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7:6-8 기이히 여기지 말라

여러분은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여기십니까? 아마 많은 분들의 경우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저 별 볼일 없는 존재이고 내놓을 것도 큰소리 칠 것도 없는 존재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에 대해서 그러한 평가를 내리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인간에 대해서 평가하는 대로 악하고 죄인이며 쓸모 없는 벌레와 같은 인생이기에 그와 같은 평가를 내리시는 것입니까? 혹 아니면 세상에서 가진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기에 자신을 별볼일 없다고 여기시는 것입니까? 전자의 경우라면 문제될 것이 없지만,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그것은 믿음에 큰 문제가 있음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 인간에 대해서 대단하다는 평가를 내릴 때는 분명히 세상의 조건을 기준으로 합니다. 돈을 많이 벌었다거나, 높은 권력을 가졌다거나, 아니면 보통 사람들이 행하기 쉽지 않은 착한 일을 한다거나, 이러한 것들이 기준이 되어서 대단하다는 평가를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으로부터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고 싶어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높임 받고 싶어하며 남들이 굽실거리고 받들어 주는 사람으로 존재하고자 합니다.

남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때 섭섭해하고, 무시를 받을 때 분노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시 받지 않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가치있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눈치를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신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힘든 문제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산다는 것, 세상의 평가에 마음 두지 않는다는 것, 세상에서 대단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 포기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평가와 가치에 대해 관심을 두고 살아간다면 그 증거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납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로 인한 가치와 평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신자로서 하나님 나라를 더욱 소중히 여기고 그 나라를 세상나라보다 더 크고 귀한 나라로 여긴다면 분명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가되는 가치에 더욱 마음을 두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평가를 하든 마음에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평가되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 인정된다는 것에 대해 더욱 깊은 가치를 둘 것이 틀림없습니다. 신자란 세상 나라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신자답지 못한 것은 세상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대해 관심을 벗어버리지 못합니다. 세상으로부터 괜찮은 평가를 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고전 6:2절에 보면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라고 말씀을 합니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지 세상이 성도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항상 세상의 판단과 평가에 대해서 노심초사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조차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 성도임을 깨닫지 못한 결과입니다. 이로 인해서 나약한 신자로 전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신자란 믿는 자입니다. 믿음이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믿음에 대해서 평가하기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엡 2:8절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한대로 믿음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정작 믿는다는 자들에게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 여김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의 선물을 아무나 받을 수 있습니까? 특정된 사람들만이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누구나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라면 귀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대통령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 믿음이라면 믿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대단한 존재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믿노라고 하면서 여전히 세상의 평가와 판단에 관심을 두는 것을 무슨 이유입니까?

세상은 신자란 이름에 대해서 하찮게 여깁니다. 신자란 이름이 힘이 되는 것이 아니고 권력도 아니며 세상에서의 영광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의 풍조에 신자가 함께 해버립니다. 세상과 함께 신자도 신자라는 이름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신자라는 이름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며 은총임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라는 대단한 이름으로 살아가면서 세상에 굴복하고 세상에 어울려서 세상의 눈치를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스스로 무시하고는 것이고, 오직 믿음으로만 들어가는 천국에 대해서도 세상보다 값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음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이스라엘이 음행을 한 것에 대해서 언급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음행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풍요로움과 화려함에 이끌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의 정신에 함께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란 존재의 귀함에 대해서 잊어버린 결과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죽음 속에서 특별히 살아난 존재입니다. 홍해라고 하는 엄청난 사건 속에서 애굽 군사가 모두 몰살당하는 죽음의 현장에서도 살아난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이방인의 화려함과 풍요로움을 목격을 하면서 점차 하나님의 은혜 아래 거하는 가치보다는 세상의 풍요와 화려함에 더 가치를 둬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삶을 따라간 것을 음행이라고 책망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가 이스라엘처럼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생명을 얻은 것에 대한 가치보다는 세상에 거하는 자들의 화려함과 사치와 풍요로움에 더 가치를 두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음행이고 음녀에 취해 사는 것임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6절에 보면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라고 말합니다. 음녀의 적은 성도들과 예수의 증인들입니다. 성도들과 예수의 증인을 구분해서 말하는 것은 성도와 예수의 증인이 각기 다른 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도란 곧 예수를 증거 하는 증인의 삶을 사는 자임을 말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음녀가 성도들의 피에 취한지라고 말합니다. 즉 음녀가 성도들을 죽인 것입니다.

음녀와 성도는 결코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음녀는 세상에 대해서 화려함과 온갖 사치와 물질의 풍요로움을 제공합니다. 세상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취해서 돈과 화려함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예수의 증인으로 존재하는 성도는 돈과 화려함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세상을 사셨던 것처럼 말씀으로 삽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음녀는 예수의 증인을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오직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성도를 거부하는 이유가 바로 음녀에 미혹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를 향해서 물질의 풍요함과 화려함을 쫓아가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좇을 것을 외칠 때 음녀에 취해 사는 교회는 그 외침에 대해서 거부합니다. 물질 역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는 명목 아래 끊임없이 물질의 풍요와 화려함을 추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음행한 이스라엘이며 음녀의 포도주에 취한 자로 살아가는 사단의 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질의 풍요란 우리가 추구하고 목표해야 할 사항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은 단지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도 하나님의 일을 위한 도구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많은 물질을 어떤 사람에게는 그보다 적은 물질을 맡길 수가 있습니다. 각기 주어진 역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다른 역할 속에서도 서로 비교하지 않고 서로 나누고 통용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에서만 가능한 모습입니다. 주어진 역할만을 생각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한몸된 지체의 관계입니다. 이러한 정신을 세상은 철저히 거부합니다. 세상은 자신의 소유에 대해서 철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조차도 소유에 대해서 철저합니다. 심지어는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까지도 소유화 해버립니다. 그래서 자기 교인이 타교회로 가는 것을 거부하고, 내 교회 가까이 누군가가 교회를 세울 때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면서까지 방해를 하려고 합니다. 자기 소유를 철저히 지키려고 하는 바벨론의 속성인 것입니다. 자기 소유를 위해서 싸우지 않으면 국가는 부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음녀의 속성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바벨론의 사고방식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눈이 뜨여야 합니다. 그래서 행여 나 자신이, 또는 교회가 음녀의 속성을 따라가고 바벨론의 사고방식을 따라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항상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음녀와 예수의 증인은 서로 어울리는 관계가 아니라 전쟁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음녀에 의해서 성도는 죽임을 당하고 고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의 삶이 화려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이 놀고 먹으면서 손쉽게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힘쓰고 애써야 할 부분이며 신자의 삶에 있어서 최대의 과제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힘쓰고 애쓰는 부분이 우리의 소유를 만드는 것에 있다면 우리는 음녀와 전쟁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함께 어울리고 음녀에 취해 살아가는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요한이 본 환상은 여자에 의해서 예수의 증인이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즉 여자가 승리자인 것입니다. 요한이 그 여자를 보고 크게 기이히 여깁니다. 기이히 여겼다는 것은 대단하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천사가 요한에게 "천사가 가로되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 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7-8절)고 합니다.

천사는 음녀가 타고 있는 짐승에 대해서 비밀을 말합니다. 13장에 보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등장합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용으로부터 권세와 보좌와 능력을 부여받았습니다. 세상을 권세와 영광과 힘으로 미혹을 하는 존재입니다. 바벨론 같은 국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국가는 능력과 권세로 세상을 다스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인간의 재주와 능력을 철저히 이용하는 것이 국가입니다.

그런데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경배하라고 합니다. 즉 세상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짓 선지자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세상을 인정합니다. 세상의 풍요로움 역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외치면서 풍요롭고 화려하고 힘있는 세상에 대해서 찬양하고 노래합니다. 힘을 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지만 그 배후에는 용이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 현실은 배후에 있는 용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배후 세력에 대해서 전혀 눈치 채지 못합니다. 오히려 용을 하나님으로 가르칩니다. 참된 하나님의 이름이 훼방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짐승의 머리에 참람된 이름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배후에 용, 즉 사단이 있고 그 사단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있는 세상이지만 사단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현실을 8절에서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짐승이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다면, 지금 현실에 짐승은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우리가 이해하는 역사적인 시간의 의미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만약 역사적 시간적인 의미로 이해하려면 '전에 없었다가 시방은 있으며 장차 멸망당할 자다'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에 있었으나 시방은 없으며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전에 있었던 짐승은 분명 지금도 존재합니다. 권세와 힘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방 없다는 것은 세상이 짐승의 실체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있으나 그 존재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 것을 시방은 없다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짐승의 실체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짐승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아버립니다. 그리고 거짓선지자는 짐승을 경배하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힘이 곧 축복이며 권세가 곧 은혜임을 외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짐승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힘이 축복이며 권세가 은혜임을 아는 사람들은 힘이 있고 권세 있는 자를 부러워 할 것입니다. 분명 짐승은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서 멸망에 처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다는 것은 장차 그 정체를 드러낸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짐승은 멸망당할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짐승을 부러워하고 경배한다면 그것은 곧 짐승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요한에게 짐승을 기이하게 여기는 자는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라고 말합니다. 생명책에 그 이름이 녹명되지 못한 자는 참된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십자가에 죽은 예수로만 알 뿐, 예수님의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삶을 마음에 둔다면 세상이 추구하는 것이 그리스도가 가신 길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가 외치는 말 역시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복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것입니다.

때문에 생명책이 이름이 녹명되지 못한 자들은 권세 있고 능력이 있는 짐승을 대단하게 여기고 경배하지만 생명책에 녹명된 자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알게 된 자들이기에 짐승의 정체를 이미 파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성도들은 결코 힘이나 권세를 대단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직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생명을 얻게 하시고 세상의 비밀을 알게 하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만이 대단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임을 고백할 뿐입니다.

신자가 힘과 권세와 물질의 풍요로움을 대단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는 짐승이란 존재에 대해서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짐승은 장차 멸망에 들어갈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가 어떤 힘과 권세와 보좌로서 세상을 다스린다고 해도 결국은 멸망에 들어갈 자입니다. 반면에 성도는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인해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자입니다. 과연 누가 대단한 자입니까? 세상의 실체를 모르는 자는 짐승의 힘과 권세가 대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짐승의 실체를 알고 세상의 운명과 성도의 성도 됨을 아는 자는 힘과 권세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의 은총 아래 살아가는 성도로 부름 받은 것에 대해서 대단한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모든 경배를 한몸에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의 택함과 부름을 입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대단함을 가지고 살아갈 것입니다.

힘과 권세가 대단하고 기이한 것이 아니라 멸망을 피할 수 없는 죄인이 그리스도께서 대신 피 흘리신 은총으로 인해서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이 기이한 것이고 그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이 대단한 것입니다. 참으로 기이하고 대단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놓치지 마시고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힘과 권세에 대해서 기죽지 마시고 당당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세상을 아는 신자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