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4:6-7 이 세대에 중요한 것

창세기에 등장하는 노아 때의 심판 얘기가 오늘 우리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신자인 우리들의 삶이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는 삶이냐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 심판 얘기는 단지 '옛날 노아 때의 사람들은 불순종해서 심판을 받았으니까 우리들은 그러지 말자'라거나, '노아는 하나님이 방주를 만들라고 한 명령에 순종함으로서 구원을 받았으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자'는 차원의 의미로 이해하고 지나갈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곳에서 노아 때의 심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37-39절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종말의 징조에 대해서 문의했을 때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고, 히브리서 11:7절에는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고 말하면서 방주를 만든 노아의 믿음에 대해서 언급하고, 베드로전서 3:20절에는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고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말씀이 노아 한 사람의 믿음에 대해서 칭찬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노아를 통해서 오늘의 세대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는 말씀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에서 말씀하는 것도 방주를 예비한 노아의 믿음으로 인해서 세상이 정죄 받음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종말 때 이 시대 사람들이 노아 시대사람들처럼 시집가고 장가간다는 것도 노아 때 사람들처럼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산 결과 멸망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이 세대도 노아 때처럼 심판의 두려움이 없이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입니다.

베드로전서의 말씀도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20절에서 말하는 그들이란 '옥'에 있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베드로전서 3:19절에 보면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옥이란 지옥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영이란 성령을 가리킵니다. 천주교에서는 이 본문을 예수님이 지옥에 가셔서 복음을 전파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즉 지옥에서도 구원의 기회가 있는 식으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님이 지옥에 가서 복음을 전하신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옥에 있는 영들은 베드로전서 3:20절에서 말한 대로 노아의 때에 노아가 방주를 예비할 때 순종치 않았던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옥에는 노아 때의 사람들만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단지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노아 때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같다는 것입니다. 즉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자들입니다.

노아 때의 심판은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분명히 심판하시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해서만큼은 용납하지 않고 심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 노아 홍수 사건인 것입니다. 결국 노아 당시의 사람들에게 노아는 배를 만듦으로서 심판이 있음을 보여주었던 것이고, 당시 사람들은 노아가 배를 만드는 것을 보면서도 심판에 대해서 무시하고 두려움이 없이 살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지옥에 있다는 것은 결국 구원받지 못한 자가 누구인가를 노아 심판을 대표적인 사건으로 등장시켜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심판을 보여주는 자로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심판이 있음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노아 당시의 사람들처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단지 자기 삶에 모든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것인지, 이 문제는 오늘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자리에 모인 저와 여러분은 심판이 있음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배를 만드는 생활을 함으로서 당시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그들이 믿든 안믿든 그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노아의 삶이 심판을 경고하고 보여주는 삶이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노아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심판의 경고를 하셨다면 우리 역시 그 경고를 들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심판의 때를 모른다면 노아도 심판의 때를 몰랐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주를 지었을 뿐입니다. 혹 노아가 살아있을 동안 심판이 없었다면 방주를 만드는 일은 대를 이어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노아는 심판의 때가 언제인지 모르면서 하루하루 방주를 만드는 삶을 중지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세상이 멸망당한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심판을 준비하는 삶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심판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의 삶은 심판에 대해서 경고하는 삶이 되고 있습니까?

본문 7절에 보면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이 본문에 보면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라고 말합니다.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다는 것은 심판이 멀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과연 사람들이 심판이 이르렀다는 자세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을 보지말고 당장 우리 자신부터 보십시다. 어떻습니까? 우리들의 삶이 과연 심판이 이르렀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의 삶의 자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요즘 강원도에 산불이 나서 야단들입니다. 코앞에 산불이 있을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장 살고 있는 마을에서 도망쳐야 합니다. 산불이 없다면 도망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산불이 지금 마을 앞에서 마을을 삼키기 직전이라면 빨리 도망을 치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행여 집에 있는 가재도구가 아까워서 그것을 건지려고 지체했다가는 산불에 의해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심판이 이르렀다고 할 때, 진심으로 심판이 바로 앞에 있다는 심정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멸망의 장소인 세상에서 도망치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세상에 머물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심판에 대해서 너무 느긋합니다. 심판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강원도에 일어난 산불이 지금 나에게서 멀다는 것 때문에 산불에 대해 느긋한 것처럼, 성경에서는 심판이 이르렀다고 말씀하는데도 불구하고 심판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AD95년에도 심판이 이르렀다고 말씀했을 것인데 그로부터 1900년이 넘도록 심판이 없다는 것 때문에 심판이 이르렀다는 말씀에 대해서 담대해 지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해서 말을 해도 느긋합니다. 이유는 죽음이 나에게서 멀다는 생각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하다는 것, 젊다는 것, 이런 것들로 인해서 죽음은 나에게서 멀리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서조차 느긋해지는 것입니다. 건강도 젊음도 죽음에서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해서 우리를 보호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완전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건강관리를 한다고 해도 죽음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사는 모두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건강관리 하지말고 마음대로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관리를 해도 내 생명을 내가 지키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의도에서 건강관리를 하라는 것입니다.

죽으면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누가 과연 심판이 멀다고 하겠습니까? 죽음이 바로 내 앞에 있고 죽음에서 내가 나를 보호하고 지킬 수 없는 것이라면 심판은 분명 우리 앞에 있고 이미 우리에게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심판에 대해서 느긋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그는 노아 당시의 사람들처럼 불순종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심판이 바로 내 앞에 있음을 아는 자들에게만 의미 있는 말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본문의 말씀은 쓸모 없는 성경으로 전락돼 버릴 것입니다. 심판이 바로 앞에 있음을 아는 자로 본문을 대할 때 오늘의 세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6-7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요한이 다른 천사가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다른 천사는 복음을 가졌는데 그 복음은 땅에 거하는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복음입니다. 여러 나라 족속 방언 백성이라는 것은 복음을 전할 대상이 넓게는 온 세상이고 좁게는 한 개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해서 온 세상을 구원시키기 위해서라고 이해하면 안됩니다. 복음이란 구원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의미가 함께 있습니다. 즉 복음은 하나님의 백성과 백성이 아닌 자를 구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은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지만 백성이 아닌 자들, 즉 신앙으로 살아가지 않는 자들에게는 경고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온 세상에. 땅위에 거하는 모든 이들에게 전파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어야 종말이 온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마 24:14절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복음을 가진 천사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향해서 외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렇게 새삼스러운 말이 아닐 것입니다. 신자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지 신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지 않느냐는 정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7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심판의 때에 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에게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았는가로 구분되어진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심판이 이르렀음을 알고 살아가는 신자에게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심판을 아는 신자에게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삶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공포를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공포감을 가져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이 나를 징계하지 않을까?'라고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공포감입니다. 아이들이 숙제를 안해갔을 때 선생님에게 벌을 받을 것을 겁을 내는 그런 공포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순종을 의미합니다. 현재 하나님의 권위는 어디에 있습니까?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존재하십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권위는 말씀 자체인 것입니다. 권위에 대한 순종은 말씀에 대한 순종을 의미하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음은 말씀에 대한 철저한 무시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나는 말씀을 무시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말씀을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평소 말씀을 무시하겠다는 의도도 없었고 또 그럴 생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비록 말씀을 무시할 생각이 없었다고 해도 여러분의 삶은 말씀에 대해 철저히 무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가운데 약자가 있습니다. 가지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분입니다. 세상은 가진 것을 기준으로 해서 사람의 대우가 달라지기 때문에 그런 분에 대해서는 자연 무시하게 됩니다. 힘이 없다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자를 있게 하신 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약자임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자연히 약자를 무시하지 않게 됩니다. 세상 사람이 약자를 무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격이고 윤리이고 양심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약자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기 때문에, 말씀에 의해서 약자가 내 앞에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기 때문에 무시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즉 말씀이 그를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는 신자라면 말씀의 권위 앞에 복종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말씀에 대한 복종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합니다. 말씀이 살아있는 신자라면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무덤덤할 수 없습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게 될 것입니다. 즉 회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자에게서만 보여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이 우리 속에서 삶의 하나하나를 점검하고 책망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말씀 하나하나가 나를 치고 책망하고 나의 부족함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예비하는 삶을 살았던 것은 말씀이 노아를 다스리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예비하게 한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산다면 여러분은 말씀에 의해서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탐욕은 곧 우상숭배라는 말씀이 탐욕으로 살아가는 여러분을 책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말씀을 대한다고 해도 자신의 탐욕에 대해서 책망을 받지 않습니다. 결국 회개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것은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7절 하반절에 보면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신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나라를 만드신다는 것을 믿는 자라면 세상을 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실 새 나라를 소망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대한 경고입니다.

모두가 세상 것을 구하고 세상 것을 의지하고 세상 것을 소망하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이 세상의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도 않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살아가는 것은 세상에 대한 경고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세상을 구하지 않는 것이 곧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의 삶이 과연 방주를 예비하는 삶이냐는 것입니다. 노아가 비록 당시의 사람들에게 '심판이 임한다 회개하라'는 말을 외쳤다고 해도 방주를 예비하지 않았다면 심판을 경고하는 것은 말로만 그쳐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즉 노아 자신도 심판을 믿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심판을 외친 것으로 그쳐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주를 예비한 것은 노아의 삶 자체가 심판을 경고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심판을 경고하고 있습니까? 심판을 경고하는 삶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영광돌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심판을 알기 때문에 자신에 죄에 대해서 책망을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멸망당함을 알기에 세상을 구하고 세상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심판을 보여주고 경고하는 삶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여러분 자신이 어떤 자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심판에서 살아남을 신자입니다. 어제까지의 삶은 잊읍시다. 중요한 것은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는 것입니다. 하루하루를 심판이 바로 앞에 있음을 아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심판이 이른 이 세대에 진심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이 어두운 세상에 심판을 선언하고 증거 하는 도구로 드러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