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살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6절에 "일곱 나팔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예비하더라"고 말씀합니다. 나팔을 부는 것은 심판에 대한 경고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심판을 하기 위해서는 세상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잘못이 드러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법정에 가면 죄인들의 죄를 구별하기 위한 기준이 있습니다. 국법입니다. 국법에 의해서 죄의 여부가 가려지고 죄의 경중이 구별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심판의 나팔을 부신다면 그것은 세상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가 있다는 것이고, 죄를 죄로 확정하기 위해서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은 그렇다 치고, 교회가 심판의 기준이 없습니다. 심판의 기준이 엉망이 되버렸습니다. 무엇이 죄인 줄을 모릅니다. 죄가 의로 둔갑을 해서 교회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심판 받을 자들이 의인행세하면서 믿음의 사람으로 큰소리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의라고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죄였으며 의라고 행하던 모든 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들이 드러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주님이 오시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심판하실 기준은 제단 위에서 피흘리고 희생하신 어린양입니다. 천사가 향로에 단 위의 불을 담아서 땅에다가 쏟아 버립니다. 결국 세상 심판의 기준이 되고 경고가 되는 것은 단 위의 불입니다. 단 위의 불이 세상에 쏟아짐으로서 세상의 죄가 무엇이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향로의 불로 인해서 심판을 받은 자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민 16장에 나오는 고라자손들입니다. 고라자손이 아론에게 반역을 합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가 뭔데 우리들을 지도하느냐?'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자 모세는 고라자손과 아론에게 똑같이 향로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리고 그 향로에 불을 담게 합니다. 그러자 고라자손의 향로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을 삼켜 버립니다. 무엇 때문에 고라자손이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단지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을 했다는 것 때문입니까? 민 16:3절에 보면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라고 말씀합니다. 즉 '우리도 거룩하고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왜 너희들이 우리 위에 서느냐?'는 것입니다. 고라 일당은 '너희만 거룩하냐 우리도 거룩하다. 너희에게만 하나님이 함께 하느냐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주장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의 이유가 된 것입니다.

고라 자손의 죄는 자신들이 거룩한 백성 되는 것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의 피 때문임을 몰랐다는데 있습니다. 어린양의 피로 거룩해진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혈통으로 거룩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피 없이도 거룩해질 수 있는 것이고 피 없이도 천국갈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이 교만이었으며 심판 받을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로에 담긴 불로서 심판한 것입니다. 단위의 불은 제물의 희생이 담겨 있는 불입니다. 제물의 희생으로 인해서 죄인된 자가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단 위의 불입니다. 그런데 제물의 희생은 외면한 채 자기 혈통이나 종교의식 등을 내세워서 거룩을 말한다면 그것은 제물의 희생을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 위의 불이 심판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단 위의 불을 담아서 지상에 쏟아 버리는 것은 고라의 심판이 이 세상에 그대로 재현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단 위의 불을 세상에 쏟아 버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시겠습니까? 이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이고 아들을 버리신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자가 곧 예수님의 친구인 것입니다.

고라 자손은 단 위에서 제물을 죽이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얼마든지 제사장을 할 수 있는 거룩한 자들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가 아닌 자신의 힘으로도 거룩하게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심판의 이유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세상이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 그 기준이 명확해집니다. 세상은 예수가 아니더라도 착한 일을 하면 의로워지고 천국 간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교회는 또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피를 말은 하지만 피만으로는 안되고 피에다가 인간의 행함이 더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인간의 행위가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교만이며 이 교만이 곧 심판의 이유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상에서 신자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는 것이 무엇으로 증거 되는 것입니까?

본문에 나팔을 불 때 세상에 재앙이 떨어집니다. 그런데 세상 전체에 재앙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삼분의 일에만 임합니다. 왜 삼분의 일입니까? 삼분의 일에 재앙이 임하고 삼분의 이는 재앙이 없다고 할 때 우리들의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이 떠오르게 됩니까? 우리는 삼분의 일이 아니라 삼분의 이에 대항된다는 것입니다. 신자이기 때문에, 교회에 잘 나오기 때문에, 복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삼분의 이에 해당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애굽에 내려진 재앙을 보면 처음에는 애굽과 이스라엘을 구분하지 않더니 네 번째 부터는 애굽과 이스라엘을 구별하여 내립니다. 이렇게 애굽과 이스라엘이 구별되어 재앙이 내려지는 것은, 애굽 안에 하나님이 보호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왜 그들을 보호하십니까? 그것은 그들이 귀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할 일이란 어린양의 피로 살아났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장자 재앙에서는 애굽과 이스라엘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살려줬던 것입니다. 즉 혈통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가 죽음과 생명의 구별이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피로 살아난 사람들은 어린양의 피의 은혜로 살았음을 보여주고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앙이 교회 다니는 사람과 다니지 않는 사람으로 구별해서 내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에 다니니까 하나님이 봐주지 않겠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힘들게 하시고 어렵게 하면 불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특별 대우를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증거 해야 하는 것은 세상에서 축복 받은 모습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입니다. 신자는 재앙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았음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 어린양의 피의 은혜, 사랑은 어떤 환난과 곤고와 기근과 적신에서도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끊어지지 않는 사랑은 분명 곤고와 어려움과 환난 속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신자를 어려움으로 밀어 넣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남들 재앙 받을 때 나는 평탄하고, 남들 망할 때 나는 안망하고, 남들 힘들게 살 때 나는 편안하게 사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여주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일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맡기신 것은 어떤 재앙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여러분을 택했고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세상에 단 위의 불이 쏟아진 것은, 어린양의 피가 심판의 기준으로 이미 세상 속에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여러분이 존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보이기 위해서 입니다. 재앙이 없는 삼분의 이를 기대하지 마시고,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도 그리스도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삶을 보여주는 것이 여러분이 있는 이유임을 잊지 마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여러분으로 인해서 어린양의 피가 더욱 명확하게 증거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