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8:4-8 하늘에 사무친 죄

세상에서 통용되는 죄에 대한 시각과 성경에서 말하는 죄에 대한 시각이 전혀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을 절대로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말하고 있기에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어떤 종교를 믿든, 또는 믿지 않든 상관하지 않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죄를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해 버립니다. 그가 최고의 윤리를 가졌든 아니면 고매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든 양심이 바른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이 보실 때 진노를 받아야 할 죄인입니다. 반면 세상에서는 악하다고 말하는 살인자라고 할지라도 그가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다면 죄인이 아닌 의인이라는 칭함을 받게 됩니다. 과거에 그가 뭘 했든 상관하지 않고 현재 그리스도를 믿는가만 묻습니다. 따라서 죄를 세상에서 통용되는 상식으로 판단을 하게 된다면 결국 죄에 대해서 대단한 오해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태어나 자라면서 죄에 대해서 교육을 받습니다. 어릴 적부터 이런 것은 나쁜 것이라는 부모의 말을 들으면서 자랍니다. 학교에 가서는 도덕이라는 과목을 통해서 죄가 무엇이며 무엇이 나쁜 짓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경험을 통해서 스스로 나쁜 것과 옳은 것을 터득해 가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서 누군가를 의지해서 죄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경험과 상식과 교육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죄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막 16:15-16절에 보면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정죄 받는 기준은 복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믿게 된 자는 구원을 받지만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또 갈 1:8절에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는 말씀에서도 복음이 구원과 저주의 분명한 기준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분명한 규정은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들의 성급한 상상과 상식을 동원해서 죄에 대한 규정을 스스로 내리지 말자는 것입니다.

본문 5절에 보면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고 말씀합니다.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다'는 말을 볼 때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뭔가 무겁고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말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생각할 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하늘에 사무칠 정도로 무거운 죄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인간관계에서 등장하는 죄라면 부모형제를 죽였거나 자신의 가정을 파멸시킨 그러한 종류의 죄를 하늘에 사무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죄가 하늘에 사무쳤다는 것은 하늘이 진노할 만큼 무거운 죄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러한 생각은 죄를 가벼운 죄와 무거운 죄로 구분을 하도록 해버립니다. 그리고 가벼운 죄에 대해서는 조금 안심을 하고 무거운 죄에 대해서는 불안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볍다고 생각되는 죄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행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사무친 죄라는 것은 죄를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으로 구분을 하는 말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은 무거운 죄는 기억하시고 진노하시지만 가벼운 죄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는 분이 아닌 것입니다.

하늘에 사무친다는 것은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5절에서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이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다'고 말씀한 것을 보면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불의를 행한 것을 '하늘에 사무친다'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죄는 무거움과 가벼운 것으로 구분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의 상식으로는 살인과 단순 도둑질이 같은 죄로 취급될 수 없습니다. 살인은 중하지만 도둑질은 그에 비하면 분명 가벼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저주받는 자는 복음을 믿지 않는 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이지 살인하고 도둑질하는 자가 아닙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마치 살인과 도둑질은 죄가 아닌 것으로 말하는 것처럼 들려질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에는 분명 살인한 자와 도둑질 한 자에 대한 처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것은 살인, 도둑질이라는 행동에 대해서만 죄로 규정을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살인이나 도둑질의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죄에 대해서는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살인이나 도둑질은 모두가 이웃에게 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즉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이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살인도둑질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저주를 받는 것은, 살인이나 도둑질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는 것이지 살인을 했기 때문에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세상이 도덕과 윤리라는 명목으로 여러 가지로 구분해 놓은 소위 죄의 행동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치 않음'이라는 하나로 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하늘에 사무친 불의 역시 이런 차원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7절에 보면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죄, 즉 하늘에 사무친 죄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영화롭게 하고 사치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죄에 대해서 이해를 하십니까? 세상에서는 자기를 영화롭게 하고 사치하는 것을 단지 도덕적인 차원에서 좋지 않은 것으로 규정을 할 뿐입니다. 국법에도 자기를 영화롭게 하고 사치한 것에 대한 처벌 규정은 없습니다. 즉 죄로 여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세상이 죄로 여기지 않는 것을 하늘에 사무친 불의로 말합니다. 그리고 '그만큼 고통과 애통으로 갚아주라'고 저주하실 만큼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죄로 말합니다.

왜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것과 사치하는 것이 불의가 되는 것입니까? 불의란 하나님의 의에 순종치 않은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것과 사치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의와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자기를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문을 벗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것은 인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결국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된 인간의 관계에서 나타난 의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를 영화롭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가로챈 것이 됩니다. 이것을 불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로 사는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만약 자신의 능력과 재주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으로 착각을 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증거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모르고 자기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모른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눅 12:16-19절에 보면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가 곧 우리들의 모습을 말하고 있음을 아십니까? 어리석은 부자처럼 우리들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저금통장에 그득히 들어 있는 돈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통장에 들어 있는 돈을 바라보면서 '내가 이 돈을 모으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즉 자신이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서 모은 돈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셨음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기보다는 자신의 피와 땀이 거둔 결실임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창고에 그득히 쌓인 곡식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공로만 보일 뿐입니다. 풍년을 위해서 햇빛도 있어야 하고 물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인데도 불구하고 풍년을 주신 분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노력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리석은 부자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너의 생명의 권한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즉 창고에 그득한 곡식이 네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유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유지되는 생명이 스스로의 힘으로 유지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 불의이며 자신의 힘과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 곧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일하심을 무시하는 하늘에 사무친 죄가 되는 것입니다.

7절 중간에 보면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자의 마음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도구로 사용해 버리는 것입니다. 좋은 환경을 믿어 버리고 좋은 환경이 있기 때문에 나는 결코 애통함을 당하지 않는다고 자신만만해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곧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좋은 환경이 있으면 그 환경도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사치는 이런 마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흔히 생각하기를 사치는 과소비라고 말합니다. 즉 호화로운 것이 사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애매한 말입니다. 호화롭다, 사치하다, 과소비, 이런 말을 할 때는 분명한 기준이 제시되야 합니다. 호화롭다고 할 때 어느 정도까지를 호화롭지 않은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어느 정도가 사치하지 않는 것이니까? 옷 한 벌을 살 때 얼마 이상을 살 때 사치라고 합니까? 보통 수입보다 지출이 많으면 과소비이며 사치라고 말하지만, 그렇다면 수천만원 버는 사람이 자신의 수입 한도 안에서 마음대로 쓰는 것은 사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사치란 그런 의미의 사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우리들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들의 소유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은혜입니다. 인간이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자기 수중에 있는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산다면 그것이 곧 사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쓰겠다는 것보다는 자기를 위해서만 소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치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것과 사치가 같이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사 47:8절에 보면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은 이사야 선지자가 바벨론이 심판을 받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언급한 것입니다. 결국 당시나 지금이나 세상이 저주를 받고 심판을 받아야 할 이유는 동일한 것입니다. 즉 죄는 변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타락한 그때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동일한 죄의 세력 아래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것과 사치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없이 자신의 능력과 힘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이루었다'고 자화자찬하면서 자기를 과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의이며 하늘에 사무친 죄입니다.

경제가 어려워져서 세상이 어수선해도 마음이 든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돈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려운 세상에서 남들은 다 애통함을 당한다고 해도 나는 그런 일이 없다고 스스로 믿습니다. 돈이 있고 능력이 있기에 자신에게는 애통함이 닥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심을 믿지 않는 마음에서 나오는 불의함입니다.

이러한 불의함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갚으십니까? 6절에 보면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 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고 말씀합니다. 갑절을 갚아주고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는 것은 수학적인 의미로서 갑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형벌에 대한 확고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8절에 보면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자기를 영화롭게 하고 사치하고 살아가는 세상이 당할 보응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성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4절에 보면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말씀을 합니다.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나오라는 것은 바벨론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바벨론이란 나라에서 나오라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이 살아가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빼내신 것은 단지 애굽이라는 땅덩어리에서 빼낸 것이 아니라 애굽이 살아가는 사고방식에서 구출하신 것입니다. 바벨론이나 애굽은 강대국으로서 똑같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힘을 과시하고 힘을 믿고 살아가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그런 사고방식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곧 그들이 받을 재앙에서 벗어나는 길인 것입니다.

그들의 죄에 참예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재주와 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심을 믿으면서 자신의 환경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져 있는 것을 자신의 힘으로 착각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되어진 것임을 믿으며 사는 것이 세상의 죄에 참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받을 형벌과 상관없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화롭게 할 대상은 우리 자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창조주이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주신 분이기에 영광을 받으시기에 마땅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열심히 함으로서 주어진 결과로 인식한다면 세상의 죄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들이 받을 재앙을 함께 받는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듯이 오늘 우리를 세상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의 증거인 피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됨을 믿게 하심으로서 세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착함도 윤리도 믿지 않고 그리스도의 피만 믿고 살게 하심으로서 세상의 죄에 참여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의를 믿지 않는 것이 곧 십자가를 믿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사고방식은 자신을 영화롭게 할 뿐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려드리기 보다는 자신의 것을 감추고 남기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이용해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죄에 참여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영화롭게 하고 사치하는 것이 하늘에 사무친 죄로 여겨진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자로서 세상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자로 살아가는 사람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영화롭게 하려고 하지말고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결코 여러분 자신을 높이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돈이 있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도 그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닌 것이 하나도 없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영화롭게 할 근거가 과연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다시금 마음에 굳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찬미하는 삶이 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