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2:1-6 여자와 용

여러분에게 있어서 교회란 과연 무엇입니까? 신자와 교회는 따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 1:2절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교회와 신자는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 자체가 곧 교회로 불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곧'이란 단어는 앞의 말과 뒤의 말이 서로 같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이 말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보는 자들에게'라는 말이 같다는 의미로서 '곧'이란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신자와 교회를 각각 다르게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성도로 말하고, 성도를 하나님의 교회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와 교회는 각각 분리되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은 신자인 자기 자신과 교회를 다르게 이해하려고 합니다. 교회와 나는 각각 다른 존재라는 의식을 가지고 교회로 나오는 경향이 많습니다. 나는 나고 교회는 교회라는 의식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곧 교회다'는 의식이 참으로 희박합니다. 이런 이유로 신자와 신자의 분쟁이 쉽게 발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분명한 의식이 살아있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된 자를 '교회'로 대하기보다는 세상에서 얼마든지 만나고 살아가는 사람으로만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안면이 있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 중의 하나로 여기기 때문에 자신의 기분이 기준이 되어서 쉽게 분쟁하고 관계를 끊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라는 관계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의지와 생각과 계획으로 만들어진 것이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하심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저와 여러분이 만나게 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는 관계 속에 있게 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 관계를 무너뜨리거나 하찮게 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의 관계를 하찮게 여기거나 무너뜨리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고전 11:22절에 보면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고 말합니다. 초대 교회는 모일 때마다 성찬식을 했습니다. 그때의 성찬식은 음식을 서로 나눠 먹는 축제였습니다. 그리고 먹을 음식은 각자가 준비하여 가져 왔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빈궁한 자들은 음식을 가져오지 못했고, 부유한 자들은 그들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들끼리 음식을 나눠 먹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빈궁한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단지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했다는 책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겼다는 책망을 합니다.

교회는 각기 다른 여러 지체가 모였지만 모두가 몸이라는 관계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평등이고 각기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관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를 너무 소홀히 여기고 하찮게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새로운 세계를 세우시고 세상의 불의함을 새로운 세계를 통해서 드러내시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의 사고방식을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세상의 사고방식으로 교회를 대한다면 그것은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교회로 모일 때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온다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살던 의식이나 사고방식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간다는 느낌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살던 사고방식을 드러내게 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는 모임이 바로 교회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를 존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새로운 세계라는 의식을 가지고 교회로 모입니까? 세상을 살아가던 사고방식들을 다 털어 버리고 교회로 모이려고 애를 쓰십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대개의 신자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단지 자신이 신자이기 때문에 나가야 하는 기독교 단체 정도로 여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이고, 새로운 세계라는 의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세상의 사고방식을 드러내기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습니다. 교회를 무너뜨리고 교회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면서도 조금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교회란 다니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냥 다니는 곳이고 나가주는 곳이지 '그리스 도의 몸'이니 '새로운 세계'니 하는 것은 모두 기독교의 교리이고 성경 원리 정도로 여겨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된 신자가 교회가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신자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기보다는 신자로서의 본질을 가지고 살려고 하기보다는 세상에서 한 인간으로서 굳게 서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로서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다만 주일이면 예배드리기 위해서 모이는 종교 단체로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를 과연 사단이 적으로 여기겠습니까? 사단은 예배드리기 위해서 모이는 교회를 적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사단의 적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정신을 세워 가는 교회인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여자와 용이 등장을 합니다. 바로 이 여자와 용의 관계가 오늘날 교회와 사단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예배드리는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전도하며 교회 부흥을 위해서 일하는 교회는 이미 사단의 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에 있습니다. 사단의 적은 바로 그리스도의 본질이 살아있는 교회인 것입니다.

본문에 여자가 등장을 하는데 그 여자의 모습은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1절)고 말합니다. 해를 옷으로 입고 있고 달을 밟고 다스리는 위치에 있으며 머리에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쓰고 있는 것이 여자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극히 권세 있고 영광스런 모습입니다. 해를 옷 입고 달을 다스린다는 것은 온 우주에 빛을 비추는 해보다 달보다 더 영광스럽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자의 모습입니다.

여자가 12별의 면류관을 썼다는 것은 야곱의 12아들, 즉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야곱은 메시야의 탄생을 위해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12아들, 즉 이스라엘은 메시야 탄생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약속은 메시야 탄생입니다. 창 3:15절에 약속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라는 말씀대로 여자의 후손을 보내시기 위해서 아벨이 죽은 후에 셋이 있게 하시고, 온 세상이 다 심판을 받아야 하는 가운데 셋의 후손인 노아 가족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있게 하시고 이삭을 있게 하시고 야곱을 있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모든 일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대로 여자의 후손을 이 세상에 보내시기 위해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알게 된 아브라함이나 이삭 등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실 메시야를 지향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야곱의 12아들,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메시야를 지향하는 삶을 살아야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었습니까? 이렇게 볼 때 여자가 12별의 면류관을 썼다는 것은 메시야를 보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서 이스라엘이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는 여자는 최초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하와가 아니고,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이 땅에 메시야를 보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형성된 이스라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여자가 아니라, 약속을 지향하고 살아가는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장차 예수님을 보내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하늘과 새땅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을 지향하고 살아가는 교회가 곧 본문에서 말하는 여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를 대적하는 것이 '용'입니다. 용은 강하고 두려운 모습으로 등장을 합니다. 용의 머리가 일곱 개인데 각 머리에 면류관을 썼다는 것은 권세를 잡고 땅을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의 면류관과 세상의 면류관이 다릅니다. 하늘의 면류관을 메시야를 지향하고 산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메시야,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그분만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진정한 승리자임을 보여주는 것이 하늘의 면류관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자가 12별의 면류관을 쓰고 있는 것은, 진정한 승리란 하나님의 약속대로 세상에 오신 메시야로 인해서 주어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승리란 무엇을 말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승리하는 것은, 세상에서 교회의 세력을 확장하는 것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작은 교회는 실패한 것이고 큰 교회가 성공한 것이라고 인식을 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실패한 인생이고 부자된 것이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자의 면류관은 우리에게 진정한 승리란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인간된 것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세상의 것을 기준으로 해서 실패와 성공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의 것을 기준으로 해서 실패와 성공을 따지는 것은 사단의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즉 권세 잡은 자가 성공한 것이라는 사고방식의 배후에는 용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의 머리의 면류관은 권세 잡은 자, 힘있는 자를 의미하는 면류관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누구에게 면류관이 주어집니까? 약자가 아닌 강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면류관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용이 배후에서 다스리는 세상과, 예수님이 다스리는 새로운 세계의 차이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힘있는 자를 우대하고 힘없는 자는 무시하며, 가진 자는 대우하고 가지지 못한 자는 업신여겨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를 무시하는 것이며, 교회라 이름하면서도 사단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 권세를 잡은 용이 여자가 해산하기를 기다립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3절을 보면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라고 말씀한 대로 용은 여자가 해산을 하면 그 아이를 삼키기 위해서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용이 아이를 삼키고자 하는 이유는, 여자가 낳은 아이는 창 3:15절에서 약속한 대로 자신의 머리를 상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낸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용은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서 세상의 권세를 가지고 영원히 승리한 자로 존재하기 위해서 여자의 후손인 아들을 삼키고자 기다린 것입니다. 장차 자신을 이기고 세상을 정복할 아이의 탄생을 불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하나님의 약속의 도구로 부름 받은 사람들을 방해를 합니다. 약속이 성취되지 못하고 실패하도록 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러나 약속에 위기가 올 때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약속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결국 아이가 세상에 탄생을 합니다. 사단은 포기하지 않고 헤롯의 배후에서 일합니다. 헤롯으로 하여금 2살 아래의 모든 아이를 죽이게 함으로서 예수님의 생명을 위태롭게 합니다. 이것만이 아니라 사단은 예수님이 일하시는 생애 동안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죽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하늘로 올라오게 하십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것을 단지 세상의 역사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물론 사람들의 눈에는 사단이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교리와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인 것으로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삼키기 위해서 기를 쓰는 용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삼키고자 했던 용의 계획은 아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러면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것입니까? 6절에 보면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고 말합니다. 아이를 낳은 여자는 광야로 도망을 칩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이 있습니다. 거기서 1260일을 지내야 하는 것입니다.

6절의 말씀이 바로 오늘의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용이 아이를 삼키려고 하나 하늘로 올라감으로 인해서 삼키지 못한 일은 이미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여자가 광야로 도망친 기간입니다. 광야로 도망을 쳐서 1260일을 지내야 하는 것입니다. 용은 이제 여자를 괴롭힙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여자란 무엇을 가리킵니까?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 세상에 오시고 하늘로 가신 구세주, 그리고 약속대로 장차 이 세상에 오셔서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살아가는 성도의 무리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교회를 곧 광야로 도망친 여자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용이 배후에서 다스리는 세상에 의해서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내막입니다. 요 15:16-19절에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말씀한 대로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은 세상의 배후에 용이 있기 때문이고, 용이 삼키고자 한 예수님을 지향하고 사는 교회라면 자연히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의 실체이며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의 육신을 굳게 세우고 든든히 하겠다는 것은 결국 용의 다스림을 받는 멸망의 세상에 뿌리를 내리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요 15:15절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의도와 목적에 의해서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용과 싸우는 하나님의 전쟁에 군사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군사로서 할 일은 세상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이 땅에 오셔서 죄가 무엇이고 의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신 예수님의 정신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런 얘기들을 누가 믿겠습니까? 세상의 배후에 용이 있고, 그 용이 예수님이 태어날 때 삼키려고 기다렸다가 그것이 마음대로 안되자 이제 여자를 괴롭힌다는 이 얘기들을 누가 사실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신화 같은 이야기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만큼은 이 이야기들이 현실로 들려져야 합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현실을 그대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는 광야로 도망을 쳤습니다. 즉 교회는 광야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광야는 괴로운 장소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광야는 하나님에게 원망이 나올 수밖에 없도록 만든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로 광야에서도 그들이 먹고살게 하셨습니다. 수십 년을 나그네로 살았지만 옷이 헤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광야란 이스라엘 자신들의 힘으로 먹고 살아가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는 그들에게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배우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광야에 있다고 할 때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다가오시는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말씀 안에서 양육을 받으며 성령 안에서 보호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과연 여러분이 이러한 교회로 모이고 있습니까? 세상과 교회의 배후에 누가 존재하는가를 생각하고 모입니까? 세상의 배후에 용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교회로 모인다고 하면서 세상적인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모일 때 그것은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미움을 받는가 안받는가를 보지 마시고 여러분 자신이 과연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그리스도만 지향한다면 미움을 자연히 오게 되어있습니다. 무엇이 교회인가를 깊이 생각하시고 교회로 모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