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3:11-18 짐승의 수

예수님께서는 요 15:18-19절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께 속한 신자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도록 되어 있음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세상은 신자를 미워할까요? 아니, 세상은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께 속한 자를 미워할까요? 분명히 성경에서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생각할 때 지금 여러분이 몸담고 있는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있다고 여기십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핍박을 하고 교회를 못나가게 하면서 기독교를 누르고 있습니까? 우리의 눈으로 볼 때 세상은 결코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은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라는 단체를 필요로 하고 환영을 하는 분위기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세상이 그리스를 미워하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도 미워한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한다는 것은 단지 예수님 당시의 시대 상황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생각에 맞지 않는 말씀만 하시고 사사건건 시비가 붙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싫어한 것을 가지고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한다는 말을 하신 것입니까?

분명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세상이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세계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의 모든 세상을 포함한 의미의 말입니다. 즉 당시의 바리새인이나 지금의 세상이나 그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세상입니까? 건물이 있고, 차들이 다니고,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그런 것이 세상입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세상이란 그런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를 미워하는 존재로 말씀합니다. 결국 세상이란 그리스도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어떤 본질적인 것이지 단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세상의 실체에 대해서 명확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세상인지에 대해서도 분명한 답을 내리고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물음에 대해서 답을 내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세상의 본질에 대해서 명확하게 진술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짐승은 용, 즉 사단의 권세를 가지고 올라옵니다. 죽을 뻔하다가 다시 살아난 신비한 힘도 보여줍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사단이 배후에서 다스리는 세상은 한마디로 말해서 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 힘에 굴복하고 고개 속이고 살아갑니다. 힘의 나라인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자는 힘이 있는 자입니다. 세상에서 힘이 되는 가치있는 것을 소유한 자, 그가 바로 영웅이며 왕이며 위대한 인간입니다.

메시아라면 적어도 이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온 세상을 호령을 하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만한 신비한 힘을 발휘하고 모든 사람들을 굴복시킬 놀라운 힘의 소유자가 메시아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힘의 나라에서 힘이 없다는 것은 곧 실패를 의미합니다. 힘없는 자를 따른다는 것은 곧 스스로 실패의 길을 가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포기한 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힘없는 분으로 오십니다. 그리고 '나를 섬겨라'고 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가 차겠습니까?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누구라도 해도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힘의 원리로 살아가는 세상이 굴복할 대상은 오직 힘있는 자입니다. 나보다 더 강한 자에게 굴복하고 고개 숙이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리고 약자는 철저하게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그러한 세상을 향해서 철저한 약자로 오신 예수님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에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등의 말씀을 하셨을 때 세상은 코웃음을 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상은 강한 힘을 소유함으로서 편히 쉴 안식을 얻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 의해서 권력과 권세가 중심이 된 세상에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등장을 합니다. 11절에 보면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고 합니다. 이처럼 땅에서 올라온 짐승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12-13절에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라고 말한 것을 보면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모든 권세 앞에 굴복하고 경배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권력과 권세, 힘을 찬양하고 힘을 경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바다에서 나온 짐승의 증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마흔 두달동안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두증인과 대비되는 것입니다. 두 증인은 하나님 편에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증인으로 부름 받은 자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방해하는 자가 등장을 합니다. 그가 바로 땅에서 올라온 짐승, 즉 거짓선지자입니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의 모습은 새끼 양 같이 두 뿔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린양의 모습입니다. 어린양의 모습은 가지고 있으나 그가 말하는 것은 어린양의 말이 아니라 용의 말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거짓 선지자입니다.

용의 말은 무엇입니까? 용은 곧 사단입니다. 사단이 최초로 인간에게 했던 말은 무엇입니까? '네가 하나님 같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보다 더 나아진다는 것, 더 높은 존재가 된다는 것, 위대해진다는 것, 이것이 바로 사단의 말입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이런 말이었습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 나에게 경배하면 세상 영광을 주겠다는 것, 이것이 사단의 말입니다. 예수님이 돌을 떡으로 만들고, 성전에서 뛰어 내려서 전혀 상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신비한 능력을 가진 예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사단은 세상으로 하여금 신비한 능력과 힘을 경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 곧 거짓선지자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모습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로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를 말하는 것 같지만 예수 자체가 다릅니다. 어린양이신 예수님은 세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권력과 권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거짓선지자가 말하는 어린양은 세상을 인정하는 어린양입니다. 세상의 권세와 권력을 복이라는 이름으로 인정을 합니다. 그리고 권세 있는 자로 만들어 주고 권력을 가지도록 해주는 어린양으로 말합니다. 이것이 거짓선지자의 말입니다. '예수 믿으면 복받는다'는 등의 말이 그런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용의 말입니다. 그리고 그 말로 보아 그는 곧 거짓선지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거짓선지자를 통일교의 문선명이나 이단 사이비 종교의 교주만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 모습이 새끼 양처럼 두 뿔을 가졌다는 것은 분명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모습으로 등장을 한다는 뜻입니다. 즉 겉모습은 신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 자체는 어린양을 믿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권세와 권력을 믿고 의지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흔히 년초가 되면 국가를 위한 조찬기도회가 여기저기 열리는 것을 볼 수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뜻을 권력의 중심인 국가로 모으는 거짓선지자인 것입니다. 국가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의 뜻이 아닌 것을 주님의 뜻인 것처럼 가장을 해서 가르치는 것이 바로 거짓선지자입니다.

16-18절에 보면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이마에 표를 받는 것이 두 번 나옵니다. 하나는 7:3절에서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종들이 이마에 인을 맞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16절에서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의 모든 인간은 이 둘 중의 하나에 속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표가 아니면 짐승의 표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아니면 짐승입니다. 이 둘 사이는 결코 왕래할 수 없는 골이 있습니다. 서로가 타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종의 표를 받은 사람은 결코 짐승을 경배하거나 섬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짐승의 표를 받은 자 역시 어린양을 섬기거나 경배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극과 극을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의 수를 육백육십육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사람의 수라고 합니다. 육이란 무슨 뜻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7일 동안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육일 동안입니다. 칠일 째는 단지 안식을 하신 것이지 무엇을 만드신 것은 없습니다. 칠일 째 안식을 하셨다는 것은 피곤해서 쉬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의미하는 안식입니다. 즉 하나님이 육일 동안 만드신 것을 보시고 기뻐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기쁨까지 포함되는 것이 바로 천지창조입니다. 따라서 칠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셨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칠일에서 하나님이 안식하신 날을 빼버리면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하신 것을 인간이 가로채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기쁨과 안식과 영광을 인간이 가로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짐승의 수, 즉 육백육십육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존재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짐승이란 하나님의 힘과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원하는 바를 이루어가면서 인간의 위대한 힘을 드러내고 자랑하고자 하는 존재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권력과 권세를 경배하고 섬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위대함과 성공은 권력과 권세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그것은 권력과 권세의 옷을 입고 드러나는 것입니다.

짐승의 표를 받은 자와 어린양의 표를 받은 자의 수는 이미 확정되어 있습니다. 육백육십육과 십사만사천입니다. 이것은 물론 실제의 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수입니다. 수가 확정되어 있다는 것은, 어린양의 표를 받은 자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표를 받은 자, 즉 하나님의 종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를 설득해서 어린양의 표를 받도록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증거 함으로서 어린양의 표를 받은 하나님의 종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오실 마흔 두달 동안 증인으로서 해야할 역할인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이 어떻다는 것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세상이 어떤 것인가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단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모르게 되고, 그것을 모른다면 결국 거짓선지자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무지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란 세상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권력에 굴복하고 세상 권력을 도와주기 위해서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란 세상이 권력과 권세 앞에 굴복하고 아부하고 살아갈 때 오직 어린양만 경배함으로서 세상의 실체를 증거 하는 역할을 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가 만약 세상에서 살고자 한다면 결국 세상과 함께 권력과 권세를 섬기고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17절에서 짐승의 표를 받은 자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한다는 것은 세상의 권력을 경배하지 않는 자는 억압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짐승의 다스림을 받는 세상처럼 세상 권력과 권세에 아부하고 경배하고 섬기며 사는 것이 더 편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오직 하나님만 경배할 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지금 당장 죽는다고 해도 하나님만 경배할 자로 인침받은 자가 신자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것이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사는 것이 영원히 사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인간의 힘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육백육십육입니다. 당장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고 자랑스럽게 만들지는 몰라도 결국은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세상 권력은 인간으로하여금 '내가 너를 키워주마' '내가 너를 성공하게 해주마'라는 말로 미혹하지만, 신자는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겠습니다'라는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래서 권력과 권세가 부럽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을 믿는 자가 성공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