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6:17-21 심판과 그리스도

요한복음 6:26-27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에겐 누구나 배부르게 살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단지 양식으로 인한 배부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것 모든 것에 대해서 배부름을 원하는 것입니다. 즉 어느 것에 대해서도 부족함이 없는 풍족한 삶, 이것이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절약하면서 없는 자들을 돕고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배부름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물론 세상의 윤리와 도덕의 시각에서 판단한다면 그들은 분명 자신의 배부름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시각에서는 다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남을 돕고 봉사하는 것에서 자신의 배부름을 찾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는 남을 돕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이 가지는 배부름의 또 다른 면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뿐입니다. 남을 돕는 삶에서의 만족, 이것이 바로 배부름인 것입니다. 남을 돕는 것으로 배부른 사람이기 때문에 비록 자신은 절약을 해야 하고 돕기 위해서 하고 싶은 것을 못한다고 해도 불만이나 불평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엄청난 이적을 행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가 부른 까닭이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은 신자가 예수님을 찾는 까닭이 무엇이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가 부르기 때문에 찾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러면 표적을 본 까닭에 예수님을 찾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오병이어는 예수님이 곧 생명의 떡임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표적이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표적이란 무엇을 증거하고 드러내기 위해서 나타난 사건을 의미합니다. 즉 오병이어의 사건은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의 떡이며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임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적은 반복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한번 표적이 나타났으면 믿으면 되는 것이지 반복해서 나타나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찾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곧 생명의 떡임을 믿는 믿음으로 찾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기한 이적 때문에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배부름이지 예수님이 주신 떡이 배부름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떡을 먹고 배부른 이유로 예수님을 찾는다면 이들은 언제나 배부른 것에만 관심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배부를 때는 감사하고 주님의 은혜라고 하지만, 배고플 땐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 예수님을 찾게 하려면 배부르게 할 떡을 제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중국에 대한 선교를 많이 하고 있지만, 크게 실수하는 것은 배부르게 할 떡을 제공함으로서 예수를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임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떡을 주고 배를 부르게 하는 분으로 가르쳐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중국인들은 배를 부르게 하는 떡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찾게 됩니다. 예수에게 가면 떡을 준다는 것입니다.

중국 선교를 하는 어떤 목사님이 말씀을 하시기를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가 중국에 교회를 세웠는데 자신이 가면 교인들이 모이고 안가면 모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현상입니까? 한국의 교회로부터 많은 떡을 제공받았기에 그 떡으로 인해서 그 교회 목사가 오면 모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가 가면 모일 이유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모이지를 않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를 맡아서 담임하는 선교사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을 하지만, 선교사가 있어야 예수님을 찾을 수 있고 선교사가 있어야 교회가 되어진다는 것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선교사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가슴속에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떡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떡을 주는 분이 아니라 자신을 통째로 내어 주신 분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떡을 먹고 배부른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해서 배부른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배부르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습니까? '안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령 아이가 1등을 했다고 할 때 '안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을 합니다. 1등이라는 좋은 일, 기쁜 일이 자신을 만족케 했기 때문입니다. 즉 '안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은 실제 배가 부르다는 것이 아니라 만족의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결국 그리스도로 인해서 배부르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으면 밥을 안먹어도 배가 부르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한 만족의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보여주는 표적도 예수님이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 주실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표적을 본 사람이라면 그 표적으로 인해서 그리스도를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슨 까닭으로 그리스도를 찾습니까? 표적을 본 까닭입니까 아니면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입니까? 마태복음 7:21절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린 이 말씀을 참으로 심각하고 긴장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말씀을 대하면서 심각함과 긴장됨이 없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자신의 믿음을 믿기 때문이고 자신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이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나는 주여주여 하는 자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여러분은 주여주여 하는 자가 아닙니까? 아니라면 무엇으로 그렇게 자신할 수 있습니까?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기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행하는 아버지의 뜻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따져 묻는 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기어코 부정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믿지 마시고 '나는 믿음이 없는 자다'는 인식 아래 우리의 믿음을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아버지의 뜻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40절에 보면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우리를 향하신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가 보내신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믿는다는 것은 나를 배부르게 하는 것은 아들이지 세상의 떡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즉 아들로 인해서 배부름을 얻는 자가 아들을 믿는 자입니다. 그러나 세상 것으로 배부름을 얻으려고 한다면 그는 주여주여 하는 자일뿐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배부른 자는 세상 것에서 배고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배부름을 얻지 못한 자는 항상 배부름을 추구하게 되고 배고픔을 세상 것으로 채우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을 마셔도 다시 목마름이 오는 것처럼 아무리 세상 것으로 목을 축이고 배를 불린다고 해도 또 다시 배고픔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충족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욕심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으면 배부르고 돈이 없으면 배고픔을 느끼는 삶이라면 분명 그리스도로 배부른 신자의 삶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로 배부른 신자의 삶이라면 돈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배부른 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고, 그러한 신자라면 세상 것에 대해서도 아까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때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심중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역사적 사건을 순서적으로 나열한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은 요한계시록 11:15절부터 기록되어 있는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부는 재앙이 더욱 구체화 되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곱째 나팔 재앙에서는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리고 성전이 열리는데 성전 안에 언약궤와 번개와 음성과 뇌성과 지진 그리고 큰 우박이 있더라고 말합니다. 본문이 일곱째 나팔 재앙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일곱째 나팔에서 성전 안에 있던 번개, 음성, 뇌성, 지진, 큰 우박이 일곱 대접을 통해서 모두 세상에 쏟아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전 안에 번개, 음성, 뇌성, 지진, 큰 우박이 세상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는 것임이 본문을 통해서 확실하게 증거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실 때 우리는 어떤 입장에 서 있어야 합니까?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세상에 불을 내려서 하나도 남긴 없이 다 없애버린다고 할 때 그것을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이라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이 신자로서 당연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는 세상에는 평소 사람들이 아끼고 좋아하고 귀하게 여겼던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질 때 '아깝다'라고 한다면 과연 신자로서 바른 태도이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에 대해서 '기분 좋다'라고 할 수 있는 신자라면 지금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그러한 믿음의 흔적이 보여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흔적이란 세상 것보다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더 목말라 하고 배고파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신자들이 진심으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고백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5:6절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을 하는 것처럼 의로 인해서 배부름을 얻은 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 권력보다 더 시시하게 보입니다. 교인들조차도 교회를 세상 권력보다 더 시시한 것으로 보고 교회를 찾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교회에서 무엇을 구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그리스도가 아닌 세상 권력을 구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시시하게 보이기 때문이고 교회를 무시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교회가 그리스도의 피를 소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요즘 인기 있는 노자와 21세기를 강의한 김용옥 교수가 교회와 교인을 시시하게 보는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그는 철저하게 교회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는 교회가 십자가로 목말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과 똑같이 세상 것으로 목말라 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어도 당당할 수 있는 것이 교회인데 교회가 돈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에 목말라 하지 않는 것, 이것이 교회가 시시하게 보이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교회가 시시합니까? 세상이 그토록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이고 소중한 것입니까? 17절에 보면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 하니"라고 말씀을 합니다. 앞에서 말한대로 일곱째 나팔 재앙에서 성전안에 음성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결국 그 음성은 '되었다'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되었다'는 말은 다 끝났다는 뜻입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는 말을 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일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악함을 드러내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일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완벽하게 완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일은 악한 세상에 대한 심판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되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되었다'는 말은 성전의 보좌에서 외치는 음성입니다. 보좌란 왕의 자리입니다. 다스리는 분의 자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사는 무리들이 누구입니까?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의 보좌에서 외치는 '되었다'는 이 말을 오늘날 세상을 향해서 누가 외쳐야 합니까? 바로 교회가 그 말을 외쳐야 할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되었다'는 말을 외칠 수 있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세상을 망함의 장소로 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되었다'는 말을 외치며 사는 교회라면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에 목말라하고 주리면서 주님의 그 나라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남은 것이 심판이 전부라면 유일한 희망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생명으로서 자기 백성을 심판에서 건지는 능력이시기 때문입니다.

18절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고 말씀합니다. 번개와 음성과 뇌성과 함께 큰 지진이 있습니다. 얼마나 큰 지진인지 사람이 땅에 존재하게 된 때부터 볼 수 없었던 지진이라고 말합니다. 20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각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 없이 사라져 버릴 만큼 큰 지진입니다. 또 21절에 보면 "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고 말씀합니다. 중수, 즉 무게가 한 달란트 되는 우박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는 약 34킬로그램의 무게라고 합니다. 34킬로그램 무게의 우박이라면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 우박에 남아 있을 것이 있겠습니까?

이 말씀에 대해서 진짜 그런 지진과 우박이 있느냐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기보다는 그런 지진과 우박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정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엄청난 지진과 우박을 동원하신 하나님의 심정은 세상을 남겨 놓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세상에 대한 진노를 가지고 일하시는데, 오늘날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는 우리들은 과연 세상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19절에 보면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라고 말씀합니다.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큰 성 바벨론의 악을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맹렬한 진노의 잔을 바벨론에 부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벨론'이란 지역이나 국가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특정 국가나 지역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진노하셨고 그들도 망하게 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특정 나라를 위한다거나 특정 지역을 위하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삶의 정신입니다. 삶의 정신에 대해서 진노하시기도 하시고 기뻐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을 큰 성 바벨론으로 표현하는 것은, 힘과 권력의 의미입니다. 큰 성 바벨론이라는 것은 강하다는 뜻입니다. 부강하고 힘이 있는 바벨론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부강하게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과 재주로 인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강하게 된 영광을 자신들에게 돌려버립니다. 이것이 악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악에 대해서 진노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받을 자는 누구입니까? 자신의 힘을 믿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세상 것을 통해서 힘을 얻고 그 힘을 믿으며 살아갑니다. '힘만 있다면 하나님은 없어도 좋다'는 사고방식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삶의 정신을 하나님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본문이 말해주는 것입니다.

세상이 믿음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고 무시해 버리는 이유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남은 일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땅의 것으로 배부르고자 하는 멸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믿음을 우습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세상에 힘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땅의 것보다 믿음을 더욱 소중히 여깁니까? 돈을 한푼 더 버는 것보다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소원하고, 세상 것을 사랑하기보다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고 있습니까? 만약 이런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다면 그 믿음은 여러분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믿음을 소유한 자가 아니라 믿음으로 인해 다스림 받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믿음을 소유한 자는 항상 자신을 위한 믿음으로 여깁니다. 즉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 믿음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에 다스림을 받는 자는 믿음이 원하는 쪽으로 가게 되어집니다. 믿음이란 자신의 존재는 부인되고 오직 그리스도만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다스리는 믿음이 땅에 대한 욕망을 이루는 쪽으로 우리를 인도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세상에 대해서 회개하라고 외쳤던 것처럼, 믿음으로 사는 신자 역시 세상에 대해서 회개하라는 외침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굳이 회개하라는 말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가 가신 십자가의 길을 소중한 것으로 여기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회개입니다.

세상을 제대로 보고 살아갑시다. 하나님의 일 속에 감추어진 세상의 실체가 어떠한지 제대로 보고 살아갑시다. 세상의 망함을 보지 못한다면 우린 결국 세상의 것에 희망을 두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신자라고 하는 우리들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피가 무시되고 부인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결과는 심판입니다. 이 심판에서 우리를 건지는 능력은 그리스도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로 배부름을 얻기 바랍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면서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생명이고 영원한 양식이고 생수임이 신자인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증거 되어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