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8:1-3 무너진 바벨론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그것은 전적으로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의 공로와 행함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세상을 홍수로 심판해 버리실 때 유일하게 노아의 가족만 살아남았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노아의 가족은 어떻게 살아 남았을까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 공로로 살아남은 것입니까? 아니면 창 7:9절의 말씀대로 그가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로 하나님과 동행하였기 때문에 그 공로로 그 가족만이 살아남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창 7:8절에 보면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노아가 의인으로, 그리고 당세와 완전한 자로서 여호와와 동행할 수 있었던 모든 이유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은혜가 노아로 하여금 그러한 삶을 살도록 한 것이지 결코 노아 자신의 의로움이나 착함으로 되어진 것은 아닙니다.

노아가 의인이고 당세에 완전한 자라는 것은, 노아의 행동거지가 타의 모범이 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이웃에게 나쁜 말을 듣지 않을 정도로 칭송이 자자한 인물이란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이유라면 당시 꼭 노아만 타의 모범이 되는 행동을 했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설사 노아만 의로운 행동으로 살았다고 해도 만약 심판에서 살아난 이유가 그것이라면, 오늘 심판을 앞두고 있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십자가 대신 의로운 행동을 하라고 가르쳐야 하고, 이웃에게 모범을 보이고 칭찬 듣는 삶이 될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노아에 대한 의와 완전함의 평가는 그의 행동을 기준한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입은 은혜의 결과였습니다. 즉 은혜를 입은 자였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 자체가 곧 노아의 의와 완전함을 증명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란 실제로 하나님이 모습을 드러내셔서 노아와 동행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동행이란 단지 몸과 몸이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비록 몸과 몸이 함께 한다고 해도 마음이 서로 다르다면 그것은 이미 결별된 상태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동행이란 몸과 몸이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 함께 하는 동행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과 동행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노아의 행동을 결정하고 지배하는 삶이 노아에게서 볼 수 있는 의며 완전함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이미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 노아였기에 그는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주를 만들 수가 있었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큰 방주를 짓는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시일이 정해지지 않는 작업이었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심판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상태에서 방주를 짓는 작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사람들의 시선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로만 살았기에 가능한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노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 역시 노아와 같이 세상의 심판이라는 선포가 주어진 시대를 살아가는 입장에서 과연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를 생각해 보고 싶어서입니다. 노아의 삶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스스로 성도라고 하는 우리 역시 노아의 삶과 같은 방향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삶의 방향은 과연 어디입니까? 노아처럼 은혜를 입은 자로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그 마음과 함께 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노아인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노아는 묵묵히 방주를 만드는 삶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날 때까지의 노아의 삶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은 삶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노아와 같은 심판이라고 하는 말씀아래 살아가는 성도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난 삶을 사는지 아니면 심판을 염두에 두면서 살아가는 삶인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큰 권세를 가진 천사가 힘센 음성으로 큰 성 바벨론이 무너짐을 소리치고 있습니다. 바벨론이 무너졌다는 것은 14:8절에서도 나온 내용입니다.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이처럼 14장에서 바벨론의 무너짐을 말하고, 또 18장에서 다시 바벨론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14장과 18장까지가 시간상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만 바벨론의 무너짐을 점차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벨론의 무너짐과 오늘 우리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사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에 등장하는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을 대하면서 자신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단지 인간에 대한 교훈으로 여겨버리기 때문에 성경의 말씀이 하나의 윤리책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백성들에게 성경은 강력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은혜를 입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사람으로 택함을 입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바벨론의 무너짐은 어떻게 우리와 상관이 있는 말씀입니까? 그것은 바벨론의 무너짐은 곧 이 세상의 무너짐을 계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의 무너짐은 바벨론이란 특정 국가에 대한 심판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특정 국가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특정 국가에 대한 심판이라면 이방나라는 심판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이스라엘을 심판의 대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의 관심과 심판은 어떤 특정 국가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바벨론은 우리가 이해하는 국가의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국가의 개념은 특정한 땅덩어리와 사람들입니다. 국가란 체제와 이념을 질서로 해서 구축이 되는 조직체입니다. 그리고 국가라는 조직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국가의 질서인 체제와 이념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요즘에는 조금 완화된 느낌이 있지만 그래도 아직 남한은 북한의 체제나 이념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는 국가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하면서 철저하게 배격하고 있습니다. 우린 많은 대학생들이 공산주의를 옹호할 때 이적 단체니 보안법 위반이니 하면서 구속되는 것을 많이 봐왔습니다. 그것이 곧 국가의 이념과 체제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국가가 채택한 이념과 사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벨론을 이러한 국가로 이해를 한다면 본문에서 말하는 바벨론의 무너짐은 우리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로 들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대한민국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바벨론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한 것입니다.

바벨론은 당시 강대국이었습니다. 오직 힘이 최고라고 여기는 나라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생존은 오직 자신들의 능력이고 힘이었지 누군가의 도움이나 은혜라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나라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하십니다. 그러자 바벨론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독하게 됩니다.

겔 24:2절에 보면 "인자야 너는 날짜 곧 오늘날을 기록하라 바벨론 왕이 오늘날 예루살렘에 핍근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겔 26:7절에서도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열왕의 왕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로 북방에서 말과 병거와 기병과 군대와 백성의 큰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두로를 치게 할 때에"라고 말하고, 겔 30:25절에도 "내가 바벨론 왕의 팔은 들어주고 바로의 팔은 떨어뜨릴 것이라 내가 내 칼을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고 그로 들어 애굽 땅을 치게 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겠고"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들을 보면 하나같이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들어서 예루살렘을 치고 두로와 애굽, 그리고 다른 이방 나라를 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바벨론 왕의 팔을 들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으로 하여금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일에 바벨론이 쓰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하나님이 자신의 손을 들어주고 계신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강하기 때문에 승리한 것으로 여깁니다. 배후에서 일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그리고 승리의 영광을 자기들의 것으로 가로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벨론의 사고방식이며 그들이 멸망당할 이유입니다.

따라서 바벨론의 무너짐은 '이러한 정신으로 사는 자는 다 망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바벨론의 무너짐이 오늘 우리와 깊은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벨론 사람이냐 아니냐는 것은 혈통을 가지고 구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벨론과 같은 정신이라면 우리 역시 바벨론과 같은 사람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노 역시 우리에게서 먼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혈통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신 것이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의 정신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인정 하셨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어린양의 희생을 잊고 산다면 그들은 이방인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희생의 정신이 살아있는 그 나라만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나라만 남기고 모든 것을 멸하시는 것입니다.

2절에서 천사가 외치기를 큰 성 바벨론이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폐허가 되어버린 모습입니다.

사 13:19-21절에 보면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가 된 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같이 되리니 그 곳에 처할 자가 없겠고 거할 사람이 대대에 없을 것이며 아라비아 사람도 거기 장막을 치지 아니하며 목자들도 그 곳에 그 양 떼를 쉬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오직 들짐승들이 거기 엎드리고 부르짖는 짐승이 그 가옥에 충만하며 타조가 거기 깃들이며 들양이 거기서 뛸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이사야가 바벨론에 대해 받은 경고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바벨론은 강한 힘을 자랑하는 나라입니다. 강한 힘이 있기 때문에 절대로 쓰러지지 않고 망하지 않을 나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강한 바벨론이 귀신의 처소가 되고 온갖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이 되버렸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벨론의 운명입니다. 바벨론 왕이 국가를 잘못 다스려서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일입니다.

우리는 힘만 있으면 쓰러지지 않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당당하게 살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강한 힘이 나를 지탱하고 굳건히 해준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는 강한 힘에 더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말은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능력을 자신이 힘있는 존재가 되는 것에 이용하려고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전능하신 것이지 내가 전능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전능하신 것보다는 내가 전능한 자가 되는 것이 더 신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이 강하신 분이면 되지 우리가 강한 존재가 되어야 이유가 있는가?'라는 말에 대해서 받아들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모두가 자신이 강한 자 되는 것에 소망을 두고 삽니다. 강한 자 되는 것만이 이기는 것이고 인생이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벨론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모든 것을 하나님은 바벨론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멸하시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자랑하던 부유함과 사치와 강한 힘이 다 몰락하고, 결국 귀신의 처소로 몰락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힘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요즘 소위 재벌이라는 사람들이 많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대우, 현대, 삼성 등 돈이라면 결코 아쉬움이 없고 근심 걱정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결국 하나하나 무너지고 있는 것을 볼 때, 역시 돈의 힘은 영원한 것이 아님을 절실히 느낍니다.

돈이란 움직이는 것입니다. 여기 있다가 저기로 이동하는 것이 돈입니다. 돈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동할 수 있다면 얼마나 신자는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돈을 이동하는 것은 재벌들도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돈을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얼마를 주셨다면 그것이 곧 우리에게 최선이기 때문에 그만큼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생각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곧 돈이 삶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주어진 것을 최선의 것으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의 모습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고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능력만큼 누리고 살겠다는 것이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는 차원은 아닌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더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희생' 때문에 살아가는 자신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즉 삶의 이유와 목적이 어린양의 희생으로 모아질 때 자연히 세상에 대한 소망이나 욕심이 극복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의 모습입니다.

바벨론은 실상 귀신들의 초소이고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폐허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록 겉으로는 부요함과 화려함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귀신들이 놀고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일 뿐입니다.

우리들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온갖 화려함과 재물의 풍부함이 우리들의 시선을 사로잡지 않습니까? 아무리 믿음으로 살려고 하지만 세상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절감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세상은 절대로 영원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할지 몰라도 실상은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일 뿐입니다.

계 3장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면 그들은 스스로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화려함과 풍부함이 결코 그들을 부요한 자로 행복한 자로 만들 수 없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속사람입니다. 겉의 화려함은 진실이 아닙니다. 영원한 것도 아닙니다. 언제고 사라질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속사람의 사람됨은 우리를 부족함이 없는 자로 만듭니다. 진심으로 부요하고 행복한자 되게 하는 것입니다. 겉의 부요함보다는 속의 부요함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3절에 보면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바벨론을 좋아합니다. 힘을 경배하기 때문에 바벨론 되는 것이 소망인 세상입니다. 결국 바벨론과 같은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바벨론과 함께 진노의 포도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바벨론과 같다면 우리는 바벨론과 같은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입으로 하나님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도 그 속은 이미 귀신의 처소일 수밖에 없습니다.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성전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더러움이 없을 때입니다. 더러움이란 죄를 의미하는 것이고, 죄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살려고 하기보다는 세상의 것을 더 사모하고 바라고 살아갈 때 그 속은 이미 귀신의 처소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이미 바벨론이 무너졌다는 말씀에 의해서 그 마지막이 결정되어졌습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우리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는 것은 그리스도일 뿐입니다. 무너진 세상에서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다시금 그리스도가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깨달으시고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