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19:17-21 여호와의 전쟁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를 알 수 있다면 성경을 해석하는 방향도 달라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에 대해서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흐름이나 천지창조의 상황에 대해서 안다면 얼마든지 짐작해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창 3:15절에 보면 인간이 죄를 지은 후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싸움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은 뱀이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을 죄짓도록 했기 때문에 비로소 세운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창세전에 택하셨다(엡 1:4)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합당하지 않는 생각입니다. 즉 하나님의 계획은 창세전에 되어진 일이지 뱀이 인간을 유혹한 후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탄은 이미 인간이 지음을 받기 전에 땅에 존재했었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말씀이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계 12:9)입니다.

계 12:7절부터 보면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그의 사자들과 더불어 전쟁을 했고, 그 결과 용이 패하고 하늘에서 있을 자리를 얻지 못해서 땅으로 내어 쫓겼다고 말합니다. 결국 창세 전의 땅은 이미 용이 쫓겨와 있었던 상태였던 것입니다. 즉 사탄이 땅으로 쫓겨 있는 상태에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뭔가 하나님의 계획이 사탄을 멸하시는 것에 촛점이 있었다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죄를 범한 후에 하나님의 선포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은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측면에서 해석이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것 역시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가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전쟁으로 이어지고 있고, 결국 이스라엘까지 멸망시킴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할 때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도 결코 하나님의 실패로 볼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이 어떻게 사탄의 유혹에 빠질 수가 있는가에 대해서 많은 의구심들이 있지만, 애당초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사탄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신 것이고, 그리고 전쟁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미리 계획을 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사탄의 유혹에 빠진 것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완벽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기 위한 계획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본문 역시 하나님의 전쟁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19절에 보면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라고 말씀합니다.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란 땅으로 내어 쫓긴 용, 즉 사탄의 세력을 말합니다. 그들이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란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군대를 뜻합니다.

결국 땅에는 사탄과 그의 군대,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의 군대와의 싸움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현실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군대로서 과연 사탄과의 싸움에 군대로 부름을 입었다는 느낌이 있습니까? 하루하루 사는 삶에서 싸운다는 느낌이 들고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싸운다는 개념이 없이 하루하루를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신앙생활이란 싸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것은 여호와의 전쟁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군대로 부르신 것이지 한 교회의 교인 노릇 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신자를 하나님의 도구로 부르셨다고 할 때 어떤 일에 쓰이는 도구인지를 알 수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신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은혜를 알았다면 이제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날마다 십자가의 피만 말하고 피에 감사만 하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까? 물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은혜를 아는 것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라면 죽을 때까지 십자가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생을 남겨주셨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를 그리스도의 군대로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은혜를 안다는 것은 군대의 자격이지 싸우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사탄은 자신의 군대를 힘과 이적을 보임으로 모읍니다. 16:14절에 보면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고 합니다. 전쟁을 위해서 자기 세력을 모을 때 쓰는 방법이 이적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자기 군대를 모으는 방법은 십자가입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을 보임으로서 자기 백성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알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사탄과의 싸움이 곧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힘을 의지하고 살아가고 힘이 제일인 세상에서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살아가고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싸우는 것입니다. 이 싸움을 위해서 우리가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힘으로 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증거하는 것이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기뻐하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땅의 것을 기쁨의 조건으로 삼고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사탄의 세력에 대한 싸움인 것입니다. 결국 성령을 보내셔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깨닫게 하신 모든 것이 곧 우리를 그리스도의 군대로 쓰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으며 산다는 것만 말하면 뭔가 끈 구름을 잡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사랑하라'는 말씀도 하시고, '용서하라'는 말씀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로서 화평, 온유, 겸손, 절제, 오래 참음 등등의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면 그러한 모습들이 증거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았기 때문에 겸손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알았기에 사랑하게 되고, 예수님의 피흘리심을 알았기에 용서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임을 알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남을 무시하거나 자랑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군대로서 싸움에 참여한 삶입니다. 사탄과의 싸움이라고 해서 죄짓지 않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하고 유혹을 물리쳐야 하는 싸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를 용서하게 되는 것, 섬기게 되는 것, 이 모두가 싸움입니다.

형제를 용서하는 마음은 우리의 마음이 아닙니다. 섬기는 것 역시 우리의 마음이 아닙니다. 성령이 오셔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게 하심으로 주어진 마음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에게 이런 마음을 허락하신 이유는 우리를 군대로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힘으로 살고 약자를 무시하고, 힘이 있으면 타인의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세상에서 오히려 섬기는 자로 살고 사랑하는 자로 산다면 그것은 곧 사탄에게 승리한 것이고, 이 승리는 우리의 승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승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는 자신이 누구 때문에 새생명을 얻은 자로 살아가는가를 알면 됩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면서 자신이 얻은 새로운 생명은 그리스도의 피 때문임을 고백하며 사는 사람이 군사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백은 삶으로 인해서 증거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삶에서 증거 되지 못하는 고백은 단지 허공에 외치는 말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생각만 아니라 삶까지 포함된 따라감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두 포함해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행함이란 성령으로 인해서 행동하게 되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이 함께 한다면 그리고 그리스도를 안다면 앎으로 인해서 행동하게 되어지는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 모든 것이 포함되어서 믿음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20-21절에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싸움이 끝난 후에 있을 일에 대해서 말씀한 것입니다. 즉 세상의 마지막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결국 짐승이 잡히게 되고 거짓 선지자도 잡혀서 유황불 붙은 못에 던지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따랐던 세력들은 새들의 먹이가 될 것입니다. 이토록 비참한 것이 사탄의 세력을 따른 결과입니다.

비록 세상에서 순간 힘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부럽게 보이고 그것이 성공으로 보이겠지만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본다면 힘을 믿고 산다는 것은 곧 사탄과 함께 멸망을 받을 운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볼 때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성공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인생에는 멸망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쟁을 위해서 불려나온 그리스도의 군대입니다. 군대면 군대답게 살아가십시오. 군대다운 것은 우리 앞서 가시는 피뿌린 옷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것도 우리들의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군대로서 드러내야 할 군대의 모습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뭘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의 인생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긍휼을 담아서 보여줄 그릇으로 쓰신다는 것을 잊지 않으면 됩니다. 여러분이 알고 깨달은 은혜와 자비 긍휼하심은 이웃에 대해서 사랑으로, 용서로, 겸손함과 섬김으로 증거될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서로 나누며 살아가게 하실 것이고 자신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섬기게 된다면, 그리고 겸손하게 된다면, 그것은 주님이 여러분을 쓰고 계신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군사로 부름 받았음을 잊지 말고 군사로 살아갑시다. 우리 앞서 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이 증거 되는 삶을 살아갑시다. 그것이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한 군사로 살아가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