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8:21-24 심판

세상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십자가 없이도 인간들이 서로 손을 잡고 단결하면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십자가가 인간의 죄를 해결했다고는 하지만 십자가 없이도 자신의 양심과 의지로도 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거나 아예 죄의 결과에 대해서 전혀 심각성을 가지지 않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세상 법에만 올바르게 살면 되는 것이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내세에서 판결 받을 죄에 대해서까지 생각하며 살아가기 싫다는 의도가 강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은 일부 사람들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십자가에 대해서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가 현실적으로 인간에게 어떤 득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아무런 가치 없는 불필요한 것으로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자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가치 없는 존재인가를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가치 없는 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놀라운 가치의 신분으로 탈바꿈된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도록 하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따라서 성령 받지 아니한 자는 십자가를 세상적인 가치기준으로 판단을 합니다. 자신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가를 기준으로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세상적인 시각으로 판단한다면 전혀 가치 없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가리는 십자가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무슨 효능이 있습니까? 직장에서 승진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공부를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까? 여러분도 지금껏 충분히 느끼시는 것이라고 생각이 되지만 사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그런 면이 곧 세상에 대해서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인간은 아무도 십자가를 믿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어떤 인간이든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것만 받아들이고 도움이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새사람 되게 한다는 것은 가치 기준 자체가 달라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가치를 두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모든 가치를 두게 되기 때문에 자연히 하나님 나라에 보증이 되는 십자가에 대한 시각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신자에게는 십자가보다 귀한 것이 없으며, 잠시 동안의 세상의 삶에 대한 미련보다는 십자가에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라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대해서보다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더욱 더 깊은 생각과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세상의 삶이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증거하는 기회이고 현장일 것입니다. 인생에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기에 힘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 사는 자가 진정한 신자일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고 말씀합니다. 요한은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서 바다에 던져 버리는 환상을 봅니다. 그 환상의 내용은 큰 성 바벨론이 그같이 바다에 던져져서 다시는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환상은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내용입니다. 렘 51:63절을 보면 "너는 이 책 읽기를 다한 후에 책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하수 속에 던지며 말하기를 바벨론이 나의 재앙 내림을 인하여 이같이 침륜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니 그들이 쇠패하리라 하라 하니라 예레미야의 말이 이에 마치니라"고 말씀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에는 본문의 내용과는 달리 바벨론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 적힌 책을 돌에 매어서 유브라데 하수에 던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레미야가 책을 하수에 던지는 것은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질 것에 대한 상징적인 행동으로 취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이처럼 구약의 예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한 것들이 상세하게 보여지는 것이 요한계시록인 것입니다. 구약에서 말씀한 것들이 오늘 우리 시대에서 어떻게 현실로 다가오는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구약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멸망의 예언이나, 이방 나라 즉 바벨론 두모 등등의 멸망에 대한 예언에 대해서 소홀히 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예언한 각국에 대한 멸망의 예언들이 어떻게 실현되는가에 대해서 상세하고 명확하게 말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자신들이 과거 유다의 위치에 있고 바벨론의 위치에 있으며 멸망당한 이방나라의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그들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멸망을 피할 수 없음에 대해서 미리 보여주는 것이 그들의 멸망인 것입니다.

이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22-23절의 말씀입니다. "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물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비취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고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라는 말씀은 이미 예레미야가 유다의 멸망에 대해서 예언한 말씀입니다.

렘 25:10-11절에 보면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 소리와 등불 빛이 끊쳐지게 하리니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다른 신을 좇아 섬긴 유다에 대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유다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 본문에서는 바벨론의 멸망을 말하는 천사의 소리와 동일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결국 유다의 멸망은 곧 바벨론의 멸망과 같으며 예레미야의 예언은 예레미야 개인의 말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다의 멸망과 바벨론의 멸망이 같은 내용의 말로 증거 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유다나 바벨론이나 같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에서 유다를 심판하시는 그 기준이 오늘날 세상에도 그대로 적용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에서 예언되는 바벨론의 멸망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그 기준이 오늘날 세상에도 그대로 적용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에게는 유다냐 바벨론이냐라는 구분이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는 유다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준에 합당하지 않으면 결국 이방인과 함께 취급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유다에게 말씀하신 멸망의 내용과 바벨론에게 말씀하신 멸망의 내용이 같이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본 환상이나 계시는 새로운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이미 예언된 것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유다를 심판하셨습니까? 유다가 심판을 받은 이유를 안다면 우리가 단지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유다가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사에 철저했던 사람들이고 율법에 대해서도 최선을 다해서 지키기 위해서 애를 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심판을 받았다면 결국 제사도 제물도 할례도 기도도 그 어떤 것도 그들의 구원을 보장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우리들의 기독교적인 행위에 대해서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가령 주일날 드리는 예배에 철저하다든지, 십일조를 빠지지 않고 한다든지, 기도를 부지런히 하는 행위가 있다고 해서 신자로 인정된다든가 구원받은 자로 여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셔서 하시고자 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단지 제사 드리고 제물 바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분명히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제사를 드리게 하고 제물을 바치게 하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자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다만 율법을 지키고 제사 드리고 제물을 바치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할 일을 다한 것으로 여겨버린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교인들이 주일에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으로 성도로서 모든 의무를 다한 것으로 여긴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결국 멸망당한 유다의 수준과 같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심판의 대상인 세상 속에서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시고 십자가에 저주를 받고 피흘리게 하신 모든 일들이 단지 사람들로 하여금 예배드리고 헌금 바치고 교회에 봉사하는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겠습니까?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내 증인이 되게 하리라'였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게 하시겠다는 것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고 하늘로 가시고 땅에 남겨진 자기 백성을 향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죄와 허물이 용서된 자들이라면 우린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불려 나온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예배하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것입니까? 과연 그런 것들이 세상에 대해서 죄가 무엇인지를 증거 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멸망의 이유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지 예배드리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헌금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는 것은, 신자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증거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자된 자들이 날마다 죄인 됨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가 아니면 살 수 없었음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관심을 주님에게 두려고 애를 쓰는 삶을 갈 때 그리스도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믿음이 진실임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죄인이라는 말을 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말하면서도 여전히 관심이 세상을 향한다면 과연 누가 그를 보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겠습니까?

유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제사나 그 외 율법에 의한 의식들을 실천했으면서도 자기들 손으로 만든 것을 의지함으로서 하나님의 노를 격동했던 것입니다. 렘 25:6-7절에 보면 "너희는 다른 신을 좇아 섬기거나 숭배하지 말며 너희 손으로 만든 것을 인하여 나의 노를 격동치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해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너희 손으로 만든 것으로 나의 노를 격동하여 스스로 해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곧 멸망의 이유였습니다. 제사를 드리고 율법을 지키면 뭐합니까?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자신들의 죄가 제물의 피로 인해서 용서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죄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제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진정한 제사는 그들로 하여금 오직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게 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죄가 무엇이며 은혜가 무엇인가를 증거 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증거 하고자 하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여전히 자기와 세상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나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바벨론이나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준 되어서 오늘날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이 본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무엇을 한다고 해도 그것을 보지 마시고, 과연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삶인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세상에 대해서 믿는 모습을 보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자로서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삶의 방향을 세상이 아닌 십자가에 두고 살아가고 있을 때 그것이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십자가의 은혜나 기쁨이라는 말은 하면서도 여전히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세상 것으로 누리려고 애를 쓴다면 그가 말하는 십자가의 은혜나 기쁨에 대해서 의심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2절에 거문고 타는 자, 풍류하는 자, 퉁소 부는 자, 나팔 부는 자란 한마디로 말해서 음악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음악이란 삶의 기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여유롭고 풍부할 때 나오는 것이 음악이지 괴로운데 음악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음악이 다시는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다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세공업자란 금은 보석을 세공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금은 보석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사치가 다시는 있지 않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23절의 맷돌 소리 등불 빛 신랑과 신부의 소리는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의미합니다. 땅에서의 행복을 담고있는 느낌을 주는 말들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바벨론이 바다에 던져짐과 함께 사라지고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 24:8-11절에 보면 "소고 치는 기쁨이 그치고 즐거워하는 자의 소리가 마치고 수금 타는 기쁨이 그쳤으며 노래하며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고 독주는 그 마시는 자에게 쓰게 될 것이며 약탈을 당한 성읍이 훼파되고 집마다 닫히었고 들어가는 자가 없으며 포도주가 없으므로 거리에서 부르짖으며 모든 즐거움이 암흑하여졌으며 땅의 기쁨이 소멸되었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의 말씀의 의미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세상이 누리는 모든 즐거움과 기쁨을 사라지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세상에서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에 대해서 거부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은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을 자신의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것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종말의 징조를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8-39)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에 대해서 정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것들로 인해서 홍수가 나서 멸하기까지 깨닫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삶을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산 것으로 인해서 세상의 마지막에 대해서는 전혀 깨닫지 못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도 음악이나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삶에 대해서 심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부로 알고 살아감으로 인해서 세상의 마지막이 어떠함을 깨닫지 못한 것에 대한 심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땅의 기쁨만 기쁨으로 알고 천국의 기쁨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산 세상에 대한 심판인 것입니다.

땅의 기쁨을 누리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어떤 땅의 기쁨도 결국 잠시동안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결국 사라질 것에 지나지 않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주어지는 천국의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때문에 땅의 기쁨이 없다 할지라도 천국의 기쁨으로 얼마든지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자가 주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삶이며 이러한 삶이 있음으로 인해서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땅에서의 기쁨이 전부가 아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항상 확인하셔야 합니다. 사람들이 누리고 싶어하고 즐기고 싶어하는 땅의 것은 바벨론과 함께 사라지고 보이지 않을 것들입니다.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에게는 그보다 더 크고 소중한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것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4절에 보면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중에서 보였느니라 하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세상과 신자의 관계입니다. 세상은 신자에 대해서 결코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그 증거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드러났지 않습니까?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에 연연하지 마시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아가는 신자의 삶에 대한 기쁨과 즐거움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기뻐했던 스데반의 그 기쁨의 비밀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시고 스데반과 같은 기쁨의 비밀을 여러분 또한 누리기를 소망하며 그리스도께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십자가에 담겨 있는 신자들만의 기쁨의 비밀을 능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