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4:1-5 이름의 대결

신자에게는 성경이 확신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성경을 진리로 알고 진리인 성경을 따라가는 사람이지 자신의 느낌을 따라가는 사람은 아닙니다. 즉 자신의 느낌을 믿으려고 하지말고 느낌에 흔들려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성경이 확신이라면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가지고 성경을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의 느낌과 감정은 항상 성경에 대해서 걸림돌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의 느낌이고 감정인 것입니다. 성경에 충실한 것이 신자이지 자신의 느낌과 감정에 충실한 사람은 신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들의 느낌과 감정이 옳은 것이고,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있다면 느낌과 감정에 충실하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의 느낌과 감정은 절대로 진리인 성경을 증명하고 확인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느낌과 감정이란 인간의 기분에 의해서 수시로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느낌과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내 기분을 중심으로 하는 믿음 아닌 믿음이 되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란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으로 증명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냥 믿는 자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세상이 망한다는 것에 대해서 그냥 믿고 순종했습니다. 노아가 자신의 느낌과 감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방주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경고를 믿었을 뿐입니다.

오늘날 신자가 누구입니까? 노아와 마찬가지로 세상이 망한다는 것에 대해서 경고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심판에 대한 경고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여러분은 그 약속을 믿고 살아가십니까? 그리고 그 약속에 순종하십니까? 여러분의 느낌에 심판이 있을 것 같아서 믿으십니까?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을 가지고 아무리 세상을 둘러봐도 심판이 있다는 확신은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뜨거운 감정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믿어질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시면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다시 오실 때는 세상의 심판주로 오십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이 세상이 끝장나는 날입니다. 세상은 그날까지 하나님의 허락아래 잠시 존재하고 있을 뿐입니다. 허락된 존재이지 세상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고 사는 자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누가 복음에 주인이 왕위를 받으러 먼길을 떠난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이 길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각각 돈을 맡기고 그 돈으로 장사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어떻게 장사했는가를 살폈습니다. 그 결과 돈을 그냥 수건에 싸두었던 종은 죽임을 당합니다. 만약 주인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돈을 수건에 싸두든 땅에 파묻든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반드시 돌아오신다면, 그것을 믿는다면 종된 자는 주인이 맡기신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는가를 항상 살펴야 할 것입니다. 주인이 돌아올 것을 믿는 이상 종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주인이 올 때까지 주인이 맡긴 일에 모든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늘로 가신 예수님이 다시 오시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천하에 가장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지 않으신다면 여러분 마음대로 살아가도 괜찮습니다. 무엇을 하든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가도 됩니다. 하나님을 버려도 되고, 예수님을 언급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신다면 우리 마음대로 살아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반드시 예수님이 맡긴 일에 대해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란 예수님이 오실 것에 대해서 어정쩡한 느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오신다고 약속을 하셨으면 반드시 오신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실까 안오실까를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셔서 무엇을 기준으로 심판하시는가를 생각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1절에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라는 말씀을 보면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을 쓴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13:17절에서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고 말씀한 것을 보면, 세상은 두 구조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짐승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어린양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이 두 구조로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양의 이름을 가진 자는 누구이고, 짐승의 이름을 가진 자는 누구입니까? 이것을 단순히 교회를 다닌 자와 다니지 않는 자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와 천주교, 기독교와 불교, 이런 식으로 종교의 구분으로 이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다 어린양의 이름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도 가라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짐승의 이름을 가진 자는 누구입니까?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린 대로 짐승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곧 짐승의 이름을 가진 자입니다. 짐승이란 곧 세상의 권력자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짐승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세상을 살기 위해서 짐승, 즉 권력의 도움이 있어야 함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돈을 벌려고 애를 쓰는 이유는 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먹고살기 위해서 필요한 돈이 아니라 자신이 세상에서 가치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 돈이 필요한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짐승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짐승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반면에 어린양의 이름을 가진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4-5절을 보면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고 말씀합니다.

어린양의 이름을 가진 사람은 첫째,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고 정절이 있는 자라고 합니다.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고 정절이 있다는 것은, 섞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세상과 함께 하며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럽히지 않고 정절이 있다는 것을 단순히 부처에게 절하지 않고 갓바위에 가지 않는다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몸은 부처에게 절하지 않고 갓바위에 가지 않을지 몰라도 우리의 마음은 이미 갓바위에게 가있지 않습니까? 실제 갓바위에 가고 싶어한다는 것이 아니라 갓바위를 찾는 사람들의 마음과 동일한 마음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갓바위를 찾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갓바위에 순종하고 갓바위를 따르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 도움을 구하고자 갓바위를 찾는 것이 아닙니까? 갓바위의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록 갓바위에는 가지 않는다고 해도 갓바위에 가는 사람들처럼 세상에서 나 잘되는 것에 소망을 두고 산다면 그 마음은 이미 갓바위입니다. 자신을 부인하지 못한 그 마음이 곧 갓바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정절이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누가 더럽히지 않는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둘째,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어디로 인도하든 따라간다는 것은 자신이 나아갈 길을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되어진 모든 것이 곧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나에게 득이 되는 쪽으로 인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 마음이 버려지고, 나에게 득이 되는 쪽을 생각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드러나는 쪽을 생각하게 되어지는 것이 바로 어린양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어린양이 내 인생에의 주관자로 왕으로 존재하시는 상태인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산다면 세상의 힘이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힘은 내가 원하는 인생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지 어린양을 따라가는데는 전혀 불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어린양의 이름을 가진 자는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인데 이들의 입에는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다고 합니다. 처음 익은 열매란 '하나님의 장자'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장자라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아들 되어진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에 의해서 아들이 되어진 자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장자' 또는 '처음 익은 열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아들 되어졌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게 된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게 된 것은 우연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힘도 아니고 모세가 잘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애굽에 내린 마지막 재앙은 장자 재앙입니다. 사람을 막론하고 짐승까지 처음 난 것은 모두 죽여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닙니다. 장자 재앙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과 애굽을 구분한 재앙이 아니었습니다. 죄인된 자는 몽땅 장자 재앙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살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장자 재앙에서 살아난 사람들은 모두가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산 것입니다. 이들이 진정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죄를 대속했기 때문에 살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앞으로 처음난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께 바치라고 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장자는 어떻게 구분됩니까? 그것은 죽어야 할 자가 하나님의 대속하심으로 살았음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장자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속하고 어린양에게 속했다는 것은 어린양의 피로 대속함을 입었기 때문에 산자가 되었음을 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들에게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다는 것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더러움을 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들 입으로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우리 마음에는 여전히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무엇인가를 감춘 채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나 사랑한다는 말이 진실이겠습니까?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믿을 수 없는 자가 믿는다고 하고 사랑할 수 없는 자가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거짓이 아닌 것은 '나는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입니다'라는 자기 고백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바로 아는 진실이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거짓이 없고 흠이 없는 것은 자신의 더러움과 불의함 안에서 주님의 의로움을 아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내가 주님을 믿어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일이 믿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법대로 하면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심판을 주님이 담당하심으로 우리는 산자가 되었습니다. 내 죄를 주님이 담당하시고 우리에게는 주님의 의가 주어진 것, 이것이 믿어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이 있는 자라면 자신이 죽어야 할 죄인임을 분명히 알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제가 죽어야 할 죄인인데 이 죄를 주님이 담당하시고 피 흘리심으로 내가 산 자가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이 바로 거짓이 없고 흠이 없는 믿음인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이 없는 믿음은 자신을 자랑하거나 자신이 할 일을 내세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린양의 이름을 가진 자의 모습입니다.

반면에 거짓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성경은 누구도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 앞에서 '나는 선을 행했으니까 나는 복받을 자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거짓입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은 자신의 의를 생각하지 않게 합니다. 아예 의가 없는 자라는 것을 깊이 자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의가 없는 자를 의롭다고 여기신 주님의 피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말하는 새 노래는 바로 이런 자들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인 것입니다.

3절에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새노래라는 것은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을 노래하는 것을 말합니다. 새로운 경험이 있는 자들이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이들은 십사만 사천이며 여자로 더럽히지 아니한 정절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주님을 믿기 때문에 어떤 길로 인도하신다고 해도 의심이 없는 것입니다. 설사 그 길이 죽는 길이라고 해도 주님을 향한 믿음은 죽음조차도 기쁘게 따라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새노래를 부를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나서 하나님을 노래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노래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새 노래는 홍해를 가르는 경험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이 있는 자의 노래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으로 인해서 산자가 되었다는 것을 경험한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피가 나를 살렸다는 경험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세상의 사고방식으로부터 분리된 채 세상이 귀하고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가 가치 있고 귀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러움이 없는 믿음입니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새 노래입니다. 이들은 이미 확정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부를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된 그들만이 성령을 통해서 새노래를 배우고 부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십사만 사천은 새노래를 부르며 살아가라고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자로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자로 살아가라고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세상과 더불어 살지 말고 우리를 의롭게 하신 주님의 피보다도 귀한 것은 없다는 노래를 부르며 살아가라고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에 의해서 짐승의 이름이 드러납니까 아니면 어린양의 이름이 드러납니까? 드러나는 것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짐승의 이름을 가졌다면 짐승의 이름을 드러내게 될 것이고 어린양의 이름을 가졌다면 어린양의 이름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린양의 피의 대속을 아신다면 여러분은 어린양의 이름을 가진 자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세상 속에서도 오직 어린양의 피가 귀하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가 붙들고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어린양의 은혜일 것입니다. 세상 것은 다 잃어버려도 어린양의 대속의 은혜는 잃어버릴 수가 없다는 열망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과연 세상 것을 위해서 어린양의 대속의 은혜를 버리는 쪽으로 나아가겠습니까?

주님은 오십니다. 이것은 느낌도 아니고 경험도 아니고 감정도 아닙니다. 말씀입니다.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반드시 되어질 일입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세상을 마음대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오시면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피흘리신 그 의가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마음으로 아십니까? 나같은 불의한 자의 죄를 대속해주시고 나를 의롭다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마음 깊이 여러분에게 다가오십니까? 그렇다면 그분이 바로 어린양의 이름을 가진 자입니다. 그리고 어린양을 드러내며 살아갈 것입니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귀하게 여기고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