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6:12-16 아마겟돈

에덴동산에서 사탄이 인간을 유혹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단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하기 위해서겠습니까? 사탄이 인간을 유혹한 것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 세워놓으신 질서를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세워 놓으신 창조 질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말씀 아래 복종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말씀에 복종함으로 인해서 세상이 하나님의 질서 아래 있음이 증거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동산 중앙의 선악과가 무사함으로서 하나님의 질서가 유지되고 있음이 증명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생명나무의 과실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는 것 역시 하나님의 질서가 손상을 입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탄이 왜 하필이면 하나님이 금지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도록 유혹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의 목적은 하나님의 질서로 유지되는 세상을 무너뜨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 사단이 제공한 것은 '인간의 가치 향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하나님 같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가치 향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가치가 향상되어질 수 있다는 유혹에 넘어 감으로 인해서 선악과를 먹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드러난 인간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피조물된 자신의 몸의 가치가 향상되기를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인간이 꾀하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몸의 가치 향상이 아니겠습니까? 윤리와 도덕으로 살고자 하는 것이며, 인격을 수양하고 도를 닦고 그리고 돈을 벌고 출세하려고 하는 모든 것이 곧 자신의 몸의 가치가 향상되어지는 것에 목적을 둔 행동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곧 이 세상은 사탄이 세워 놓은 질서 아래 복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크게 실수하고 있는 것은 세상이 귀하게 생각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을 소유하면 자신의 가치가 향상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피조물의 가치는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피조물의 가치는 피조물 자체가 귀하게 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을 만드신 창조주의 의도와 목적 아래 살아갈 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살아간다는 것보다는 자신의 몸이 가치있는 존재가 되는 것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관심을 가진 채 교회로 모이고 있으며 하나님을 부르고 십자가를 말합니다. 이것을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 증거 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못견디는 것은 이 세상에서 별볼일 없는 존재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 어디를 가도 환영을 해주지 않고 무시만 받으며 살아가는 것, 말 한마디를 해도 들어 주지 않고 어려움에 처해도 누구하나 관심을 기울여 주지 않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 이러한 것에 못견뎌 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사람이 사랑을 받고자 하는 것도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가 아닌 가치있는 존재로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입니다. 돈을 벌고 싶은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닙니까? 사람들이 돈을 원하는 것은 돈이 있어야 자신의 존재 가치가 향상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돈이란 세상의 모든 것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 주는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돈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포기할 수 없고 떼어낼 수 없는 귀하고 소중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현실은 사탄에 의해서 타락한 기존의 세계가 사탄에 의해서 그대로 유지되어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가치 향상을 꾀하고 살아가는 세상에 전혀 자신에 대해 가치를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만 모든 가치를 두신 분이 오셨습니다. 결국 그 분이 메시아로 오셨다는 것은 세상이 어떤 죄악 가운데 있는지를 밝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을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느니라고 말씀하신 것도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증거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기존의 세상과는 전혀 반대된 가치관을 가진 나라가 등장함으로서 세상은 상반된 두 가치관이 서로 대결하는 전쟁의 현장이 된 것입니다.

이 전쟁을 가리켜서 '아마겟돈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16절에 보면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고 말합니다. 아마겟돈에 대해서는 지금껏 많은 사람들이 해온 설교와 강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마겟돈 전쟁을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으로 보기도 합니다. 강대국끼리의 싸움으로 인해서 세상이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교도 국가와 기독교 국가의 싸움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전천년주의자들은 이 전쟁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즉 아마겟돈 전쟁은 칠년 대환난 이후에 세상에서 일어날 전쟁이며 그때 하늘에서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있을 것이라고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아마겟돈 전쟁에 대한 여러 해석을 볼 때 한가지 공통점은 미래적인 사건으로 이해를 한다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고 있는 사건으로 이해를 하고 있다는 점이 해석의 잘못된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마겟돈 전쟁은 현재적인 사건입니다. 왜 아마겟돈 전쟁이 현재적인 사건인지를 본문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아십니까? 국가와 국가가 서로 다른 이념과 사상으로 대결하는 전쟁도 아니고, 서로 국토를 확장하기 위해서 대결하는 전쟁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서로 먼저 출세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제치고 앞서 나가기 위한 삶의 전쟁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전쟁, 그러면서도 눈에 보이는 전쟁, 이것이야말로 하늘에서부터 계속 있어 왔던 전쟁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 전쟁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전쟁이 어떤 전쟁인가를 바로 안다면, 신자가 싸워야 하는 것이 무엇이며, 신자를 하나님의 군사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사탄이 노리고 있는 것이 무엇이며, 세상이 어떤 현실에 있으며, 무엇이 의며 무엇이 악인지 제대로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고 말씀합니다. 여섯째 천사가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자 강물이 마르고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다고 말합니다.

수 1:4절에서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는 말씀을 보면 유브라데 강은 이스라엘에 약속된 땅의 지경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강이 마르므로 인해서 동방의 왕들이 올 수 있는 길이 예비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계 9:14-15절에서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 마병대의 수는 이만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고 말씀한 내용을 살펴봐야 합니다.

일곱 대접 재앙 앞에 등장한 것은 나팔 재앙입니다. 그 나팔 재앙에서 여섯째 천사에게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주라고 말합니다. 결박한 네천사란 하나님에게 도전한 악한 천사를 의미합니다. 이들이 놓이자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합니다. 그리고 전쟁을 하기 위해서 마병대 이만만을 끌어 모읍니다.

이것을 볼 때 유브라데 강은 전쟁을 예비한 악한 천사가 놓임을 받은 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강이 마르고 동방에서 왕들이 올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에 의해서 악한 천사가 벌이고자 하는 전쟁이 허락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전쟁은 동방의 왕 즉 이방인과 약속의 자손 즉 이스라엘과의 싸움입니다.

강을 마르게 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강이 마름으로 인해서 악한 세력이 이스라엘, 즉 교회를 공격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이기 때문에 악한 세력과 교회와의 전쟁은 하나님에 의해서 허락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 전쟁을 허락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은 이 전쟁을 통해서 세상의 악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무엇이 생명이며, 무엇이 진심으로 가치있는 것이고 소중한 것인가를 전쟁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 군사로 부름 받은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 즉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군사로 택한 자를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으로 택한 자를 부르십니까?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세상에 십자가를 남겨 두심으로 인해서 누구든지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알아보는 자를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알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택함 받은 자만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택하신 자기 백성이 그리스도의 피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나 십자가를 말하고 그리스도의 피를 말하면 되는 것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무슨 말을 못합니까? 말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가치 향상을 위해서 살아가는 타락한 세상의 사고방식에 순응하지 않게 되는 것이 십자가를 진심으로 발견한 신자에게서만 보여질 수 있는 현상인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이 가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가치함을 발견하고 대신 그리스도의 피가 참으로 가치 있고 소중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입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하고 가치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만으로 가치있는 인생이 되었음을 고백하는 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 것이 없다고 해도 그리스도가 계신다면 그것으로 족한 줄 아는 자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군사입니다.

그렇다면 사탄은 무엇으로 자신의 군사를 모집합니까? 사탄이 자신의 세력을 모으는 방법은 에덴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인간의 가치 향상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13-14절에 보면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고 말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유브라데 강에 놓인 결박당한 천사들이 전쟁을 예비했는데 그 마병대의 수가 이만만이라고 합니다. 이만만이란 이만 곱하기 만, 즉 2억을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 마병대의 수가 2억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엄청난 숫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탄이 전쟁을 위해서 이런 엄청난 수의 자기군사를 모집한다는 것입니다.

모집하는 방법은 귀신의 영으로 하여금 이적을 행하게 합니다. 계 13:13-14절에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사탄은 세상에서 큰 이적을 행함으로서 땅에 거하는 사람들을 미혹하고 이적을 행하는 자에게 경배하도록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탄이 자기의 세력을 모으는 방법입니다. 이적을 보여주고 신기한 일을 보여주고 힘을 보여줌으로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자신에게 경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행한 이적은 눈에 보이는 이적입니다. 사람들이 이적에 미혹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약 이적을 행한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자신의 가치가 향상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 보게 될 것이고 자신을 높이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적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행하신 이적, 그 무엇으로도 천국갈 수 없는 자를 천국가게 하신 하나님의 기적보다는 눈에 보이는 신기한 일에 더 매료되어 있는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것이 곧 사탄의 군사로 모집되어 있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13절에서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이들을 가리켜서 귀신의 영이라고 말합니다. 12장에 보면 용은 사탄을 말합니다. 그리고 짐승은 사탄에게 권세를 받아서 세상을 미혹하는 존재이고 거짓 선지자는 사람들을 짐승에게 경배하도록 가르치는 자입니다.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준 이유는 무엇입니까? 13:4절에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는 말씀을 보면 용과 짐승에게 경배하도록 하기 위해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세상이 용과 짐승에게 경배를 합니까? 그것은 용과 짐승이 세상에 주는 것은 자신의 가치 향상이기 때문입니다. 힘을 약속하고 힘을 제공함으로 인해서 가치있는 자 되게 해주겠다는 것이 사탄의 말이기에 사탄에게 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짓 선지자가 하는 말은 뻔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복받고 잘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여러분의 삶의 가치가 향상된다는 가르침을 하는 것이 귀신의 영이 들린 거짓 선지자가 가르치는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교회가 하나님을 말하고 믿음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면서 그 결과가 인간의 가치 향상으로 주어진다고 말한다면 그는 사탄의 도구로 쓰여지고 있을 뿐임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으면 복받고 잘산다든지 십일조를 하면 하나님이 만배나 복을 주신다든지 봉사를 하고 충성을 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갚아주신다는 말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은 절대로 교회라고 말할 수 없고, 목사라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귀신의 영이 들린 목사가 전하는 설교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탄의 말일 수밖에 없음을 잊으면 안됩니다.

귀신의 영은 힘을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힘을 중심으로 해서 모이게 합니다. 힘을 믿게 하고 힘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도록 합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사탄이 마병대, 즉 자신의 군사를 모으는 방법입니다. 에덴에서 인간을 미혹했던 그 방법이 지금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힘으로 사는 자와 믿음으로 사는 자의 전쟁터입니다. 이것이 아마겟돈입니다. 그래서 아마겟돈 전쟁은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현재에 계속되고 있는 전쟁인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사탄의 세력은 오직 힘을 무기로 내세웁니다. 가치의 경쟁을 합니다. 누가 더 세상에서 쓸모 있고 가치있는 사람인지 싸웁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신자는 힘에 대해서 힘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군사로서의 바른 모습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군사로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15절에 보면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도적같이 오신다는 것은 오실 날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예수님이 오실 날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실 것을 기다리는 신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것을 15절에서는 벌거벗고 다니지 않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신자가 복이 있습니다.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과연 신자의 옷은 무엇입니까? 신자의 옷은 그리스도입니다(롬 13:14, 갈 3:27). 이것은 실제로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옷이란 부끄러움을 가려주는 일을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옷입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의 부끄러움이 가려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옷을 벗어버린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를 벗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말고 다른 것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힘있는 자가 가치있는 자로 우대 받고 존경받는 세상에서 힘이 없고 가치 없는 자로 무시 받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의 사고방식이며 세상의 질서입니다. 만약 이 질서에 따라간다면 그 사람은 결국 힘이 없다는 것을 자신의 부끄러움으로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허름한 집에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자식이 공부도 모하고 말썽만 피우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어려운 환경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바로 세상의 질서를 따라가는 것이고 신자로서는 그리스도를 벗어버린 결과입니다.

그리스도로 옷입은 신자는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피의 소중함을 제대로 증거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 할 뿐입니다. 이들이 아마겟돈 전쟁에 참여된 하나님의 군사입니다.

세상은 아마겟돈입니다. 날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린 과연 이 전쟁에서 하나님의 군사로 참여되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에 대해서 정직하게 돌아봅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귀한 분으로 여기고 산다면 그 증거는 무엇을 부끄러워 하는 가로 드러날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옷 입어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고 하지 마시고, 세상의 것이 없다고 해서 부끄러워하지도 마십시오. 진심으로 여러분의 삶에 그리스도가 귀하다면 여러분은 오직 그리스도로 힘있고 기뻐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귀신의 영이 세상을 무엇으로 미혹하는 가를 잘 기억하시고 도적같이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군사로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귀하고 가치이고 힘이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