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9:6-10 옳은 행실

기독교가 타종교와 구분될 수 있는 것은 목적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목적하는 것이 자기 구원이냐 아니면 믿음의 대상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냐로 기독교만의 본질을 증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종종 신문이나 다른 매체를 통해서 종교의 화합이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종교의 화합이라는 말을 하는 배경에는 '모든 종교는 같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모든 종교가 같다는 것은, 종교가 추구하고 목적하는 바가 같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종교의 본질이 같고, 추구하는 것이 같은데 종교가 서로 반목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의 목적을 자기 구원에 두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말입니다. 즉 종교의 목적이 자기 구원에 있고, 기독교 역시도 자기 구원에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종교는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기독교는 목적하는 바가 자기 구원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반박하지 않지만, 그러나 하나님만 참된 신이라는 이유로 타종교와 화합할 수 없음을 고집합니다. 즉 하나님만 참된 신이고 다른 종교의 신은 모두 우상인데 어떻게 우상을 섬기는 종교와 화합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교회 내에서는 환영을 받을 수 있지만, 교회 밖에서는 단지 자기 종교에 대한 우월감으로밖에 보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어떻게 하든, 무슨 신을 믿든 천국만 가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은 착한 일을 한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에 굳이 한 종교를 선택해서 믿지 않아도 내 스스로 착한 일을 하면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신은 착한 일을 했느냐를 보고 있고, 종교를 가지는 이유도 신의 가르침을 따라서 착하게 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신이 없이도 내 양심으로 착하게 살면 지옥은 면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가 타종교와 다를 바 없는 종교로 취급되고 있는 이유는, 현 기독교 역시 자기 구원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이라는 자기 구원, 그리고 세상에서의 복이라는 자기 구원, 이처럼 하나님을 찾는 목적과 추구하는 모든 것이 자기 구원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서 기독교나 다른 종교가 똑같지 않느냐는 평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이 기독교를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닐지 모르지만, 어쨌든 세상에 비쳐지는 기독교 역시 자기 구원에 목말라하고 있는 모습으로 각인이 되고 있다면 그것은 현 기독교가 분명 잘못된 종교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제가 지금 기독교라는 용어를 쓰면서 하나님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모두 포함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가 생각할 문제는 내가 다니는 교회도 아니고 교단도 아니고 기독교라는 내가 선택한 종교도 아니고 바로 나 자신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나 자신이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내 구원에 목적을 두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목적하는 바가 있는지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요즘 수능시험일이 다가오면서 대구팔공산 갓바위를 찾는 사람이 늘어가고 교회를 찾아 기도하는 사람도 많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구원에 목말라하는 모습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구원에 목말라 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부르신 목적에 부합되는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구원에 목말라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내 스스로 하나님을 선택해서 나왔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내쪽에서 뭔가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하나님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내가 필요하고 내가 원하는 것만 생각하지, 하나님 쪽에서 어떤 목적을 두고 자기 백성을 부르신 것에 대해서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부름을 입어서 하나님께 나와진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지 스스로 하나님을 택해서 나온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요 15:16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 앞에서 내 스스로 예수님을 택했다는 것은 결국 택함 받은 자가 아님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택함을 받은 이유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택하신 것이 아니라 과실을 맺게 하기 위해서,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과실을 맺는 가지의 역할을 하게 하기 위해서 택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더러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여주는 자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택함 받은 자의 사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목적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부르신 이유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부르신 이유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라는 것이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힘써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분명 택한 백성에 대한 구원을 말하고 있지 않느냐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성경에는 분명 택함 받은 자에 대한 구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자로 부름을 입은 것에 대한 결과일 뿐, 그것 자체가 부름의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결과를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마음에 두고 하나님의 목적을 우리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이 택함을 받고 부름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당연한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 삶을 가리켜서 '성도들의 옳은 행실'(8절)이라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7-8절에 보면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어린 양의 혼인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그 아내, 즉 어린양의 신부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허락하사 입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린양의 신부가 누구겠습니까? 바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장차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서 신부로서 입게 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마포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세마포라는 것이 옷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흔히 혼인 잔치에서 입게 될 세마포를 우리가 입고 다니는 옷의 의미로 생각합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보는 옷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서 입는 신비한 옷이라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마포를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고 말한다는 것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선 이해해야 할 것은 성도의 옳은 행실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는 것이 어떤 행동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다시 말해서 성경보고 기도하고 구제하고 봉사하는 그러한 행동을 가리켜서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고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대개는 이러한 의미로서 이해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해봅시다. 어린 양의 신부로서 세마포를 입는다는 것은 천국 백성이라는 증표입니다. 그런데 그 세마포가 성도의 옳은 행실이고, 옳은 행실을 성경 보는 것 기도하는 것 등등의 우리의 행동으로 이해를 한다면, 결국 성경보고 기도하는 것 등이 천국 백성이라는 증거물이고 그리스도의 신부된 증거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만약 그것이 신부된 증거물이라면 그 증거물은 우리들의 의지와 의도에 의해서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이유로 성도의 옳은 행실을 성경보고 기도하는 우리의 행동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부된 증거물은 성령에 의해서 열매로 맺어지는 것이지 우리들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10절의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언의 영이란 성령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를 증거하는 분은 성령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내주하시는 성도라면 자연히 그리스도를 증거할 것이고, 결국 성령에 의해서 그 열매가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

물론 신자로서 성경 보는 것 기도하는 것 등의 행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이 택함 받은 자로서의 결과라면, 성경 보는 것이나 기도하는 것 등도 역시 그리스도를 신앙하고 살아가는 성도에게서 나타날 당연한 열매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의 행함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의 옳은 행실은 무엇일까요? 7절에 보면 '그 아내가 예비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그 아내란 어린 양의 신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신부로 택함 받은 신자가 어린 양과의 혼인잔치가 있기까지 자신을 예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예비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합당한 자로 자신을 단장하고 준비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신부의 삶이고 옳은 행실입니다.

신부가 누구입니까? 신부란 신랑을 기뻐하는 자입니다. 신랑을 기뻐하지 않는 신부는 없습니다. 신랑을 기뻐하지 않는다면 결혼 자체를 거부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우린 과연 어린 양과의 혼인 잔치를 기뻐하고 있습니까? 그 날을 기다리고 소망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혼인 잔치를 기다리고 기뻐한다면 그것은 신랑을 기뻐한다는 뜻과 같습니다. 하지만 혼인 잔치에 단지 손님으로 참석한 자는 잔치에 관심이 있지 신랑에게는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잔치에서 맛있는 것을 먹고 즐기는 것이 좋아서 잔치를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이 좋고 구원받는다는 것이 좋을 뿐, 혼인 잔치의 신랑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부의 모습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신부에게는 결혼식이 좋은 것이 아니라 신랑이 좋은 것입니다. 신랑을 기뻐하기에 신랑과 하나되고 신랑과 함께 거하게 되는 결혼식, 즉 혼인 잔치가 기쁘고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부의 옳은 행실이란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부로서의 자신을 단장하고 예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부에게 세마포가 허락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랑을 기뻐하며 살았던 그 행실을 옷입는 것입니다.

신부된 성도가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기뻐한다면 성도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았기에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랑의 사랑을 모르면서 신랑을 기뻐하는 신부가 있겠습니까? 결국 이렇게 볼 때 신부의 옳은 행실은 그리스도가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신부로 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피흘리신 희생과 사랑의 사건을 마음 깊이 깨달을 때, 그리고 그 희생과 사랑에 감사할 때 신랑을 기뻐하며 살아가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신랑에 대한 기쁨은 신랑의 마음에 합당한 신부로 남기 위해서 힘쓰는 삶으로 보여지지 않겠습니까? 언제 어디서나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자랑하게 되고 그분의 희생과 사랑을 노래하며 증거 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신부된 성도에게서 볼 수 있는 옳은 행실입니다.

세마포란 희고 깨끗한 옷을 말합니다. 마 17:2절에 보면 변화산에서 변화하신 예수님의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신부가 세마포를 입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18장에서 바벨론의 심판에 대한 말씀을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어린 양과의 혼인 잔치에 대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결국 혼인 잔치는 바벨론의 심판과 대비되어서 말씀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구분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바벨론의 심판에 대해서 애통하는 무리가 있었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바벨론과 함께 세상의 즐거움을 누렸던 땅의 왕들과, 바벨론을 상대로 무역을 하면서 부를 누렸던 상인들, 그리고 무역으로 인해서 득을 봤던 배를 부리는 선장 선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기쁨은 오직 부강한 바벨론으로 인해서 삶의 부를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과 함께 세상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이 삶의 기쁨이며 즐거움이었기에 바벨론이 사라진 이상 자신의 삶의 즐거움도 함께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애통해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바벨론의 심판에 포함된다는 것을 기정 사실입니다.

이에 비해서 성도, 즉 어린 양의 신부로 택함 받은 자들은 세상 자체가 기쁨과 즐거움이 아니라 신랑 되신 그리스도로 인해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고 살아갑니다. 때문에 세상의 것과 상관없이 기쁨과 즐거움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땅의 것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에게서 기쁨과 즐거움을 찾으며 살려고 하는 것이 곧 신부로서 옳은 행실인 것입니다. 이것이 혼인을 기다리는 신부로서 자신을 단장하고 예비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혹시 신부라고 하면서도 신부라는 것에 대해서 하찮게 여기고 살지는 않았습니까? 신부라는 것에 대해서 하찮게 여겼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거한다는 것 자체를 하찮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 거한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이고 가치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마음 깊이 묵상해 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9절에서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라고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결혼을 축하하는 하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신부로 청함을 입은 자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들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랑 되신 그리스도가 참으로 모든 세상으로부터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마땅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신랑이 대단한 분이기에 신부 역시 신랑으로 인해서 대단한 신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복을 복으로 여기지 않는 우리에게 있지 않겠습니까?

신부는 신랑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신랑만 섬기고 내 신랑만 자랑하고 증거 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이 참된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신부로서 옳은 행실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신부라면 신부된 증거는 옳은 행실로 나타납니다. 옳은 행실은 여러분에게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서 나타나는 열매일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에게 향하게 하시기 위해서 수고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성령이 함께 하는 증거는 그리스도를 기뻐하고 증거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신랑 되신 그리스도가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힘쓰며 신랑이 기뻐하는 것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고 살아가게 됩니다.

10절에 보면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천사의 외치는 말을 듣고 요한이 천사에게 엎드려 경배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막으면서 하는 말이 10절의 말입니다. 천사는 자신이 경배 받는 것이 합당하지 않는 이유로서 자기 역시 예수의 증거를 받는 요한의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도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서 세움 받은 종에 불과하기 때문에 경배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경배할 자는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한다고 해서 그를 경배할 수 없습니다. 그는 종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증거는 성령이기에 그 누구도 예수를 증거 한다는 이유로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부란 그 누구도 보지 않고 그리스도만 보고 사는 자입니다. 그리스도만 경배하는 자입니다. 그리스도로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이 크다면 그는 그리스도에게 있는 기쁨고 즐거움을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의 일 때문에 울고 웃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신자라면 무엇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그리고 참된 기쁨과 즐거움에서 벗어나서 엉뚱한 것으로 기뻐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시다. 신부의 옳은 행실은 그리스도로 기뻐하며 사는 것임을 마음에 새기시고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시고자 하는 그리스도에게로 모든 마음과 삶이 끌려가심으로서 신부된 여러분에게서 그리스도가 증거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