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7:1-5 큰 음녀

문명이 발달해 가면서 사람의 가치가 문명을 누리는 정도에 의해 결정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문명을 누리는 것을 과시하고 많은 문명을 누리는 자가 적게 누리는 자를 무시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국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문명이 발달한 나라가 강대국이고 발달하지 못한 나라는 후진국이라는 이름으로 소위 강대국으로부터 무시를 받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문명이란 단지 사람을 편하게 하고 즐겁게 하는 기능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힘을 실어주는 기능의 문명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명을 누리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단지 편하기 위해서, 즐거운 삶을 위해서라고 생각하십니까? 문명을 누리는 이유가 이것이라면 문명을 누리고 못누리고의 차이는 단지 편안하게 사는 것과 좀 더 몸을 움직이고 육신의 수고를 하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즉 문명을 누림과 누리지 못함이 인간의 가치를 구분하는 것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를 보면 문명은 분명 사람의 가치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문명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어야 하고, 힘이 있어야 하고, 권세가 있어야 합니다. 문명이란 이들의 전유물로 세상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문명을 누리는 자는 누리지 못한 사람보다 약자의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굳이 자신의 편함과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문명을 소유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100평짜리 아파트에 거주하는 친구를 방문했다고 할 때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혹 100평이라는 어마어마한 힘 앞에 자신의 존재가 초라하게 보이고 기가 죽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100평이라는 문명을 누리는 그 친구가 새삼 대단하게 보이고 부럽게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돈 없는 자신의 신세에 대해서 불평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문명을 자기 과신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증거입니다. 돈이 없어서 그렇게 살지 못할 뿐이지 우리 역시 돈만 있다면 많은 문명을 누리면서 자기 과시를 할 사람들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문명은 본래의 기능만으로 인간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인간들에게 환영을 받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문명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문명이 안고 있는 이러한 문제는 꼭 현시대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가령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은 가나안의 사람들을 모두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지파는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가나안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이용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사사기 설교를 하면서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오랜 세월동안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때문에 문명이 발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사람들은 대대로 가나안 땅에 살면서 문명을 발달시켜온 민족들입니다. 철문화가 발달함으로 인해서 병기 또한 철병거라는, 이스라엘이 보기에는 참으로 대단한 문명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들의 문명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 위해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고 남겨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신기하고 놀라운 문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즉 말씀보다는 문명을 더 원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이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과 그대로 일치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삶은 말씀 때문에 문명을 포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문명을 포기한다는 것이 원시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문명을 얻기 위해서 말씀조차 멀리 해버린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사는 것보다는 문명을 누리고 사는 것을 더 가치있는 삶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애타하지 않으면서 남들처럼 많은 문명을 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애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인간이 문명을 추구하고 문명에 갈급해하고 살아가는데에는 숨은 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신자는 이 사실에 대해서 바로 직시해야 합니다. 문명이 사단이라는 것도 아니고 신자이기 때문에 문명을 누리면 안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형편이 된다면 얼마든지 편한 문명을 누리고 살아가십시오. 문명을 고의로 거부한다고 해서 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란 문명을 거부하는 자가 아니라 사단의 사고방식을 거부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단은 문명을 제공함으로서 세상을 자신의 질서에 가두어 두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문명을 포기할 수 없도록 만들고 문명을 누리기 위해서 살아가도록 만듭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즉 신자는 구할 것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항상 하나님이 누리게 하신 것만 누린다는 생각이 사라지면 안됩니다. 즉 지금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최상의 것임을 알고 타인의 것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사탄이 세상을 다스리는 질서가 아닌 하나님이 다스리는 질서에 순종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인간이 끊임없이 문명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삶의 가치를 향상시키고자 하는 것이 곧 사탄의 질서에 순종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1절에 보면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합니다.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중 하나가 요한에게 큰 음녀가 받을 심판에 대해서 환상을 보여줍니다. 천사가 보여준 음녀가 세상에 미친 영향은 참으로 큽니다. 2절에서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 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란 말씀대로 세상의 임금들, 즉 권세 잡은 왕들이 음녀와 더불어 음행 하였고 땅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도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고 합니다. 즉 음녀와 함께 하고 음녀를 좋아하고 어울린다는 것입니다.

천사가 요한에게 보여준 화상은 세상의 실체였습니다. 즉 세상은 지금 음녀와 더불어 음행하고 음녀의 포도주에 취해 있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 한 예가 문명을 포기하지 못하고 문명에 취해 살아가는 모습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천국에 대해서만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어떤 형편에 처해 있고, 왜 하나님이 세상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현존하는 세상에 대해서 심판을 행하실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서 낱낱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아닌 사탄을 따르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대해서 진노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과 사탄이 다른 점은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된 인간에게 대해서 철저하게 창조주의 입장에서 일하십니다. 즉 창조주는 피조된 존재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피조된 존재가 창조주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원칙입니다. 이러한 원칙에서 벗어난 것을 '타락'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항상 인간에게 자기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인간에게는 불만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다릅니다. 사탄에 대해서 인간은 피조물대 피조물입니다. 사탄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주처럼 사탄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광을 위해서 사탄이 도움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도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과의 전쟁의 군사로 불려 나온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질서에 순종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며 군사로 불려나온 신자에게 있을 수밖에 없는 삶입니다.

3절에 보면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성령으로 요한을 데리고 광야로 갑니다. 요한은 거기서 붉은 빛 짐승을 타고 있는 음녀를 목격합니다.

성령으로 요한을 데리고 광야로 갔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려서 광야로 가서 사단의 시험을 받으신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사단으로부터 생존을 위한 떡과, 세상 영광과 권능에 대한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요한을 광야로 데려 갔다는 것은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이 예수님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어지고 있는 시험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시험은 사단이 세상을 무엇으로 시험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지 예수님이기 때문에 홀로 받으신 시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오늘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계속되고 있는 시험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시험한 것은 그냥 사단이라고만 되어 있지 그 사단이란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정체가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폭로되는 것입니다. 3절에서 등장하는 사단은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타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짐승의 몸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다고 합니다. 또 4절에 보면 여자는 화려한 옷과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5절에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고 말합니다.

3절에 등장하는 짐승은 13:1절에 등장하는 짐승과 동일합니다. 그 짐승의 머리는 일곱이고 뿔이 열 개입니다. 그리고 참람된 이름이 가득합니다. 참람된 이름이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을 의미합니다. 머리가 일곱 뿔이 열이라는 것은 그만큼 세상의 영광을 가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세상의 영광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무시하고 배척하고 모독하는 것이 짐승인 것입니다. 그 짐승을 음녀가 타고 있다고 합니다. 결국 음녀가 세상을 무엇에 취하게 하는가를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세상의 왕들과 땅에 거하는 사람들이 음녀의 포도주에 취하였다는 것은 결국 음녀가 세상을 미혹하는 세상영광에 취하였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현대 사회가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자기 영광에 취해서 살아가지 않습니까? 앞에서 말한 대로 문명을 누리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세상의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서 경쟁하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바로 예수님을 시험하던 사단이 계속해서 땅을 미혹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음녀가 화려한 옷과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화려한 옷과 보석은 사치를 의미합니다. 결국 세상에 거하는 사람들이 사치하고 싶어하고 좋은 옷에 비싼 보석으로 자신을 치장함으로서 과시하고자 하는 것도 역시 음녀에 취해 살아가는 현실을 보여준 것입니다.

결국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볼 때, 이 세상의 모든 모습들은 사단의 시험에 빠져서 사단의 질서와 원칙에 순종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방법과 사고방식에서 이 세상은 결코 하나님이 세우신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라 이미 사탄에 의해서 타락된 나라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들에게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남들처럼 좋은 옷에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좋은 집에서 마음껏 문명을 누리고 싶은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저는 그러한 인간의 본래적인 성품을 책할 의도는 없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릴 것은, 바로 그러한 성품이라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본래 인간의 마음이 아니라 사탄의 시험에 빠진 타락한 인간의 마음인 것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마음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며 기뻐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더 높은 것을 바라거나 기대하지 않고 지금 자신의 눈에 보여진 것들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최상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이 행복이 사탄으로 인해서 깨어진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오직 하나님에게 순종함으로서 보장되어짐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에 감사하지 못할 때 행복은 이미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이 안되고 힘든 상황이라 할지라도 곰곰이 세상의 실체와 마지막 운명과 그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에 대해서 묵상해 보십시오. 땅의 것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것이 그렇게 큰 섭섭함으로 남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치하고자 하고 더 많은 문명을 누리고자 하는 것은 음녀의 포도주에 취해 있는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5절에서는 음녀의 정체를 '큰 바벨론'이라고 말합니다. 큰 바벨론이라는 것은 바벨론이라는 특정 국가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있는 강대국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당시 상황으로서는 로마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지금에는 어느 특정 나라가 아니라 세상 모든 국가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국가는 강대국에 되는 것에 취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오직 경제 발전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고, 강대국으로 번성하는 것에 모든 목표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음녀가 짐승을 탔다는 말의 의미는 큰 바벨론의 속성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세상이 바로 지금 바벨론의 속성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음녀와 행음하는 것이고 음녀에 취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겔 23:43-44절에 보면 "내가 음행으로 쇠한 여인을 가리켜 말하노라 그가 그래도 그들과 피차 행음하는도다 그들이 그에게 나아오기를 기생에게 나아옴같이 음란한 여인 오홀라와 오홀리바에게 나아왔은즉"라고 말합니다. 행음이라는 것은 악한 속성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현실이었습니다. 음행한 여인과 행음한 것입니다. 음행한 여인과 행음 하였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음행한 여인의 속성을 따라간 것을 의미합니다. 음행한 여인, 즉 음녀란 본래의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따라간 여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행음은 본래의 남편, 즉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나라의 속성을 따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음녀가 타고 있는 짐승의 배후에는 용이 있습니다. 즉 용이 화려함과 풍부한 재물로서 세상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용의 미혹을 따라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피의 은혜를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보다는 이방나라의 화려함과 풍부한 재물과 번성한 문명에 마음이 이끌려서 이방인의 속성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행음이었습니다. 음녀의 포도주에 취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이스라엘에 비해서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가 하나님을 따라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수시로 말하지만 과연 십자가의 은혜를 마음에 두고 오직 그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하다는 고백으로 살아갑니까?

사실 오늘날 교회나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돈에 매어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물론 저 자신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점은 그러한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돈과 연관지어 섬기려고 합니다. 세상의 풍부한 재물과 화려함을 소유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처럼 본래의 신랑을 보리고 다른 남자를 따라가는 음녀의 모습이고, 음행하는 이스라엘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눅 12:1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생명은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피에 있는 것이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생명을 원하신다면 그리스도만 따르면 됩니다. 그러나 생존을 원하게 될 때 우리는 세상의 화려함과 풍부한 재물에 마음을 뺏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화려함과 재물에 취해서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버리고 세상을 좇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지금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음행하는 것이고 음녀에 취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무엇에 취해 살아가고 있는지, 혹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버리고 음행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삶의 모습을 말씀 앞에 비춰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