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5:5-8 심판의 이유

저에게 이 세상의 실체를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폭탄을 싣고 불구덩이로 질주하는 고속열차'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이러한 표현이 아주 극단적이고 세상에 대해 극도의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한 인간으로 비쳐진다는 것은 저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볼 때 과연 어느 누가 세상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묘사했습니까? 선지자들이 말하는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멸망의 장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도 세상을 소위 긍정적인 시각으로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세상을 향해서 한 말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이었습니다. 또한 세례요한에게 인식된 세상의 실체는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는 것과 같은 형국이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세상으로부터 어떤 불이익을 받았다거나 소외된 계층으로서 무시와 천대를 받고 살았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의 실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요한이 살았던 현실이 도덕과 윤리가 무너지고 악한 일들이 비일비재해서 그것을 기준으로 평가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세상에 대한 평가 기준이 도덕과 윤리라면 분명히 세상 속에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사람이 존재합니다. 아무리 도덕과 윤리가 무너진 세상이라고 해도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요한은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을 향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외침을 하는 것입니까? 이 말은 달리 이해하면 이스라엘은 천국과 상관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들의 주장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천국이 보장된 선민이 확실하다면 요한은 회개하라는 말을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란 종교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이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회개하라는 말을 들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라는 종교에 담겨 있는 커다란 함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지금의 기독교를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만 믿고 예수를 안믿었지만, 우리는 하나님도 믿고 예수도 믿는다는 생각이 커다란 함정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교회는 예수를 믿는다는 함정에 빠진 채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소경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회개하라고 외치면서도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회개를 하기 위해서는 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죄도 모른 채 회개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회개하라'는 외침을 했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그 사람의 죄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회개하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혹 죄를 안다면 너의 죄는 이러이러하니까 회개해야 한다라고 말을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이스라엘의 죄가 무엇인지도 말하지 않은 채 '회개하라'고 외친다는 것은 분명 상식과 도리에 맞지 않은 행동일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은 이스라엘의 죄가 무엇인지 몰랐던 것입니까? 아니면 알면서도 말을 하지 않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요한이 죄를 말하지 않은 채 회개하라고 외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서 그 본질을 확실하게 드러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을 때 이스라엘이 죄로 여기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제사를 드리지 않고 맏물을 드리지 않고 할례를 하지 않고 십일조를 하지 않는 등, 율법대로 하지 않은 것을 죄로 여긴 것입니다. 때문에 율법에 대한 실천에 모든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던 이스라엘로서는 요한의 회개하라는 외침에 대해서 전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과의 충돌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죄를 몰랐습니다. 죄를 율법에 대한 행동의 부족으로 이해했고, 그 죄만 회개하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실 그들에게는 예수가 필요치 않았던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 한분으로 충분했고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으로 이미 천국은 보장된 민족임을 자신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감이 곧 오늘날 교회의 자신감일 수 있고, 죄가 무엇인가를 모르는 이스라엘이 곧 오늘날 교회의 모습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죄에 대한 무지에 있습니다. 교회가 죄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뜻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지한 자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을 볼 때, 결국 그 예수는 약자로서 세상에 오신, 그리고 우리를 다스리시는 주 예수가 아니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죄에 무지하다면 세상이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무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에 대해 무지한 교회가 인식하는 심판의 이유는 단지 예수를 안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를 안나오는 것, 기독교란 종교를 가지지 않는 것, 이런 이유로 인해서 심판을 받는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심판에서의 탈출구가 마치 교회에 있는 것처럼 교회에 나와서 예수 믿을 것을 전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세상 역시 죄에 대해 무지합니다. 그래서 그들도 하나님의 진노나 심판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안믿었다는 것 때문에 심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너무 독단적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죄에 무지한 교회나 세상이나 같은 구렁텅이에 있는 존재이며 회개도 할 수 없는 망할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가 무엇입니까? 왜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멸망을 기다리는 어둠의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까? 본문 5-6절을 보면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라고 말씀을 합니다.

이 본문에 보면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등장을 하는데 그들이 성전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해서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곱 재앙을 가진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일곱이란 수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시고 이루신다는 의미가 있는 수라는 것에 대해서 많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일곱 재앙이라는 것도 재앙이 일곱 가지란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재앙이라는 뜻입니다. 그 재앙을 가진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결국 성전이 재앙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그냥 성전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하지 않고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고 그 성전으로부터 천사가 나오는 것으로 말합니다. 증거 장막의 성전이란 하나님의 언약궤, 즉 증거궤가 있는 성전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성전이 열림으로서 성전 안에 있는 언약궤가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계 11:19절에 보면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하늘의 성전이 열린 것은 이미 11장에서 일어난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15장 본문에서 성전이 열리고 천사가 나온 것으로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전의 문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 것입니까?

하늘의 성전이란 상징적인 의미로 쓰이는 말입니다. 즉 실제로 지상에 있었던 성전과 같은 성전이 하늘에 있어서 그 성전에 천사도 살고 하나님도 살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이 실제로 지어진 건축물이 아니라면 문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열리고 닫힘을 반복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요한계시록을 말씀을 드리면서 계시록을 역사적인 시간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역사적 시간개념으로 사건 하나하나를 순서적으로 나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열린 문이 닫혔다가 또 다시 열린 문이 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묵시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시간 개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건 하나하나는 순서적으로 배열된 것이 아니라 중첩되어 있는 것임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으로부터 재앙을 가진 천사가 나온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성전이 열리면 언약궤가 보입니다. 11:19절에서도 성전이 열리니 언약궤가 보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번개와 음성과 뇌성과 지진 큰 우박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전의 언약궤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과 심판이 연관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심판의 기준이 언약궤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언약궤를 통해서 드러난 언약의 의미를 모른다면 자연히 죄를 모르게 되고 죄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을 포함한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언약궤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제 이 세상은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언약의 기준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는 양심과 도덕 윤리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로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언약궤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휘장이 둘로 찢어진 것을 통해서도 설명될 수 있습니다. 언약궤는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까지 휘장에 의해서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죽으신 순간 휘장이 찢어진 것은 언약궤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즉 언약궤가 있던 지성소의 구별이 사라진 것입니다.

언약궤에 담겨 있던 것은 모두가 인간이 하나님에게 불순종하고 원망했던 죄의 산물이었습니다(출16:32-35,민17:8-11). 율법대로 하면 그들은 심판을 받아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언약궤 위에 뿌려진 제물의 피로 인해서 그들은 심판을 면했던 것입니다. 심판의 저주가 애매한 제물에게로 돌려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피로 인해서 살 수 있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생명은 제물의 피에 있었던 것이고 그들을 살리는 의 역시 제물의 피에서 찾아야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심판에서 벗어나는 의는 인간에게서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제물의 피를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심판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궤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순간 찢어짐으로서 지성소 깊숙이 있던 언약궤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언약궤의 실체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언약궤에는 인간의 죄와 피로 인한 용서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에는 인간의 죄와 피로 인한 용서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십자가 아래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 심판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의 죄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결코 제사에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언약궤에 피를 뿌리는 제사에 게을리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약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다만 제사를 드리는 의식에 관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제사라는 의식이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는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언약궤에 피를 뿌리는 것이 자신들에게는 의가 없음을 보여주는 현장임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끝까지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고난의 현장이 아닙니다. 그리고 신앙이란 고난의 현장인 십자가를 찾아가서 불쌍하게 죽은 그리스도를 추모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들의 죄의 실체입니다. 십자가 아래서 우리는 죄가 고발당해야 하고 우리에게는 의가 없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못박히고 피를 흘리셔야 했는지 그 이유가 명백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이란 우리의 모든 의가 포기되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가 인간의 행함과 행함의 의를 고집하면서 십자가를 말한다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자기 행함을 포기하지 못하면서 그리스도의 피를 말하는 것도 가짜입니다. 언약을 보지 못하고 언약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당연히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을 의지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으로 살고 자기 능력과 양심과 도덕으로 선을 이루어서 그것으로 내세까지 붙들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자신들의 행위, 즉 예배와 기도와 헌금 등등의 의로 여기는 행위를 의지한다면 과연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의를 의지하는 것이나, 교회가 자신들의 종교 행위를 의지하고 붙드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저주 아래 있는 세상의 현실입니다. 희생제물을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를 의로 여기지 말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의를 고집하는 것 자체가 곧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다같이 하나님이 진노 아래 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들 중 누가 자기 의를 가지고 하나님이 진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대신 피흘리신 어린양이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린양을 사랑하는 자와 사랑하지 않는 자로 구별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는 어린양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양을 사랑할 마음이 전혀 없는 이 세상의 실체는 마치 폭탄을 싣고 불구덩이로 질주하는 고속열차와 같다는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친 것도 결국 그 기준이 그리스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세상을 향한 외침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무엇이 죄인가가 확실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안다면 자신의 죄가 발견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7,8절에 보면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고 말씀합니다. 일곱 천사가 받은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가득히 담긴 일곱 대접입니다. 그리고 16:1절에 보면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장차 재림하실 때 일어날 일이 아닙니다.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천사가 진노가 담긴 대접을 땅에 쏟았다면 지금 이 세상은 이미 하나님의 진노가 흘러 넘쳐 있는 곳임이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때는 오직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때인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가 그리스도만을 소망하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에 대해서 소망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향한 욕망의 끈에 붙들린 채 세상으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흘러 넘치고 있는 세상의 실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어리석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왜 세상이 죄 아래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가를 명확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외침 앞에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위기감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한 우리들의 그 어떤 시도나 노력도 아무런 효능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저주를 대신해서 담당하신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새희망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가 유일한 소망임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다른 곳에 소망을 두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과연 무엇에 소망을 두고 사십니까? 이 세상 어디에 여러분의 소망이 될만한 것이 있습니까? 심판이 없다면 모르되, 이 세상에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이 쏟아지지 않았다면 모르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세상이 진노 아래 있음이 확인되어진 이상 우리의 소망은 오직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요 12:24-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는 이것이 세상에 대해서 죄를 묻는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본문 6-8절의 말씀은 이사야 6:1-6절에서 이사야가 성전에서 경험한 것과 같습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만난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외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만난 자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만난 자는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정한 자들입니다. 무엇을 해도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릴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쓸데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지말고 하나님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로 살기를 소원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보다 더 큰 소원이 여러분을 붙잡고 있다면 그러한 여러분 자신을 미워하십시오. 절대로 여러분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소망함은 우리 자신을 포기하고 미워함으로서 그 빈자리에 그리스도로 인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