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6:1-7 쏟아진 진노

사람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든 그 가치는 환경에 의해서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즉 현재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라고 해서 그 가치성이 모든 환경에서 동일하게 유지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타이타닉이란 영화를 보면 배가 침몰을 하는 광경이 나옵니다. 모든 사람이 배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우왕좌왕할 때 구명조끼를 구하지 못해서 쩔쩔매던 어떤 돈 많은 부자가 구명조끼를 가진 사람에게 돈을 한 뭉치 주면서 그 조끼를 팔라고 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과연 조끼를 팔겠습니까?

배가 침몰을 하는 상황에서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은 자신의 생명을 지켜줄 수 있는 구명조끼입니다. 물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주는 구명조끼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죽어가면서도 돈을 손에 쥐고 싶어하는 미치광이라면 얼마든지 돈 뭉치에 구명조끼를 팔아버리겠지만, 돈 보다 더 자기 목숨이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돈 몇 뭉치가 아니라 한 국가를 준다고 해도 역시 우선은 자기 생명이지 않겠습니까? 결국 그런 상황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돈이라는 것도 자신이 살아있을 때 좋은 것이지 죽은 다음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배가 침몰할 상황을 대비해서 준비해둔 구명 조끼는 평소 상황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배가 침몰을 하게 된다면 구명조끼보다 더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국 돈은 휴지조각으로 취급되어 버리고 구명조끼는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듣고 방주를 만들 때 사람들은 방주를 만드는 노아의 행동을 정신나간 짓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단지 방주를 만든다고 해서 정신나간 행동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든 배는 만들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방주를 바닷가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땅에서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들라고 명령하신 방주의 규모는 땅에서 만들어서 도저히 바다까지 끌고 갈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크기의 방주를 바닷가가 아닌 땅에서 만든다는 것은 도저히 다른 사람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행동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크고 좋은 방주라고 해도 물에 띄울 수가 없다면 무용지물입니다. 그러므로 노아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헛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옳았는가는 하나님이 땅을 덮어버리는 홍수를 일으켰을 때 드러납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삶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고, 땅에서 만든 방주가 무용지물이 아니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시행되는 심판을 통해서 증명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물에 잠겨 죽어가면서 방주에 타서 생명을 건진 노아를 바라보고 누가 진정으로 지혜 있는 자였는가를 절실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어리석음이었던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결국 심판이라는 상황에서 무엇이 진심으로 소중하고 귀한 것이며 어떤 삶이 지혜 있는 삶인가가 증명된 것입니다.

돈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소중하고 귀한 것은 아닙니다. 돈은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돈을 버는 것이 지혜 있는 삶은 아닙니다. 그런데 세상은 돈을 소중하고 귀한 것으로 여깁니다. 모든 지혜와 지식이 돈을 벌기 위한 수단과 방법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은 심판을 외치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요한계시록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서 수없이 많은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서 제발 믿어달라는 말씀을 드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잘못되거나 하나님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에게 선심을 쓰듯 믿음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믿어주지 않으면 하나님에게 큰 손해가 발생할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어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믿어달라는 부탁을 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이 자기 교회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목사나 교인들이었을 것입니다. 내 교회가 부흥되고 성장되는 것에 목적을 두고 모이는 그들이 바로 여러분에게 교회를 나와 달라고, 예수님을 믿어달라고 부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하나님의 부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과는 전혀 상관없이 스스로의 일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이루시는 분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께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도 보면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선포이지 부탁이 아닙니다. 세상의 현실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 제발 하나님의 심판을 이해하고 믿어달라고 부탁을 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믿어주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만 믿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은혜를 입은 노아만이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믿었듯이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이 말씀이 들려질 것입니다. 그들만이 이 말씀 안에서 세상의 현실이 어떤가를 제대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믿자는 부탁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부탁을 하지 않아도 말씀 안에서 세상의 현실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을 땅에 쏟으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쏟을 준비를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쏟으라고 하셨고, 2절부터는 차례차례 진노의 대접을 땅에 쏟음으로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말씀을 합니다. 따라서 본문의 말씀을 나중에 예수님이 오시면 되어질 일로 여기시면 안됩니다. 이미 이 세상에 쏟아진 대접이고 따라서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진 현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상 현실에서 소중하고 귀하고 가치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앞서 말한 대로 배가 침몰하는 위기에서 소중한 것은 평소 하찮게 여겨지던 구명조끼입니다. 침몰이라는 상황만 없다면 아무런 필요도 없고 소유할 가치도 없는 구명조끼이지만 침몰이라는 상황에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세상 현실을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진 것으로 말씀합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소중한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에서 우리를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것은 교회를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도 부인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믿음을 소중하고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까? 아니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귀찮고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겨버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세상 현실을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진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든 교회만 붙들면 그것으로 믿음이 인정되고 천국 갈 수 있다는 생각이 오직 그리스도만 사랑해야 하는 믿음을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이 하나님의 진노를 믿으라는 차원에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면 왜 우리에게 심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확인되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진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는가를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본문을 읽으면 애굽에서 있었던 하나님의 재앙을 생각하게 합니다. 본문의 재앙은 애굽의 재앙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2절에서 말씀하는 독종은 애굽에 내려진 여섯째 재앙과 같습니다. 그리고 3절에서 바다가 피로 변한 것이나 4절에서 강과 물근원이 피로 변한 것은 애굽에서 있었던 첫째 재앙과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진노의 대접이 쏟아졌을 때 세상에 내려진 재앙이 애굽의 재앙과 같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애굽의 재앙을 이해하는 가운데 본문이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재앙은 단순히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애굽을 징계하고 이스라엘을 구해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이 된 것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이 되고, 그리고 모세를 보내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의 재앙을 단지 이스라엘의 구출로만 이해해 버린다면 하나님은 참으로 번거로운 방법을 쓰시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이 되지 않도록 하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이 되도록 하시고 그들이 이스라엘을 놓지 않는다고 해서 무작정 벌을 주시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이 되게 하신 것이나, 또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해서 순순히 이스라엘을 내어 보내지 않도록 하시고, 애굽에 재앙을 내리시는 모든 과정에는 하나님의 다른 의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하나님 백성이 아닙니다. 인간은 모두가 똑같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애굽보다 나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처음에 재앙은 이스라엘과 애굽에 구분이 없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스라엘과 애굽이 구분되어서 재앙이 주어집니다.

결국 이것은 이스라엘도 애굽과 같은 존재로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나중에 구별된 재앙 속에서 이스라엘은 애굽의 징벌을 보면서 뭔가 계시되어지는 것이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애굽인의 삶의 태도는 전적으로 자신들이 일해서 얻어들인 소산물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중에 광야에서 그러한 삶의 태도를 드러내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애굽인이 의존하는 소산물을 칩니다. 즉 그들이 의존하는 것을 침으로서 생명의 근원은 다른 것에 있음을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결국 애굽의 재앙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태도를 배우게 한 것입니다. 자신들과 힘과 노력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지킬 수가 있다는 태도가 바로 하나님의 공격을 받아야 할 대적이며 원수라는 사실이 재앙을 통해서 증거된 것입니다. 설사 이스라엘이라고 해도 애굽과 같은 삶의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면 그들 역시 하나님의 대적이요 재앙을 받아야 할 원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명확히 드러난 것이 마지막 10번째 재앙입니다. 10번째 재앙은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누구든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드러내신 새로운 생명의 근원입니다. 어린양의 피가 곧 생명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 생명의 근원을 자신의 힘으로 거둬들인 세상의 소산물에 두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에 두는 삶의 태도로 바뀐다면 그가 곧 하나님의 백성이고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월절 어린양의 정신이 계속 이어지는 이스라엘만을 참된 이스라엘로 인정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애굽의 재앙을 통해서 새롭게 탄생되어진 집단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보호되고 생명을 얻은 백성들입니다. 결국 10재앙은 산자와 죽은 자로 구별되는 마지막 결론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을 지키도록 하시는 것은 유월절 정신과 동행하지 않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다운 삶은 곧 유월절 정신과 동행함으로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도 유월절 정신과의 동행에서만 가능한 것들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흔히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의 재림이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재림이 중심이라면 왜 예수님을 구약적 용어인 어린양으로 묘사하는 것입니까? 요한계시록은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중심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구약적 용어인 어린양으로 말씀하는 것은 예수님이 곧 구약의 완성자이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도 애굽의 재앙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애굽의 재앙을 통해서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보호된 집단이 탄생된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진 이 세상의 현실에서 뚜렷이 구별되는 한 집단이 탄생을 하는데 그들이 곧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피로 탄생된 집단인 것입니다. 이들은 세상이 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지 이해하는 자들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힘을 의지하고 그 힘으로 걷어들인 소산물을 자기 생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의 태도가 곧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임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들의 삶의 태도를 따라가지 않고 어린양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참된 생명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생명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태도를 가진 그들이 곧 하나님의 백성이며 신자인 것입니다.

6절에 보면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고 말합니다. 피로 변한 물은 하나님의 보복 차원의 심판입니다. 저희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은 피흘리게 한 보복 차원의 재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자신들이 흘리게 한 피는 자기가 마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칼을 쓴 자는 칼로 망한다'는 말씀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피를 마시는 자는 피를 흘리게 한 자들이지 피 흘린 자들입니다. 곧 최종 승리자는 피흘린 자라는 것입니다.

성도들과 선지자들 앞서 피 흘리신 분은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결국 이들이 피흘렸다는 것은 어린양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뜻이 됩니다. 어린양과 동행하는 삶은 남들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를 흘리고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린양의 정신은 희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어떻습니까? 신자라고 하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린양과 동행하는 삶입니까? 어린양과 동행하는 삶이라면 어린양의 희생의 피를 자기 몸에 두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참으로 부끄러운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말하고 예수님을 찾았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들먹이면서도 우린 희생을 마다했고 피흘리신 어린양과의 동행을 거부했습니다. 주님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두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자신을 신자로 여겼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몸에 희생의 흔적을 두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유월절 어린양의 저주를 쌓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7절에 보면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제단이 말한다고 합니다. 제단은 제물이 죽고 피흘리는 현장입니다. 그 피흘림의 현장이 하나님의 심판을 참되고 의롭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세상은 어린양의 피의 저주 아래 있음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린양의 피의 저주 아래 있습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피를 무시하는 삶의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은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쏟아진 진노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돈 있으면 뭐하고 성공하고 출세하면 뭐합니까? 결국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인생이라면 비참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겉으로 보여지는 것은 호화로운 인생이고 부러운 인생이고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이 다시 세상에 오실 때 무엇이 진실이며 무엇이 참된 것이고 지혜로운 것이고 최종적인 승리자가 누구인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남기신 자가 곧 승리자가 아니겠습니까?

배가 침몰할 때 돈을 타고 목숨을 구할 것입니까? 권력이 살려줄 수 있는 것입니까? 물에서 우리는 살리는 것은 구명조끼밖에 없습니다. 구명조끼의 가치와 소중함은 배가 침몰할 때 증거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소중함은 세상이 침몰할 때 증거될 것입니다. 신자는 그때를 미리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세상이 보기에는 전혀 무가치한 일입니다. 힘있는 것을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는 세상에서 힘이 아닌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를 생명의 근원으로 삼고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성공이나 출세와도 거리가 먼 삶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저주 아래서 진노가 쏟아진 세상임을 생각할 때 자기 부인 없이 오직 세상에서 번창하는 것에만 모든 소망을 두고 사는 삶은 곧 멸망을 자초하는 것임을 잊지 마시고 날마다 생명 되신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힘이 되고 새로운 소망이 되고 위로가 되는 삶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