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1:1-2 척량하라

신앙이란 선택적이 아닙니다. 나에게 유익이 될만한 좋은 것은 취하고 손해가 될만한 것은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아닌 자기 구원에 집착된 사람들은 선택적 신앙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원하기보다는 나를 구원하는 예수님을 원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한 삶보다 나를 위한 예수님에게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도 선택적으로 사용을 하게 됩니다. 성경 구절을 용도에 따라 달리 적용되는 것으로 구분을 하는 것입니다. 이사 감사예배용 구절, 개업 감사예배용 구절, 돐예배용 구절, 장례식용 구절, 체육대회용 구절, 이렇게 성경 구절이 사람들의 용도에 의해 해체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성경이 해체되어지는 과정 속에서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난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용도별로 구분할 수 있습니까? 심방용 예수님, 장례식용 예수님 등으로 예수님을 해체할 수 있는 것입니까? 분명히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필요와 용도에 따라 구분할 수 없는 것이라면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는 성경 역시 우리의 필요에 의해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제시하기 위해서 계시로 주어진 것이지 여러 품목을 보유하고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골라서 선택하기를 기다리는 자판기처럼 사람들의 필요에 따른 여러 가지를 보유하고 인간이 각각 자신에게 필요한 구절을 취사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취할 것만 취하자는 태도로 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곤란하게 하고 별 필요가 없는 듯 여겨지는 성경에 대해서는 눈길을 돌려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필요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쓰여졌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계획과 그 성취에만 모든 관심을 두고 쓰여졌습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부르심을 입은 신자라면 자기 필요 욕구가 아닌 하나님의 계획에만 관심을 두고 성경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요구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되어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곧 신자의 삶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신자란 자기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두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은 결코 예수님으로만 만족할 수 없도록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만 만족하지 못하는 믿음은 예수님 + 알파를 기대합니다. 즉 예수님을 선택했을 때 부수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뭔가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 기대를 모두 버리고 예수님으로만 만족하는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만 만족할 수 있다면 그는 세상에 대해서 기대를 하지 않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말씀이 항상 그에게 위로가 되고 즐거움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을 보겠습니다. "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은 10:8-11절의 천사의 손에 있는 작은 책을 먹으니 입에서는 달지만 배에서는 쓰다는 말씀과 연관이 있습니다. 배에서 쓴 말씀이 어떻게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즐거움이 될 수 있습니까?

1절에 척량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는 에스겔서를 이해함으로서 알 수 있습니다. 에스겔 40장을 보면 에스겔이 환상 중에 어떤 사람이 성전을 척량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겔 40:1절에 보면 "우리가 사로잡힌 이십오 년이요 성이 함락된 십사년 정월 십일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약속에서 벗어남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이방인을 사용해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십니다. 그때 예루살렘과 함께 성전 역시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성이 함락된 후라는 것은 바로 그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땅에 이르러 나를 극히 높은 위에 내려놓으시는데 거기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고 합니다. 성이 함락된 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무너진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 가셔서 성읍 형상 같은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어떤 사람이 손에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성읍 형상 같은 것을 담부터 하나하나 척량을 합니다. 아주 세밀하게 하나하나 척량을 합니다. 겔 40:38절부터 제단에 대한 척량에 대해서 나오는 것을 보면 성읍형상 같은 것은 성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전은 분명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성전을 척량한다는 것은 무너진 성전 위에 새롭게 지은 새성전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손으로 지은 성전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서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있고 제사가 있음으로 인해서 자신들이 구원받은 백성임을 스스로 인정을 했습니다. 그 성전이 무너진 것은 구원은 인간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손으로 지어진 것은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성전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일단 생각할 것은 인간의 손으로 지은 것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짐으로서 인간의 손으로 지은 것은 안된다는 것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님이 손수 지으신 것이어야 한다는 것으로 내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에스겔에서 성전을 척량하는 것은 인간이 지은 성전을 무너뜨리시고 그 위에 하나님이 손수 지으신 새성전을 세우시겠다는 것을 에스겔에게 보여주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계 21:10-12절을 보면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요한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봅니다.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본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 17절에 보면 "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천사의 척량이라"고 말합니다. 천사의 척량이라는 것은 사람이 아닌 천사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은 하나님에 의해서 지어진 성도를 가리킵니다.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성도가 곧 거룩한 성입니다. 이것을 보이시는 것은 구원받을 자는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전의 구조를 세밀히 천사가 척량을 하는 것도 구원에 있어서는 절대로 인간이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계 21:9절의"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라는 말씀에서도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을 신부로 말합니다. 이 신부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되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세상에 오시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되어진 새 예루살렘, 신부된 자들을 부르시고 백성 되게 하기 위해서 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2절에 보면 "성전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고 말합니다. 성전 밖 마당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현실입니다. 계 10:4절에서 우뢰소리가 발한 것을 책에 기록하지 말고 그냥 두라는 것은 심판이 미루어짐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2절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라는 것 역시 심판이 미루어진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판이 미루어진 기간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이방인이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는다고 합니다. 즉 거룩한 성이 이방인을 짓밟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거룩한 성이 이방인에게 짓밟히고 당하는 기간입니다. 그 기간이 마흔 두달이고 따라서 마흔 두달은 악한 자들이 의를 짓밟고 설치는 기간이며 하나님도 그냥 두고 보시는 기간입니다. 이렇게 짓밟히는 마흔 두달의 기간에 신자가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를 힘들게 하는 것이고, 때문에 작은 책을 먹으면 배에서 쓰게 된다는 말씀의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산다는 것은 멋있고 폼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의 상황이라는 것이 증인의 모습을 멋있고 폼나는 것으로 만들어 주지를 않습니다. 현실은 전갈이 있고 이방인에 의해서 거룩한 성이 짓밟히는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증인이란 다니엘처럼 사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을 말하는 것은 짓밟히는 기간인 마흔 두달, 즉 한때 두때 반때라는 용어가 다니엘서에서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흔 두달이라는 기간이 언제부터 언제까지인가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둬야 하는 것은 마흔 두달이라는 짓밟히는 기간에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이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성전 척량과 이방인에 의해서 짓밟히는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향한 나팔은 심판에 대한 경고라고 했습니다. 선지자들은 세상에 대해서 기대를 걸지 않았습니다. 다만 심판 받을 이스라엘에 대해서 심판을 외쳤을 뿐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증인으로 사는 삶입니다. 짓밟히면서도 말씀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은 구원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자이기 때문에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절망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다니엘처럼 세상 힘에 지지 않고 상황과 환경이 어떻든 변함 없이 기도하던 다니엘처럼 날마다 변함 없이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여러분이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부분 부분 선택해서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전부가 곧 나의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고난이든 어려움이든 평안이든 상관없이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삶이 될 것입니다.

이기는 것을 즐겨하고, 정복하는 것을 승리로 여기는 세상에서 짓밟히고 당한다는 것은 분명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예수님이 그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세상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가를 여실히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심으로서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된 자의 운명에 대해서 미리 예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자는 주님으로만 살고자 할 것입니다. 주님만이 유일한 소망이고 기쁨인 자들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