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20:1-6 천년

신앙생활은 전쟁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세상의 악에 빠지지 않고 신앙으로 이기기 위한 전쟁으로 여기시면 안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자신에게는 악에 대항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 개개인이 자신의 신앙의 힘으로 사탄과 싸운다는 개념의 전쟁을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전쟁에 군대로 쓰시고 계신다는 차원의 전쟁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전쟁에 군사로 부름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싸움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사탄의 세력 아래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전쟁에 참여한 군사로서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신자는 매일의 삶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 속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는 증거이며 그것으로 여호와의 군대로 살아가고 있음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천년'이라는 말이 계속 반복되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이 '천년'이라는 말을 인용해서 '천년왕국'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천년왕국'에 대한 여러 학설이 주장되기도 합니다. 천년 왕국에 대한 학설 중 기독교의 대표적인 것을 말한다면 무천년설과 전천년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천년설은 천년을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고 재림하기까지의 기간에 대한 상징적인 말임을 주장하고 전천년설은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에 실제 천년의 기간동안 천년왕국이 시작된다고 주장합니다.

이 두 학설은 서로의 모순점을 공박합니다. 전천년설은 본문 1-3절에 나오는 하늘의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를 가지고 사탄을 결박한 후 천년이 차면 잠시 놓인다는 구절을 증거로 말하면서 '지금이 천년왕국이라면 사탄이 결박당한 기간이어야 하는데 과연 지금이 사탄이 결박당한 기간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즉 사탄의 유혹과 활동이 있는 이 시대를 사탄이 결박당한 천년의 기간으로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무천년설이 잘못되었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천년설은 전천년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 후에 천년의 기간이 있고 그 후에 사탄이 놓여나서 환난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지금 사탄이 활동하는 기간은 어디에 해당되는 것이며, 현 시대에도 사탄이 활동한다면 이것 역시 환난의 기간인데 그렇다면 환난이 두 번이 있다는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를 내세워서 전천년설의 모순을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이 둘의 학설 중 어느 것이 맞고 어느 것이 틀리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둘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 학설을 따르기보다는 말씀 안에서 우리 스스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에서 말하는 천년의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성경에는 천년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 안에서 천년의 의미를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천년의 의미를 인간의 수명에서 찾고자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인간 중에서 가장 오랜 수명을 산 사람이 므두셀라이며 969세를 살았다고 말합니다. 므두셀라 외에도 여러 사람이 900세를 넘은 수명을 살았지만 어쨌든 가장 오래 산 사람은 969세였으며 결국 천년을 넘기지를 못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969년과 천년은 그렇게 큰 차이가 있지 않습니다. 겨우 31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969년을 살 정도의 사람이 왜 천년을 넘기지를 못했을까요? 969년을 살 정도라면 천년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시나 지금이나 인간의 수명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그렇게 볼 때 결국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천년이란 수명은 허락하지를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러셨을까요? 969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수명을 허락하셨으면서 왜 31년만 더하면 되는 천년이란 수명은 허락하지를 않으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혹시 천년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타락한 후 하나님이 인간에게서 빼앗으신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생명나무를 감춰 버리심으로서 인간은 영원한 생명과는 상관이 없는 존재가 되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969세까지 살게 하신 하나님께서 천년이란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은, 천년이 영생을 의미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천년이라는 것을 어떤 기간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즉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의 상태를 천년으로 이해한 가운데 본문을 본다면 본문이 말하는 것이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천년을 시간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시간이란 인간의 의식이지 하나님의 의식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에게는 시간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천년이란 시간을 정해 놓고 그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일을 진행하시는 것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천년이란 타락한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수명입니다. 즉 타락한 인간이 거할 수 없는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 천년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다른 세상'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결국 끝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수명을 초월한 세상, 즉 영생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 천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천년'을 기간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의 사고방식이 아닌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새로운 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4절에서 말씀하는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한다'는 말씀도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실제 천년의 기간동안 왕노릇 하게 될 것을 말하는 미래의 사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탄의 세력에 머리 숙이지 않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왕노릇 한다는 말에 대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적인 시각에서 왕노릇 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다스리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힘입니다. 즉 돈이나 권력 등이 있어야 왕노릇 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돈도 없고 권력도 없는 상태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한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지 천국에 가서 왕노릇 하게 될 미래의 사건으로 이해하며 '비록 세상에서는 무시 받고 업신여김도 받고 힘들게 살았지만 그래도 천국에서는 왕노릇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 사람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서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한풀이 정도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왕노릇 한다는 것은 왕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왕되신 분과 함께 그분의 권한과 능력을 누리는 것을 왕노릇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왕으로 오신 분의 신분과 환경은 어떠했습니까? 왕과는 전혀 거리가 먼 신분이며 환경이었습니다. 목수의 아들이고 가난한 환경입니다. 왕이라고 할 수 없는 신분과 환경에서 태어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왕으로 오셨다는 것은 세상의 생명을 다스리는 권한이 예수님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이 예수님의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서 미련이 없으셨습니다. 이것이 왕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한다는 것은,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가 누리셨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자 역시 그리스도처럼 이 세상이 영원히 거할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히 거할 나라입니다. 사망과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무엇을 얼마나 누리고 사느냐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에 관심을 둘 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할 사람들은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베임을 받은 자들의 영혼이며,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이러한 모습은 사실 피하고 싶은 것이지 결코 왕노릇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자들이 왕노릇 한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여러분의 머리에서는 그러한 것이 왕노릇 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안하겠다는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신자가 세상에 의해서 목베임을 받은 것이나 세상의 세력, 즉 짐승의 세력에게 머리 숙이지 않고 경배하지 않는 것은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되어진 것입니다. 결국 예수의 증거와 말씀으로 인해서 당하는 고난이나 핍박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세상의 힘에 대해서 굴복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이미 그 사람은 그리스도로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단의 다스림에 아래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결국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것이고, 이것이 곧 천년 동안 왕노릇 한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다른 세계에 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섬김과 희생을 따라가는 것이 곧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한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는 자들이며 살아도 주안에 있고 죽어도 주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생명 되신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천년이라고 하는 다른 세상에 거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며 이들을 가리켜서 첫째부활에 참여한 자라고 말합니다.

5-6절에 보면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고 말합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에게는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다고 합니다. 둘째 사망이란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심으로서 영원한 멸망에 처해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첫째 사망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사망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것 자체를 말합니다. 생명 되신 하나님을 떠난 상태가 곧 첫째 사망인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첫째 사망의 의미입니다.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것이고, 그 상태가 곧 생명 되신 하나님을 벗어난 사망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사망은 첫째 사망에 처한 자들이 영원한 사망으로 처해지는 것입니다. 이 둘째 사망이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을 다스릴 권세가 없다는 것은, 결국 생명 되신 하나님과 함께 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사망이 그들을 다스릴 권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째 부활이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죄악된 인간이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인해서 죄를 용서받고 생명 되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가 된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이 첫째 부활입니다.

이렇게 볼 때 첫째 부활은 실제 육이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할 수 없는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 뒤바뀐 기적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이 된 것은 우리들의 믿음이나 애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성령이 함께 하신 결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생명을 얻은 마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었기에 사망이 없으며 사망이 없기에 첫째부활에 참여한 신자가 살아가는 삶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신자가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게 된 것을 복이 있고 거룩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 5:25절에 보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그 음성을 듣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망에 처한 자는 아들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도 그리스도를 알 수 없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심으로서 인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게 합니다. 그들은 살았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기에 생명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의 모습입니다.

로마서 6:4절에 보면 이것을 새생명으로 살아가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고 에베소서 2:5-7절에서는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심으로서 그리스도로 인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로 살아가는 것을 이미 하늘에 앉혀진 삶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를 둘째 사망이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말씀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 무엇으로 바꿀 수 없는 거룩이며 귀한 복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이와 같은 복과 거룩을 이해한다면 이미 그 마음은 그리스도를 향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것으로 인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원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이 처한 환경과 상황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감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마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로서 왕노릇 하기를 원하며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삶의 현재 모습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솔직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깊이 깨닫고 무엇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진심으로 왕노릇 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나 우리 속에 또 다른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현실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고 세상 것이 없음에 대해서 실망하게 하고 다른 것을 원하도록 미혹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모습이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의 현실은 사탄이 미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3절을 보면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미래에 있을 사건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지금 현재의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사단을 결박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사단에 대해 승리하신 것을 의미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사단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실패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활동은 십자가 안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그 어떤 사단의 유혹도 십자가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시험에서 이미 증거된 사실입니다. 이것이 곧 사단이 결박당한 상태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단이 신자를 미혹을 할지언정 사망으로 끌고 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그리스도의 보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를 그리스도께서 보호하십니다. 때문에 사단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발악을 한다고 해도 그의 활동은 결국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사단이 결박당한 상태인 것입니다. 꼼짝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에게 실패한 사단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교회에 대해서도 뜻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에게는 사망이 없는 것입니다. 사망이 없기 때문에 사망에 처한 이 세상과는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고, 그것을 천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신자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닙니다. 생명 되신 하나님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신자의 죽음을 죽음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살아있는 것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처럼 귀한 신자의 신분됨을 누리고 살아가십니까?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 자가 된다는 것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갑니까?

이렇게 볼 때 우리 자신들은 천년이라는 생명의 나라, 사망이 없는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입술은 다른 세상이지만 우리의 삶은 여전히 사망이 함께 하는 이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부러워하며 고개 숙이는 것은 아닙니까? 그것은 결국 귀한 하늘의 생명을 무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의 삶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면서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인해서 주어진 생명에 감사하신다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된 것을 귀한 복으로 여기시며 날마다 왕노릇 하는 신자로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