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0:1-11 작은 책

여러분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사십니까? 성경을 근거로 해서 세상을 심판 받을 장소로 보고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십니까? 혹 여러분은 성경이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는가와는 전혀 상관없이 세상을 대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성경에서의 세상에 대한 평가는 무엇입니까? 아마 여러분은 성경이 세상을 심판 받을 장소로 평가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달리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세상이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성경에서 수없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한다면,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그 말씀대로 다 이루실 것이라는 것도 인정을 하고 사신다면 여러분에게서 보여질 세상에 대한 평가는 성경 그대로 심판 받을 장소여야 합니다. 이것 외에 달리 내릴 평가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진심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시고 하나님은 그 말씀대로 이루신다는 것을 믿으신다면 그 믿음은 여러분의 삶에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심판의 장소로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심판의 장소라면 세상에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인간들이 서로 지혜와 힘을 합하여 바벨탑을 쌓아간다고 해도 결국 무너질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소망 둘 장소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많은 부분이 세상에 기울어져 있습니다. 소망도 힘도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온통 땅에 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세상을 심판의 장소가 아니라 희망의 장소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을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심판을 부정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가 세상을 심판의 장소로 보고 살아가는 삶이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세상은 심판을 받을 것이니까 다 팽개치자는 것입니까? 돈도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가는 것이 세상을 심판의 장소로 보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가 세상을 등진다고 해도 그것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받는 고난이 아닙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을 향해서 심판을 예언했습니다. '너희들은 망한다'는 것이 선지자들의 외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망한다고 해서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등지는 것이 심판 받을 이스라엘에 대한 선지자의 반응이 아니라, 이스라엘 안에서 그들의 심판을 외쳤던 것입니다.

만약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을 등졌다면 심판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고통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이스라엘 안에 있게 하셨고, 그로 인해서 그들은 원치 않는 고난 속에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선지자들의 얘기를 남의 얘기처럼 대해서는 안됩니다. 선지자들의 인생은 오늘 우리들의 인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이 이스라엘로부터 고난 당하는 위치에 있었다면, 오늘날 신자 역시 고난 당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선지자들의 얘기를 그저 모범적인 얘기로만 여기고 스쳐 지나가 버립니다. 옛날에 이런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있었다는 것으로 끝나 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구약의 틀을 그대로 오늘날 신자들에게도 적용을 시킵니다. 세상으로부터 고난 당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 바로 신자인 것입니다. 고난에서 건짐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으로 밀어 붙여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선지자들이 이스라엘로부터 고난을 받음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님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선지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선지자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쓴맛으로 자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9-10절에서도 이것을 말씀합니다.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 버리라 배에는 쓰나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 버리니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그러면 '말씀이 입에서는 달지만 먹은 후에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말씀이 쓰다고 할 때 그 쓴맛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미 말씀으로 인해서 쓴맛을 보고 살았던 선지자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겔 2:9-10절을 보면 "내가 보니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앞에 펴시니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3:1절에 보면 그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에 족속에게 고하라고 합니다. 에스겔이 먹은 두루마리에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먹었다는 것은 에스겔은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삶이었다면 우리 역시 이 삶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말씀에서 항상 단맛만을 기대합니다. 말씀이 우리 자신의 인생을 쓰게 한다는 것을 전혀 상상치도 못합니다. 말씀을 먹은 후에는 배에서 쓰게 되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삽니다.

에스겔은 말씀을 먹음으로서 애곡과 애가와 재앙을 몸소 담당을 했습니다. 말씀 자체가 에스겔을 고난으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희망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심판만 기록되어 있었을 뿐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에스겔의 말에 대해서 분노할 수밖에 없었고 이스라엘의 분노는 에스겔에 대해서 고난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부정하는 일에 에스겔을 도구로 쓰신 것이고 에스겔로서는 하나님의 일에 쓰여졌다는 것 자체가 고난으로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인생이었다면 이 인생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역시 세상은 희망을 제공하지만 말씀은 세상에 대해 희망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에스겔 때나 지금이나 세상에 대한 심판을 외치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을 향해서 외쳤지만, 지금은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약속 밖에 있는 모든 자에게 외쳐야 하는 말이 바로 심판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곤란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곤란한 것은 사람들이 긍정하지 않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상식과 어긋나고 세상이 원하는 것과 전혀 다른 말을 한다는 것은 나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부정 당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기에 많은 사람들은 심판이라는 말을 감추려고 합니다. 즉 배에 삼키려고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운명이 내 운명이 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운명이 내 운명이 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말씀을 읽기는 읽지만 말씀이 지워주는 짐은 담당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세상은 심판에 대한 말을 반가워하지 않습니다. 항상 희망적인 말을 기대하고 인간의 힘을 모아서 바벨탑을 구축할 수 있는 힘이 되는 말을 기대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심판을 말한다는 것은 곧 재앙을 담당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곧 9장에서 말하는 전갈인 것입니다. 이런 전갈 속에 신자가 있는 것이고, 말씀을 전해야 할 입장에 있다는 것은 전갈에게 쏘일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일곱째 천사가 소리내는 나팔을 불게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고 말합니다. 천사가 나팔을 분다는 것은 경고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경고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비밀이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신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글로 남겨진 선지자의 모든 말들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왜 그토록 자신들에게 재앙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말씀을 주저 없이 전했겠습니까? 그들은 구원이 어떤 것인가를 알았기에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서 서슴지 않고 외쳤던 것입니다. 구원이란 인간의 힘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았기에 자신에게 다가올 재앙이 두렵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신자란 이 땅위에 말씀의 전달자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원하시는 것은 글자 하나도 덜하고 더한 것이 없이 그대로 이 땅위에 그 실체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는 매우 쓴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세상이 원하는 말씀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세상에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절망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말씀과 함께 말씀을 전하는 자까지 밀쳐 낼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신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느니,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겠다느니라는 말을 쉽게 내뱉을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4절에 보면 "일곱 우뢰가 발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고 말씀합니다. 1절부터 보면 요한은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봅니다. 그 천사는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발은 불기둥 같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천사는 손에 작은 책을 들고 있고 오른발은 바다를 왼발은 땅을 밟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다와 땅, 온 세상을 주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 천사로부터 일곱 우레 같은 큰 소리가 외쳐집니다. 요한이 그 외침을 기록하려고 하자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고 합니다. 일곱 우뢰소리는 심판의 소리입니다. 그 소리를 기록하지 말라는 것은 심판이 미루어 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심판의 소리가 책에 기록이 된다면 책을 떼고 시행하는 심판자에 의해서 즉시 심판이 이행될 것입니다. 그런데 기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이 미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이때입니다. 그래서 현 시대는 심판이 미루어진 시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심판이 미루어진 이 때가 구약에서는 선지자가 복음을 전하는 때였던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에게 세상에서 피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이 있는 자리는 소돔이고 고모라이니까 거기서 벗어나라는 것을 외쳤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심판이 미루어진 이 때에 신자를 남겨 놓으신 것은 선지자의 자리에서 세상을 향해서 피하라는 외침을 하라고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임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종인가는 심판이 미루어진 세상에서 무슨 말을 하며 사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와 같은 말을 하며 살아가는지, 아니면 당시 거짓 선지자들처럼 가짜 평안만을 외치며 살아가는지를 보면 판가름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무슨 말을 하며 살아갑니까? 세상 사람처럼 열심히 '역시 돈을 벌어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 '열심히 해야 성공한다' '남들보다 앞서야 한다' 이런 얘기들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심판 속에서 가장 귀한 것은 우리를 심판에서 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의입니다. 세상 속에서는 전혀 가치 없고 무시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심판에서는 참으로 가치 있고 귀한 것이 의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심판의 장소로 보고 사신다면, 그리고 지금은 잠시 심판이 미루어졌을 뿐임을 아신다면 지금 나에게 귀한 것은 의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의로 인해서 구원받았다면 세상을 향해서 얼마든지 선지자의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고난으로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입을 다물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대에 남겨진 신자이며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를 따라가고자 하는 주의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