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6:8-11 회개치 않음

본문을 보면 "넷째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 또 다섯째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고집입니다. 넷째 천사가 대접을 해에 쏟으니 해가 권세를 받아서 불로 사람을 태웠다고 말합니다. 또 다섯째 천사가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어두워지고 사람들이 종기로 인해서 자기 혀를 깨물 정도로 아픔을 겪은 내용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대개 이런 내용을 대하면 '이런 일이 실제로 이 세상에 있느냐?'라는 의문을 가집니다. 그리고 현재에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이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셨을 때 나타날 현상으로 여겨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본문과 같은 현상이 세상에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를 생각하기보다는 이런 엄청난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인간들의 반응은 어떤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만약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현상이 실제 우리들의 눈앞에서 벌어진다고 한다면 이것은 아주 놀라운 사건이 될 것입니다. 해는 아주 뜨거운 물체입니다. 이 지구를 다 태워 없애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해가 하나님에 의해서 지구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해가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아서 사람을 태워 죽인다면 이는 참으로 놀라운 자연의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첫째 둘째 셋째 천사가 대접을 쏟은 일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 천사가 대접을 쏟았을 때 독종이 나고, 둘째 셋째 천사는 바다와 강을 피로 변하게 합니다. 이런 실제 있다면 참으로 놀라운 자연의 이상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그러한 놀라운 일 속에서도 인간은 회개치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완악함이고 고집입니다.

해가 사람을 태워 죽이는 것을 눈앞에서 보여준다고 해도 인간은 회개치 않을 정도로 완악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애굽의 바로 왕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 애굽에 있었던 10 재앙은 그 하나를 가지고도 놀라울 수밖에 없는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재앙이 10가지가 거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하나님에게 굴복하지 않습니다. 비록 장자 재앙으로 인해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바로가 이스라엘을 내보냈지만 결국 다시 군사를 보내서 이스라엘을 뒤쫓도록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10재앙을 다 해도 바로는 하나님에게 굴복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재앙을 통해서 증명된 것은 인간의 완악함이었습니다.

며칠 전 어떤 나라에서는 진흙이 마을에 밀려와서 온 마을을 뒤덮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이상스런 자연의 현상이라고 떠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애굽에 있었던 재앙 중에 진흙으로 온 마을을 덮어버리는 재앙이 있었다면 지금 실제로 일어난 이상한 자연적인 일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겠습니까?. 진흙이 마음을 덮어버리는 것을 보면서 애굽의 재앙을 생각하고 회개하겠습니까? 그럴 인간은 없습니다. 놀라운 자연의 현상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찾고 회개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회개하게 하기 위해서 놀라운 일들을 계속 일으키면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자연의 놀라운 현상만 가지고도 되어지는 것이라면 지옥갈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놀라운 자연 현상은 옛날부터 있었던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하나 이상한 자연 현상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믿게 된 자는 없습니다.

아마 놀라운 자연의 이적을 체험한 민족을 꼽으라면 단연 이스라엘일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이 체험한 이적은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입니다. 바다가 갈라지고 그 사이를 지나 건너편 육지로 건넌 체험을 한 민족이 이스라엘말고 또 누가 있습니까? 반석에서 물이 쏟아져서 목을 축였던 체험을 한 민족이 이스라엘말고 또 누구입니까? 하늘에서 내려온 세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만나라는 음식을 먹어본 민족이 누가 있습니까? 이렇게 신기한 이적을 체험한 것으로 친다면 이스라엘이 가장 월등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만 신앙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까? 갈라진 홍해를 건넜지만 그들은 애굽에서 먹었던 음식이 그리워서 원망을 하고, 마실 물 때문에 자신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한 모세를 원망을 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은 신기한 이적을 체험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재앙을 받았다고 해서 회개하게 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신앙이란 우리가 생각하듯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신기한 이적을 체험하면 당장 믿음이 생길 것 같고, 조그만 재앙에도 회개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에서 쉽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습니까? 있다면 무엇이 쉽다고 생각됩니까? 예배입니까? 아니면 기도입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뭔가 쉽다고 여겨지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것은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되는 것이니까 어렵다는 생각은 없을 것입니다. 기도 역시 나 홀로 앉아서 하나님을 부르면 되는 것이니까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시간만 내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봉사도 비록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는 것이지만 마음만 먹으면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전도를 하는 것은 조금 어려울지 모릅니다. 사람을 만나야 하고 길거리에 서서 전도지를 나눠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제를 하는 것도 적은 액수는 모르지만 액수가 커진다면 역시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여러분의 머릿속에는 쉬운 것과 쉽지 않은 것이 여러분의 기준에 의해서 이미 구분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회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자가 회개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사실 회개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은 어렵다는 생각보다는 쉽다는 생각이 지배적일 수 있습니다. 단지 자신의 죄에 대해서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면 되는데 어려울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릴 것은 신앙생활에 대해서 어렵다 쉽다는 구분이 있는 것은 신앙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신앙을 우리가 실천해야 할 문제로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것은 쉽게 여겨지고 어떤 것은 어렵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신앙이 있는 자의 삶입니다. 신앙이 있음으로 인해서 보여지는 삶이 곧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이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을 우리 쪽에서 쉽다 어렵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은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 즉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 있음으로 인해서 되어지는 삶 역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나타난 열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우리 쪽에서 어렵다 쉽다라고 판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신앙이 우리들의 힘으로 안되는 일, 즉 불가능한 것이라면 신앙생활 역시 우리들의 힘으로 되어지지 않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도저히 블가능한 일로 인정할 수 없다면, 내 스스로도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는 문제로 여겨진다면 신앙생활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 오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예배당에 모여서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설교 듣는 것으로, 기도는 하나님을 부르며 내가 원하는 것을 부탁하는 것, 구제는 가난하고 힘든 일을 당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 전도는 밖에 나가서 예수 믿으라고 소리치고 전도지를 나눠주는 것,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것, 이러한 오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록 어려운 것은 있을 수 있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어떤 종교적인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의 삶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개 역시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서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다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길로 붙잡혀 들어가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길로 붙잡혀 들어가는 삶은 자신이 스스로 살아가는 삶의 길이 잘못된 것임이 인정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우리자신에 의해서 실천되어질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회개란 현재의 자신에 대해서 부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부인이 없는 회개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볼 때 그 어떤 초자연적인 재앙이 있다고 해도 인간은 자신을 부인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재앙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재앙 속에서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이 재앙 속에서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불행입니다. 내가 불행을 당하는 것, 내가 괴로운 것, 내가 힘들어지고 고통을 겪게 되는 것, 이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재앙을 당하면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있게 하는가?'라는 항변만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서 회개란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재앙 속에서 주님의 고난과 고통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에 회개치 않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세상에 진노의 대접을 쏟으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얼마나 완악한가를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애굽의 재앙에서도 나타나는 것은 인간의 완악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린양의 피를 바름으로 살아난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속성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를 믿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힘든 일이 생기면 쉽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모든 권세가 하나님에게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이 하신 일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왜 이렇게 하시는가?'라고 항변을 하면서 하나님의 권세에 도전을 합니다. 그런 우리들 앞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난을 받으셨지만 '왜 이렇게 하시는가?'라고 항변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 증거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고난만이 아니라 순종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의 고통 안에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 주님의 순종을 보게 될 것이고 주님의 순종은 우리의 완악함과 불순종을 책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의 완악함과 불순종을 발견하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고 이 능력으로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얼마든지 진노하실 수 있으며 재앙을 쏟을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하는가?'라고 항변할 수 있는 권세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신자의 삶은 하나님의 권세 아래 존재합니다. 어떤 삶이 주어지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권세 아래서 되어진 일임을 잊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진노를 쏟으시고 재앙을 행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무엇에 대해서 회개해야 하는지는 자연히 알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고 소중히 여기는 자기 사랑은 하나님의 권세에 대해서 순종할 수 없게 합니다. 순종은 자신을 포기한 자에게만 해당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일이든 행하실 수 있음을 잊으면 안됩니다. 여기서부터 순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권세 아래 있는 신자는 오직 하나님이 행하신 대로 살아갈 뿐, '이렇게 해주십시오' '이런 일은 없게 해주십시오'라는 요구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서 회개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미 자기 요구를 마음에 품고 있기 때문에 그 요구대로 되어지지 않을 때 원망과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재앙은 단지 악한 자를 벌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권세 아래 복종하는 삶이 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수단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재의 삶에 불평이 있습니까? 힘든 일이 생기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십니까? 여러분의 삶을 포기하지 못해서 원망이 나올 때 십자가를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아들로서 묵묵히 하나님이 이끄신 인생에 자신을 복종시킨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의 악함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서 회개하게 되는 참된 신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