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8:9-20 무엇을 위해 우는가?

사람에게는 눈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감격의 눈물, 기쁨의 눈물, 슬픔의 눈물, 애통의 눈물 등등 여러 상황에서 사람들은 눈물로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합니다.

눈물이란 어떤 상황이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을 때 나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기쁜 일이라고 해도 자신에게 기쁜 일이 아니면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일류 대학에 합격을 했다고 해도 그것이 내 자식의 일일 때 감격의 눈물이 나는 것이지 남의 자식의 일인데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입니다.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가 금메달을 땄을 때 우리는 한국이라는 같은 민족으로서 다같이 기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수의 부모들과 같은 감격과 기쁨은 아닐 것입니다. 금메달을 딴 선수나 그 가족들에게는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관계가 있지만 우리들에게는 단지 같은 민족이라는 관계에서만 기뻐하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운다는 것은 나 자신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맹목적으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무엇에 대해서 우는가를 살펴보면 그가 과연 무엇을 소중히 여기고 살아가는 것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즉 어떤 일에 대해서 울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소중한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운다는 것은 소중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중하고 귀한 것으로 여긴 것이기 때문에 얻었을 때 기쁨과 감격의 눈물이 나오는 것이고 잃어 버렸을 때는 애통의 눈물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 소중한 것이 아니라 별 가치 없는 것이라면 얻었다 해도 잠시의 기쁨은 있겠지만 기쁨과 감격의 눈물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잃어버린다고 해도 눈물을 흘릴 정도로 애통해 하지는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이유로 사람이 무엇에 대해서 우는가를 살펴보면 그가 과연 무엇을 소중히 여기고 살아가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과연 무엇을 얻고 잃었을 때 울며 애통해 합니까? 또 얻고 잃어버려도 전혀 애통함이 없이 담담해지는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본문에 보면 울며 애통해 한다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9절에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라는 말씀을 하고, 11절에 "땅의 상고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는 말씀을 하고, 15절에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라는 말씀을 하고, 19절에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고 애통하여 외쳐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을 인하여 치부하였더니 일시간에 망하였도다"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살펴보면 울며 애통하는 자들은 땅의 왕들, 땅의 상고들 즉 세상의 상인들이며, 배 부리는 모든 자들, 즉 선장과 선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울고 애통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바벨론 때문입니다. 바벨론의 멸망이 이들에게 울음과 애통함이 된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바벨론의 멸망이 이들에게 울음과 애통함이 된 것입니까? 앞서 말한 대로 눈물과 애통함이란 자신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바벨론 사람이기 때문에 바벨론의 멸망에 울고 애통해 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9절에서 땅의 왕들이라는 말을 보면 바벨론 사람이기 때문에 울고 애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땅의 왕들이란 바벨론 왕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세상의 왕들을 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11절에서 말하는 땅의 상인들이라는 것도 바벨론 상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상인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들의 눈물과 애통함은 단지 바벨론 사람이라는 민족적인 차원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왜 바벨론을 위해서 울고 애통하는 것입니까? 9절을 보면 땅의 왕들은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왕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바벨론과 함께 음행하고 사치했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권세 아래서 사치하고 음행하며 살았기 때문에 바벨론의 멸망의 그들에게는 행복의 끝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망함으로 인해서 울고 애통해한다는 것입니다.

상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1절에 보면 바벨론의 멸망으로 인해서 다시는 그들의 상품을 살 자들이 없기 때문에 울고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부강하고 사치하며 살아갈 때 득을 보는 자들은 상인들입니다. 비싼 상품을 팔 수가 있고 그로 인해서 많은 득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12-13절을 보면 이들이 팔던 상품의 목록이 나옵니다. 하나같이 값이 나가는 것들입니다. 바벨론이 사치에 마음을 빼앗기고 향락을 즐기는 삶을 살았기에 그러한 값비싼 것들이 귀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바벨론이 망하자 그 물건들을 살 사람이 없습니다. 결국 바벨론의 멸망은 상인들에게는 득을 주고 자신들을 기쁘게 해주던 것들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울며 애통함이 되는 것입니다.

배를 부리는 선장이나 선원들이 울며 애통해하는 이유도 같습니다. 선원들은 상인들의 상품을 운반하는 역할을 함으로서 이들의 상행위에 관여하게 됩니다. 즉 무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이 사치스런 물건을 많이 소비하면 할수록 상인들의 이득과 함께 선장이나 선원들의 이득도 풍부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바벨론이 멸망함으로서 이러한 모든 연결 고리가 끊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 모두는 바벨론의 부강함과 사치함을 힘입어서 함께 득을 누리고 즐기던 사람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서 바벨론의 멸망은 곧 자신의 망함을 의미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바벨론을 위해서 애통해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생계의 원천이고 바벨론으로 인해서 부요함을 누리고 살았는데 그 원천이 끊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바벨론을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바벨론만 바라보고 바벨론의 부요함이 곧 자기들의 부요를 의미하고, 바벨론의 몰락은 곧 자신들의 몰락을 가져온다고 믿은 사람들입니다. 바벨론이 곧 그들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계 18:4절에 보면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바벨론의 죄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은 바벨론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자기들의 부강함을 의지했습니다. 자신들의 능력과 힘으로 이룩한 부요함을 과시하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죄에 참여한다는 것은, 바벨론의 부요함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의 부요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요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당연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바벨론의 사고방식에 거하지 않고 거기서 나온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멸망 때문에 울고 애통한다는 것은 아직까지 바벨론과 같은 사고방식에 거한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이나 사건들로 인해서 여러분에게 걱정으로 다가오고 염려와 근심으로 다가오는 것은 없습니까? 세상의 경제 사정이 어려워진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뭔가 불안감이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않습니까? 경제가 발전되고 나라가 부강해진다는 소식에는 마음에 가벼움이 있고 즐거움이 있으면서도 어려워진다는 소식에 대해서 염려한다면 그것은 결국 무엇을 믿고 의지한다는 증거이겠습니까? 국가라는 단체를 의지하고 살아간다는 증거이지 않습니까? 국가가 어려워지면 그 어려움이 나 자신의 어려움으로 연결되어진다는 것 때문에 염려가 되고 근심이 된다면 바벨론 덕분에 살아간다고 생각하던 세상의 왕들이나 상인들 그리고 선원들과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누구 덕분에 산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넉넉한 삶을 사신다면 그것이 누구 덕분이라고 여기십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국가 덕분입니까? 하나님 덕분이라면, 진심으로 그것이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은 믿음이라면 국가가 어떤 상황에 빠지던 여러분의 마음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국가가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0절에 보면 바벨론으로 인해서 울고 애통해 하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는 말씀대로 바벨론의 멸망이 오히려 즐거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이란 하나님을 의미하기보다는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거하는 나라를 의미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장차 하늘에 거할 자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현재 하늘에 살아가는 자들로서 바벨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기에 바벨론의 멸망이 즐거움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벨론 덕분에 살아가던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바벨론에 의해서 고난을 받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바벨론의 멸망은 즐거움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엡 2:5-6절에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장차 성도가 하늘에 앉게 된다는 미래적인 사건을 말씀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죽고 다시 사심으로 인해서 이미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은 자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다. 즉 실제적인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그리스도안에 주어진 약속의 확실성을 말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렸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힐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차원에서 이미 이루어진 일로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실제로 실현되고 완성으로 다가오는 것만 남아 있을 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성도라면 바벨론의 힘을 의지하고 살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벨론 역시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망하고 사라져야 할 심판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믿음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지 않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자신과 세상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심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으로 인해서 먹고살려고 하는 자는 곧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모래를 모래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래를 모래로 보고 살아갑니까? 참으로 귀한 것을 귀한 것으로 보고 살아갑니까? 세상이 무너질 것에 지나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사라질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눈으로 보고 살아가는 이 땅은 결코 우리가 의지할 곳은 아닙니다. 비록 지금 당장은 세상이 잘돼야 우리가 잘 될 것은 생각이 들 수 있지만 그것은 육체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구원을 책임지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에 귀한 것과 귀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가 중요합니까? 우리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천국을 소망하고 있다면 우리 속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지워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흔적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은혜는 우리들을 책망할 것입니다. 세상에 오셔서 피흘리시고 고난 받으신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서 무시 받고 짓밟히고 있음에 대해서 오히려 우리를 책망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무엇에 대해서 울고 애통해 하십니까? 세상이 살기가 어려워지는 것에 대해서는 염려하고 근심하면서도 우리 속에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점점 희미해져 가는 것에 대해서는 염려하고 근심하신 적이 있습니까? 세상 것으로는 즐거워하고 기뻐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기를 즐겨하지 않고 기도하기를 즐겨하지 않고, 교회에서 형제를 위해서 수고하고 봉사하기를 기뻐하지 않는 자신에 대해서 애통해 하고 근심하고 염려하신 적은 있습니까? 없다면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결국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성도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세상일에 안되면 애통해하고 울음을 터뜨리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애통함이 없다면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그만큼 무관심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 자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에 대해서 애통해 하고 울며 살았는지 여러분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우리의 애통함과 울음의 대상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상으로 인해서 운다면 그것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우리의 허물을 인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피흘리신 주님의 고난을 갚이 생각하시고 주님의 은혜가 어떠함을 다시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으로 인해서 애통해하고 울기보다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애통해하고 우는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산상수훈 팔복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위로는 애통하는 자의 몫입니다. 세상에 의가 없고 믿음이 없음으로 인해서 애통해하며 살았던 그가 바로 주님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세상이란 우리 자신까지 포함한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기 때문에, 은혜로 살아가야 할 나 자신이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주님의 은혜로 감사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자신이 미워지고 애통함이 나올 때 주님은 그를 위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허물까지 몽땅 주님이 담당하셨음을 알게 하심으로서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항상 주님의 은혜 앞에서 그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신의 불의함에 대해서 울고 애통해 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신자의 겸손함이고 그 겸손한 마음에 주님의 은혜가 은혜로서 존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