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4:17-20 심판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지 않고 하나님을 찾는다면 고전 16:22절의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가벼이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께서 임하신다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주님이 재림하셨을 때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저주'로 갚으신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런데 심판이든 저주든 그것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이 산다면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기다려진다거나 두렵다거나 하는 마음과는 거리가 멀 것입니다. 마치 재림 따로 내 삶 따로 라는 식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재림이든 심판이든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에 '나는 과연 주님을 사랑하는가?' 따위의 생각은 할 필요도 없는 듯 살아갈 것입니다. 혹 그러한 생각을 해본다고 해도 그 이유는 주님을 사랑함으로서 복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에 의해서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신자는 어떤 모습으로 구분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에게만 오시는 성령의 인치심에 의해서 세상 속에서 증거 되는 신자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성령은 신자로 하여금 세상이 아닌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따라가도록 하십니다. 인간은 본질상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 즉 십자가는 그 어떤 인간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셔서 자기 백성을 인치시고 그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서 그리스도가 가신 그 길이 바로 생명의 길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가신 길이 생명임을 알고 사는 신자라면 자연히 소망은 세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할 수밖에 없고, 그리스도가 오길 날을 고대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서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뭘 하든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게 되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날마다 자신의 삶을 점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세상의 운명을 알고 있고 하나님의 계획인 그리스도의 오심이 분명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심판 아래서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 인생의 소망을 둔다는 것이 어리석은 것임을 알기 때문에 항상 자신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지 점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누구든 예수님을 따르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렇게 살아가도록 내버려두면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보다도 세상에 좋은 것을 취하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더 좋다고 한다면 그렇게 살아가라고 놔두면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향해서 심판을 외쳤던 선지자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고, 회개하라고 외치면서 나무뿌리에 도끼가 놓여있다고 선언한 세례 요한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심판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입니다. 세상을 긍정하지 않는 삶인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정신이 전혀 없이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스스로 신자로 사는 것을 포기한 채, 다만 세상을 향한 자기 소망의 달성에만 목적을 두고 교회를 나오는 종교인이며 멸망당할 자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심판은 관심거리 밖의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문은 심판에 대해서 말씀을 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을 드렸듯이 하나님이 심판에 대해서 아무리 경고를 한다고 해도 그리스도를 따라가기를 거부한 자들에게는 '우이독경(牛耳讀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말씀을 들을 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말씀입니다. 세상의 운명은 심판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신자로서 세상의 운명을 잊지 말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운명이 심판이라면 세상은 결코 머물 곳이 못됩니다. 빠져 나와야 할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은 자기 백성을 세상, 즉 죄에서 구출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린 익은 곡식에 대한 추수를 미래에 일어날 일로만 생각하지 말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즉 신자의 구원이 미래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구원을 얻을 자가 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얻은 자로서의 모습을 증거 해야 할 자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은 날마다 일어나고 있는 구속 사역임인 것입니다. 즉 날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추수하시는 것입니다.

심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심판을 미래의 사건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심판에 대해서 느긋한 마음이 되는 이유는 심판을 미래의 일로 국한하여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지금 현재와 미래 사이에 있는 시간상의 간격을 염두에 두고 나중에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심판에 대해 느긋한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현재적인 사건입니다. 이미 심판은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심판에 대해서 느긋한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나중에'라는 단어가 해당될 수 없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고 말씀합니다.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리고 예리한 낫을 가진 자에게 외치기를 땅의 포도가 익었으니까 그 포도송이를 거두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추수를 의미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19,20절에 보면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포도를 거두어서 하나님의 진노의 틀에 던져서 틀을 밟아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볼 때 본문은 분명 하나님의 심판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14-20절은 모두가 하나님의 추수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13-16절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추수, 즉 구원을 말하는 것이고 오늘 본문 14-20절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에 대한 추수, 즉 멸망의 심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포도를 수확하고 포도즙을 짤 때 포도주 틀이라고 하는 것에 포도를 넣고 발로 밟아서 짭니다. 이것을 빗대어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포도를 넣고 밟아버리는, 그래서 완전히 뭉개져서 그 즙이 빠져나오는 것을 하나님의 진노의 틀에 던져져서 밟히고 피가 나오는 것으로 비유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진노의 틀에 던져져서 밟히는 것은 마지막 때의 사건이지만, 진노의 틀에 던져질 익은 포도를 거두는 것은 현재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하나님은 진노의 틀에 던질 익은 포도를 추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심판에 대해서 뭔가 여유가 있는 듯한 마음이 되는 것은 우리들의 눈에 심판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상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엄청난 사건들이 보여지지 않기 때문에 마치 아직 심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착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날마다 심판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다만 하나님의 일을 볼 수 없는 소경된 자들이 심판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란 없습니다. 비와 공기는 자연적인 현상일 뿐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지금 자기들의 수중에 있는 것은 자신들이 일하고 노력해서 벌어들인 것이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결코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무 일도 안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고 먹을 것이 떨어진다면 모르겠는데, 분명 자신들이 직장에 다니고 사업을 하고 일한 것이 있고 그 대가로 벌어들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 속에 있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죄인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점차적으로 심판 받을 죄인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심판 받을 죄인입니다. 익은 곡식을 거두듯 익은 포도를 거둡니다. 신자가 점차 익어는 것이 없는 것처럼 죄인이 점차 익어 가는 것도 없습니다. 즉 점차로 죄인이 되어 가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크고 적음이 없듯이 죄 역시 크고 적음이 없습니다. 죄에 대한 세상적인 기준은 그 행동을 보고 경중을 따집니다. 도둑질 보다 살인을 더 큰 죄로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큰 죄 작은 죄가 없습니다. 똑같은 죄입니다. 도둑질이나 살인이나 똑같은 죄입니다. 도둑질 한 사람에게는 가벼운 지옥이 살인한 사람에게는 무거운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죄가 똑같은 것으로 취급을 받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을 죄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도둑질로 인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살인으로 인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상한 말로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치 도둑질이나 살인을 용납하고 옹호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똑같다는 것은 도둑질이나 살인을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 이전에 이미 그 사고방식 자체를 죄로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누구든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저주의 기준이 '누가 주를 사랑했느냐?'로 등장합니다. 누가 도둑질을 했느냐, 누가 살인을 했느냐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누가 주를 사랑하지 않았느냐?'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도둑질을 하게 되고 살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웃이 피해를 입고 피를 흘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돈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란 크고 작음이 없고 이미 익은 상태임을 알아야 합니다. 죄란 익어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익은 것이라면 익은 포도를 거두는 일은 이미 시작된 사건임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한 사건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겠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열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에 의해서 고침 받는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열명의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았을 때,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에게 돌아와서 감사한 자는 한명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깨끗함을 받은 사람은 열명인데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자는 한사람 밖에 없다고 하시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이 사건은 단지 받은 은혜가 있으면 예수님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목사들은 예수님에게 받은 은혜가 있으면 반드시 예수님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하면서 감사헌금을 강조하지만 그러한 가르침은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신 의도에서 벗어난 채 자기 의도를 가지고 자기의 말을 하고 있는 엉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건에서 생각할 것은 문둥병의 고침이라는 은혜는 열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것이었지만 구원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임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문둥병의 고침이라는 엄청난 은혜가 구원받지 못할 자에게도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생각할 때 문둥병이 고침 받은 놀라운 이적은 그가 신자이기 때문에 구원받을 자이기 때문에 주어져야 합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병이 고침 받는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아홉 문둥병자는 병이 고침을 받는 은혜는 입었지만 구원을 받지 못한 자로 구별되었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한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세상에서 주어진 은혜가 구원에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신자이기 때문에 복을 받는다는 논리가 잘못된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아마 사형선고를 받은 어떤 신자가 기도해서 병이 나았다고 할 때 그것을 하나님의 놀라우신 기적으로 은혜로 말하면서 믿음이 신실하기 때문에 그러한 은혜를 받았다고 떠들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기정사실화 해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문둥병을 고침 받은 아홉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할 것입니까? '그것은 그가 예수님에게 감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것입니까? 그렇게 말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갑니까?

문둥병이 고침 받은 은혜는 구원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 모두에게 주어진 은혜입니다. 즉 우리의 육신이 살아가는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 받을자와 받지 못할 자의 구분은 과연 누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에게 오는가로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서 육신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모두가 똑같지만 그 속에서 과연 누가 자기에게 주어진 것으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에게 돌아오느냐? 그가 바로 구원받은 신자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는데도 은혜를 보지 않고 삽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이 아닌 자에게도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가 바로 심판 받을 자임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심으로서 주어진 것으로 하나님에게 영광돌리며 주께로 나오지 않는 심판 받을 자임을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하나님은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 모두에게 비를 내리시는 분입니다. 그것으로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하시는 것입니다. 농사꾼에게 비는 매우 중요합니다. 비는 농사꾼의 삶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만약 농사꾼이 신자라면 비가 내림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역시 농사는 내가 짓지만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나는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다'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단지 자연의 현상으로만 이해할 뿐입니다. 그래서 비가 내림으로서 신자와 불신자가 구분되는 것이고, 그것으로 날마다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가 고침 받는 사건을 통해서 '세상 모두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아가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데 과연 그 가운데서 누가 자기에게 주어진 은혜로 인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에게 나오느냐?'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구원받은 자입니다. 몸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에게 마음을 두고 나오는 자가 신자인 것입니다.

18절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온다고 말씀합니다. 제단으로부터 나온 천사이기 때문에 그가 다스리는 불이란 제단의 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단의 불은 심판의 불입니다. 이스라엘이 제단에서 제물을 바치면서 불로 태울 때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받아야 할 심판을 제물이 대신 받는 것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단의 불은 이스라엘의 심판을 보여줌과 동시에 제물이 대신 심판을 받았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배우지 않습니까?

이처럼 제단의 불을 다스리는 천사가 익은 포도를 거두라고 외쳤다는 것은, 하나님의 제사가 곧 심판의 기준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친히 제물이 되셔서 자신을 바친 십자가가 심판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20절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의 틀을 성밖에서 밟는다고 말합니다. 성이란 예루살렘 성을 말합니다. 원래 성밖에서 밟히고 죽임을 당한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 성밖에서 진노의 틀을 밟으신다는 것입니다.

참된 성전은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계신 그 곳이 참된 예루살렘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헤롯의 칼을 피해서 애굽으로 피신하라고 계시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선지자가 말한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함을 이루러 함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부터 피신했지만 애굽으로부터 불렀다고 말함으로서 결국 헤롯이 있는 예루살렘이 애굽이 되고 예수님이 계신 애굽이 예루살렘으로 불려짐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성밖에서 죽음을 당하신 것은 결국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 그곳이 참된 성전이고 예루살렘이며 예수님을 죽인 예루살렘은 애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 13:13절에서는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서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인간의 영광과 소망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한 그 곳은 애굽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나와서 능욕을 지더라도 예수님이 계신 영문 밖으로 나가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이 진심으로 성전이고 예루살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밖에서 틀을 밟는다는다는 말씀에서 인간이 자기 손으로 지은 성전이 있는 곳, 즉 자신들의 힘으로 소망을 이루고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사고방식이 삶의 체제로 되어있는 예루살렘 성이 곧 참된 성전이 되신 그리스도 밖에 거하는 심판 받을 자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능욕을 지고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는 주님의 은혜를 아는 자입니다. 주님이 참된 생명임을 알기 때문에 능욕을 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주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이들로 인해서 지어진 것이 진정한 예루살렘 성입니다.

욜 3:13절에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고 말합니다. 본문과 같은 내용의 말씀입니다. 악이 크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죄에 대해서 깨닫지를 못한 것을 말합니다. 죄를 모르기 때문에 교만하고 강퍅합니다.

죄는 우리를 깨끗케 하신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할 때 드러납니다. 그리고 회개하게 되어집니다. 이들이 익은 곡식 알곡입니다. 예수님은 땅의 것을 위해서 살지 않았습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이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세상의 것이 얼마나 있느냐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쓸데없는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는 이러한 예수님의 삶을 생각할 때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땅의 것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바로 사단의 가르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과연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나아오느냐가 중요합니다. 날마다 주어진 것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줄 아는 자가 신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주시고 살아가게 하신 것은 누가 심판 받을 자인가를 증거 하시는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주어진 땅의 것으로 기뻐하지 마시고 주어진 것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께 나아오는 자로 살아가십시오. 그가 바로 구원받은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